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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Sep 12. 2016

결코 우울하지 않았던 제주

제주는 역시, 제주였다


유월 어느 날 제주


보고 또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옥색의 바다. 동글동글한 선들로 이어진 오름.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 하지만 유월 어느 날의 제주는 아름다울 거라 기대하던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춘기의 아이가 이유 없는 일탈을 하듯, 제주의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가득했고, 주변은 안개가 끼인 듯 흐릿하기만 했다. 게다가 구석구석 퍼지던 덥고 습한 공기는 사람들의 생기를 반감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잠깐의 일탈이라 해도 천성 고운 아이는 결코 미워할 수 없듯, 흐린 제주라 하여 야속해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다. 제주는 결코 우울하지 않았고, 제주는 역시 제주였다.


2016년 6월. 외돌개
2016년 6월. 외돌개
2016년 6월. 외돌개



흐린 바다 그리고 기억


공기는 습하고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주인데...'라고 말하듯, 한치도 볼 수 없을 만큼 두터웠던 안개를 뚫고 불어오는 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시원했다. 시원함과 습기의 찝찝함의 차이는 컸고, 결국 진한 습기보단 바람에 전해지는 시원함에 매료되어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뿌연 바다와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는 길을 잃었던 어릴 적 나를 생각나게 하였다.


항구가 보이는 바닷가. 길을 잃은 나는 어느 아이와 함께였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옆집에 살던 여자아이였다. 어찌하여 길을 잃게 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했지만 그 보다는 먼저 그 아이를 안심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아주 세게 꼭 잡고 있었고, 우리는 방향을 알지 못한 채 바닷가를 헤매고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방향에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갔지만, 나는 그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 아이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결국 아이와 나는 우리를 찾던 어른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멀고도 먼 유년의 기억이지만 지금도 스치듯 떠오르는 것은 그날의 하늘은 흐렸고 잠깐잠깐 불어오는 바람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싱그럽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또한 두렵고 무서웠지만 그 아이의 손을 잡으며 꼭 함께 있어 주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어쩌면 그날, 길을 잃었던 어린 나는 그 아이의 손을 꼭 잡으며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함께 있다는 것. 때로는 곁에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살아가는 힘을 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 힘은 내가 될 수도 있고, 상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 지금 우리는 함께 있잖아."



2016년 6월. 외돌개



정리와 인정 그리고 비움


흐린 바다는 단순했다. 해변과 하늘은 불투명했고 푸른색은 회색과 섞여 밝음과 어두움의 명암으로만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는 볼품없는 바다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화려한 색으로 어우러진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속상해 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체념이 아닌 그 또한 제주의 매력이라 생각하며 흐린 바다 그대로의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흐린 바다의 인정은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했다. 단조롭게 보이던 바다는 나 자신을 인정하게 하였고 스파게티처럼 돌돌 말리고 꼬여 있던 머리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다시 꺼낼 수 있도록 차곡차곡 가지런히 쌓은 정리가 아닌, 어질러질 수조차 없도록 흐림의 바다로 던져 버린 비움의 정리였다. 그리고 고민들을 한 순간에 버렸다고 하여 불안해하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도 알게 해주 었다. 결국 강박관념처럼 힘들게 했던 원인은 내 마음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바다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안개에 가려진 흐릿한 저 먼 세상에는 누구도 생각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어요. 그 많은 것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에 따라 크기와 결과가 결정되지요. 그리고 분명 세상은 당신이 찾고 싶은 무언가를 꼭 찾도록 해 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작은 것에 흔들리지 말고 넓고 대담하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그것은 결국 당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까요 "



