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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Aug 13. 2022

장마를 닮은 목욕탕과 요구르트 엉덩이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8월 3일. 본격적인 무더위와 함께 장마가 시작되는 때이다. 휴가철에 생일까지 껴 있지만 나는 여름이 싫다. 푹푹 찌는 더위에 시끄러운 매미 소리, 달려드는 모기들. 흐르는 땀까지. 꽁꽁 싸매면 그만인 겨울과 달리 여름에는 신경 쓸 게 너무도 많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장마철에 거리 가득 퍼지는 물 냄새는 참 좋아한다. 왕창 내리는 비 냄새는 바다나 강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다. 마치 거대한 대중목욕탕에 온 기분이 든달까. 그것은 물 머금은 풀 냄새와도 다르고, 수영장의 서늘한 냄새와도 다르다. 눅눅하면서 후끈후끈한데 묘하게 멜랑콜리해지는 것이 습한 대중목욕탕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


    어릴 때는 대중목욕탕도 정말 싫어했다. 엄마는 우리 세 자매를 목욕탕에 데려가 주기적으로 떼를 밀어주었는데, 엄마의 손이 너무도 억세서 매번 살이 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는 날이면 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잡혀가곤 했다. 나중에 가겠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다자녀 집안에서는 한 명 한 명 상황을 맞춰줄 여유가 없는 법. 엄마는 늘 세 자매를 한 날 한시에 모아 일을 처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징징거리며 엄마 손에 붙들려 목욕탕에 끌려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름에는 때가 술술 잘 밀린다며 호탕하게 웃는 엄마가 야속하기만 했다.


    목욕탕에 가면 우리 네 모녀는 샤워 부스 앞에 조르르 앉아 수다를 떨었다. 샤워가 끝나면 차례로 탕에 들어가 대기한다. 잠시 뒤 엄마가 큰언니부터 호명하기 시작하면 기다리는 나머지 두 명은 소금 방이나 온탕 냉탕을 오가며 정신없게 논다. 곧이어 벌게진 피부의 언니들이 비척거리며 걸어 나오면 내 차례다. 엄마는 늘 대패질을 하듯이 나를 사정없이 밀었는데 따갑다고 우는 소리를 내면 때수건을 낀 손으로 내 등짝을 찰싹 때리면서 “하이고 가시나 가만히 안 있나!”라며 소리를 쳤다. 가뜩이나 살갗이 아픈데, 남들 앞에서 등짝까지 맞으니 창피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병 주고 약 주고인지 그런 내 얼굴을 보면 엄마가 퍼허 웃으며 요구르트를 건넸다. 그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세 자매가 일제히 요구르트 밑동을 따서 쪽쪽 빨아 먹었다. 그렇게 요란했던 목욕 행사가 마무리된다.


    목욕을 마치고 길을 나서는 저녁에는 뜨거운 여름 바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홀가분한 몸으로 요구르트 하나씩을 마시며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그날은 잠들기 전까지 보들보들해진 피부를 괜히 부비며 잠에 든다. 매일 이렇게 피부가 뽀얬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음 때밀이가 덜 힘들 테니까. 앞으로는 놀이터에 가도 얌전히 그네만 타다 와야지.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이제 나는 보디스크럽을 쓰기에 때를 밀 일이 없다. 로션도 듬뿍 발라 살이 트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목욕탕에도 발길을 끊게 됐다. 그러니 최근에 본가에서 오래된 때수건을 보고는 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에게 말했다.


    “누가 요즘 때 밀어요? 스크럽 하나 사 줄 테니까 이거 버려요. 피부 다 상해”


    내 잔소리를 들으면 엄마는 늘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


    “쪼끄만게 가르치려 드네, 니나 잘해라!”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꼼꼼히 스크럽을 했다. 거창하게 때를 미는 것도 아닌데 제법 어깨가 저려왔다. 이럴 때면 주책맞게도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어떻게 지치는 기색 없이 세 명씩이나 되는 아이들을 빡빡 밀었을까? 그때는 아프다고 징징거리기만 했는데 매달 딸 셋을 목욕시키는 수고가 어땠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 왜 그렇게 빡빡 살아서는 고생을 하나. 사람이 요령도 피우고 해야지. 나는 왜 이렇게나 느려서 그때는 짜증을 잔뜩 내놓고 이제야 혼자 욕실에서 청승을 떠는지.


    여름을 떠올리면 엄마가 생각난다. 눅눅하고 무거운 날이 당신의 얼굴을 닮아서인지 내 기분을 닮아서인지 모르겠다. 요구르트 밑동을 따 마시면서 걷던 그 거리는 아마도 평생 내 여름을 대변하는 기억이 될 것이다. 고된 삶 속 우리만의 새참, 장마를 닮은 목욕탕과 요구르트 엉덩이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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