오늘을 베끼지 않기로 했다

조용히 나를 만든 날들

by 가슴속호수

어제를 따라 쓰는 순간, 오늘은 나의 것이 아니다.

손끝이 멈칫했다. 매일 열던 현관문인데, 그날따라 감촉이 낯설었다. 평범한 아침이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 작디작은 이질감이 말없이 속삭였다. 지금, 이 하루는 처음 살아보는 날이라는 것을.

무엇이 변한 것일까. 변한 것은 문이 아니라, 나였다. 오랫동안 시간을 잘못 헤아렸다. 시간이 수평으로 흐른다고 믿었지만, 사실 시간은 수직으로 쌓이는 것이었다. 지질학적 시간처럼 어제 위에 오늘이, 오늘 위에 내일이 켜켜이 퇴적되는 구조. 나는 맨 아래 지층에 갇혀 화석화된 과거의 이미지로 현재를 해석하며 살았다.

반복된다는 착각 속에서 어제를 흉내 내려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은 어제가 되지 않았다. 감각이 멈춰 서고 마음이 발뒤꿈치를 되짚었다. 그 순간 오늘은 더 이상 어제의 복사본이 아니었다.

어제를 흉내 내는 순간, 오늘은 나의 하루가 아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은 감정으로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살아서는 오늘을 기록할 수 없다. 삶이 복사본처럼 느껴질 때, 나는 내 삶을 표절하고 있었다.

인간의 뇌는 효율적이다. 반복되는 자극을 자동으로 걸러내어 매일 보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습관화시킨다. 이는 생존에는 유리할지 모르나, 삶에는 치명적이다. 습관화된 시선이 세상을 낡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절대 반복하지 않는다. 해마다 피는 벚꽃도 매년 다른 조합으로 태어난다. 아침 이슬에 젖은 풀잎은 어제의 그것과 같을 수 없고 저녁노을은 결코 어제의 그 빛깔로 하늘을 물들이지 않는다. 강물도 그렇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했듯이,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며 새로운 물줄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자신만 제자리에 있었다. 같은 감정으로 같은 사람을 보고 같은 편견으로 같은 상황을 해석했다. 인간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같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구원은 가장 평범한 순간, 예기치 않은 틈새로 스며들었다. 비 온 후 아스팔트 위의 물웅덩이, 그 속에 비친 하늘은 진짜 하늘보다 깊어 보였다. 거꾸로 된 세상이 오히려 진실처럼 다가왔다. 그때 비로소 마음으로 와닿았다. 지금까지 거꾸로 서 있었다는 것을.

변화는 혁명이 아니다. 현미경의 초점을 아주 조금 옮기는 것, 그 작디작은 조정으로 완전히 다른 세포가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시선을 달리하자, 세상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낡은 길 위를 걷던 어느 날, 초록빛 나뭇잎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빛은 단순한 색이 아니었다. 잎맥을 따라 흐르는 생명의 기운이 처음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감각이 살아 있어야 삶이 새롭다.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냄새를 맡고, 늘 마시던 커피에서 다른 온도를 느끼고, 매일 새롭게 피는 사람의 표정을 눈여겨보는 일. 반복이 아닌 관찰이 쌓일 때 하루는 의미가 있다.

세상은 매일 새롭게 흔들린다. 햇살이 벽에 드리우는 각도가 다르고, 커피의 향이 바뀌고, 말의 끝맺음이 달라진다. 그러나 사람은 어제의 판단으로 오늘을 해석하고 어제의 피로로 오늘을 무디게 만든다. 오늘도 똑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오늘이 같아서가 아니라, 오늘을 똑같이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커피의 향도 다르게 맡아진다. 같은 원두지만 오늘의 습도와 기압에 따라 다른 향기를 낸다. 신문 귀퉁이의 문장도 다르게 읽힌다. 같은 활자지만 읽는 마음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 삶의 진실은 거대한 사건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아주 작은 균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깊어진다. 하루하루 새로운 층위가 쌓이고 그 깊이 속에서 낯선 자신을 만나게 된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어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르면 모든 것이 초판본이 된다.

어제를 흉내 내지 않겠다는 다짐은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듣고, 같은 길이라도 낯선 시선으로 걷고, 같은 사람에게도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일. 어제의 감정은 어제에 묻어두고 오늘이라는 이름을 내 손으로 처음부터 써 내려가는 일. 그 하루는 결코 다시 올 수 없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같은 화면, 같은 말, 같은 피로 속에서 하루는 무채색으로 지워진다. 시스템이 설계한 하루가 아니라, 내가 설계한 하루를 살아야만 오늘은 내 것이 된다.

오늘도 길을 나선다. 어제에 머물지 않는 시선으로, 달라진 감각으로. 길은 여전히 어제의 길이지만, 그 위를 걷는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다. 단 하나의 자각이 익숙한 세상을 통째로 바꾼다. 그 다름을 느끼는 순간, 흔하디흔한 하루는 유일한 날이 된다.

오늘도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별일 없던 하루였다고.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사소한 감각 하나가 삶을 다시 쓰게 했다는 것을. 평범한 하루 안에도 생경한 울림이 있었고 무뎌진 마음에도 작은 떨림이 있었다.

복사되지 않는 하루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오늘, 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날을. 그리고 그 하루를, 나는 어제와 다르게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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