2016년 6월. 하효동 쇠소깍 해변



산의 조명과 배경이 되어준 흐림


계속되는 흐림에 제 모습의 산을 볼 수가 없었다. 안개는 하얀 장막을 치며 산과 하늘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었고, 비밀 무언가가 있는 모습은 산의 모습을 영험하고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마치 산신과 하늘의 신들이 만나 은밀한 교감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은 늘 보아왔던 우리들의 산이 아닌 신들의 산인 것 같았고,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아쉬워했으며, 온전히 볼 수 없는 산의 모습에 흐린 날씨를 원망하며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흐림은 모든 것을 아쉽게 하지는 않았다. 흐림은 그 자체로 조명과 배경이 되어 주변의 모습을 더욱 이국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수숫대 모양의 갈색 빛깔의 풀들은 대지에 낮게 깔린 흐림과 조화를 이루었고, 그 속에서 엄마 말과 아기 말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늘 보아왔고 누군가 찍은 사진을 보며 꼭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모습이 아닌, 예상치 못한 현실 속의 또 다른 그림은 여행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제주에 간다고 하면 흔히들 묻곤 한다. "지나번에 간 곳을 또 가? 볼 거 다 보지 않았나?"라고. 그러면 숫기 없는 나는 대답한다.


" 그냥.... 제주가 좋아서..."


하지만 그럴 적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렇게 답변하곤 한다.


" 어느 여행지이든 사시사철 풀과 나무, 꽃의 느낌이 다르고, 하루라 해도 어느 시간 어떤 날씨에 풍경을 마주 하는가에 따라 느낌이 다르거든. 어쩌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름 모를 꽃들이 지금은 아주 곱게 피어 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누군가는 그 꽃을 보는 순간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다시 그곳을 가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꽃들을 보며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않을지는 나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모르거든. 그래서 이전에 갔던 곳이라 해도 떠나봐야 하는 것이 여행이야 "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하나의 상황에서도 하루하루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이 다르듯, 똑같은 장소의 여행이라 해도 매 순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보이는 경험은 또 다른 여행을 상상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2016년 6월. 안개가 가득한 산방산
2016년 6월. 산방산이 보이는 곳 에서
2016년 6월. 산방산이 보이는 곳 에서
2016년 6월. 산방산이 보이는 곳 에서



꽃과 풀


흐린 날씨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쉽게 했지만 그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 무채색이 되어버린 세상을 밝혀 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얗게 핀 꽃들이었고, 안개가 가득한 세상에 희미한 백열등을 켜어 놓은 듯 은은하게 피어 있었다. 이름을 알지는 못했지만 꽃들은 주변을 밝혀 주기에 충분하였고,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 곁엔 홀로 있었더라면 볼품없었을 나무가 꽃들 덕분에 훌륭한 풍경의 조연이 되고 있었다.


 주위로는 낮게 솟은 등성이의 부드러움이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보여주며 시선을 끌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보이는 풀들은 회색으로 변해버린 하늘을 향해 강인한 생명으로 피어 올라 있었고, 흐린 날씨에도 언덕 너머 바다의 해풍을 꿋꿋이 버티며 그들의 소중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피어있는 풀들을 보며 생각했다. 무심코 지나는 시간, 무시하며 지나치는 모든 것들이, 어느 생명, 어느 누구에게는 소중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기 좋지 않고 아름답지 않아 나에게는 쓸모없다 하여 너무도 허무하게 버려지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순간, 아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지나치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2016년 6월. 산방산 아래에서
2016년 6월. 산방산 아래에서
2016년 6월. 용머리 해안 근처
2016년 6월. 용머리 해안 근처


흐린 오름


오름의 정상은 가까운 듯 멀게 보였다. 뿌연 하늘과 맞닿은 오름의 곡선은 부드럽고 온화했으며, 삶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듯 고요하고 정갈하게 느껴졌다. 오름을 오르기 시작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옷이 달라붙을 만큼 후덥지근하고 눅눅해진 몸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였는지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보다는 천천히 올라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씩 다가오는 능선의 모습과 뒤로 보이는 대지의 모습들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감탄의 소리를 커지게 했다. 함께 오르던 사람들도 하루 종일 궂은 날씨에 속상해하던 마음을 보상이라도 받듯 저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얘기가 들려왔다.


" 날씨가 흐리니 더욱 좋네. 맑았으면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었을 텐데. 구름이 해를 가려주니 더욱 운치 있고 좋은 거 같아 "


그 순간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어디선가 들리는 말에 공감하며 흐리다고 불평했던 마음을 멋쩍어하는 것 다. 그렇게 흐림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오름의 매력을 더욱 깊게 해 주고 있었다.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을 오르는 사람들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을 오르는 사람들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오름과 사람들


오름에 있던 사람들의 결음의 방향은 모두 달랐다. 어떤 이는 내리막 길을 걸었고, 어떤 이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려가는 이는 정상에서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에 담고 행복해했으며, 오르는 이는 잠시 후면 보게 될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힘을 내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발걸음은 가벼우면서도 힘찼다. 먼저 보았다고 우쭐해하지도 않았고 늦게 보게 되었다며 조바심을 내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공평했고, 늦음과 빠름의 경쟁도 없었다. 다만 그곳엔 자신의 목표를 향해 걷는 이들만 있었고 정상을 본 이와 정상을 기대하는 이가 마주치며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만이 있었다.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에서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에서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에서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에서


오름의 정상에서


흐린 하늘이었지만 오름의 정상에선 선명하지 않다고 하여 불평할 일도 투덜 댈 일도 없었다. 그곳엔 광활한 대지의 속살을 보여주며 수줍어하는 제주의 아늑함만이 있었다. 간간히 회색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빛은 그 운치를 더욱 깊게 해주었고,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의 능선을 따라 흐르는 빛들은 자연이 주는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인공으로 만들 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풍경이 결코 아니었다.


흐림은 맑음에게 꼭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맑은 날만 있으면 좋겠지만 흐린 날이 있어야 맑은 날의 존재는 더욱 빛이 나고 소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흐린 날의 회색 하늘색처럼 원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여 우울해하며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흐린 하늘 속에서 비치는 빛이 더욱 선명하듯, 역경을 이기고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더욱 기쁘고 보람되지 않을까? 그래서 성공을 위해서는 회색 하늘처럼 역경도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 역경은 환한 빛이 내리쬐는 성공으로 될 테니까.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빛과 약속



흐린 제주는 나에게 많은 선물을 선사했다. 맑은 날의 화려함에 감추어졌던 흐림은 단조로움으로 다가와 순간순간 많은 상념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상념들은 거창하고 확실한 답보다는 작은 깨달음의 마음들로 모아져 마음을 뿌듯하게 해주었다.


어느 누구나 모든 사람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삶이 어찌 그리 쉽게 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하지만 우울하고 힘들어도 낙담하지 않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희망들을 품으며 살아간다면 행여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그간의 힘써왔던 작은 노력들로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에 얻어지는 결과보다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겪는 좌절과 절망, 고통, 그리고 극복과 성취를 통해 얻어지는 배움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의 질병들과 맞서기 위해 백신 주사를 맞듯 우리들도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고난과 성취라는 백신을 맞는 것이 아닐까?


여행을 마치는 것을 아는 듯 하늘은 더욱 검게 변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풀들은 오늘은 저 멀리 비추는 빛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만족한다며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도 그럴 것처럼 흐린 대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순수하고 소박하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떠나기가 아쉬워 다시 한번 엄마의 마음 같은 부드러운 먼 곳의 오름들을 바라보았다. 오름들 위로 검은 구름을 뚫고 내일은 멋진 하늘을 보여 주겠다 하며 환한 붉은빛이 대지와 오름들에 비치고 있었다. 그 빛들은 멋진 맑음을 약속하는 징표였으며 그것은 흐림과도 함께하자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약속은 아주 희망적이고 굳건했다. 마치, 낯선 바닷가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곁에 있던 아이를 지켜 주겠노라 굳게 잡았던 손과 변치 않던 그 마음처럼.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2016년 6월.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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