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을 읽고
김민철 / 위즈덤하우스 / 2024.07.10
도쿄 올림픽 폐회식 당시, 말미에는 2024 파리 올림픽을 소개하는 영상이 이어졌다. 이국적인 매력이 가득한 랜드마크들이 지나갔고 나는 에펠탑에 큼지막한 올림픽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난 저 날 꼭 파리에 있을 거야.' (아마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물론 현실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불현듯 깊은 진로 고민에 빠졌고, 긴 시간 동안 이어진 교육을 거쳐 어느새 취업을 해버렸다. 그렇게 평일 내내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주말에도 그다지 특별한 이벤트를 즐기지 않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파리에 가겠다던 원대한 꿈은 자연스레 흐려져갔다.
그런 내게 한동안 잊힌 파리의 꿈을 불쑥 들춰낸 책이 있다. 바로, 김민철 작가님의 파리 산문집 《무정형의 삶》이다. 파리 특유의 분위기가 한껏 묻어나는 표지만으로도 심장이 반응하는데 심지어 김민철 작가님 책이라니. 무려, 퇴사 후 파리에서 보낸 두 달간의 이야기가 담긴 산문집이라니..!!! 당장 사야만 했고, 빌려 읽는 것이 아닌 무조건 내 서재에 꽂힐 책으로 소장해야 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았는지 아쉽게도 한정 사인본은 놓쳤지만.. 조용한 주말, 양장의 책 한 권이 내 손안에 들어온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랜 꿈이 두 손에 쥐어진 느낌이었달까.
"결국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다는, "고정된 삶을 지키는 대신 무정형의 시간을 모험하고 싶다"라는 작가님의 여행기는 잠옷 바람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나까지 어느새 그 '좋음'이 가득 펼쳐지는 여정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로망의 종착지인 파리에 불쑥 초대해서 퐁피두 센터 앞으로, 탐험하듯 헤매던 골목으로, 여유 가득한 공원으로, 동네 생활의 심장이라는 치즈 가게로 함께 데려갔다. 파리를 사랑했던 또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 낭만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 버렸다. 책을 펼쳐 읽는 순간에만큼은 나도 '우연의 축제'에 뛰어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현실의 삶과는 다르게.
지금껏 나는 항상 자로 반듯이 잰 듯한 삶을 그어오고자 발버둥 쳐왔다. 혹여 선 하나라도 빗나갈까 두려워 온몸에 힘을 주곤 긴장을 늦추질 못했다. 그러니 금세 뻐근해질 수밖에. 형태가 정해져 있으니 틀 안에 잘 맞추어 채우기만 하면 미래는 완벽해질 것이란 단순함에 속아 내 삶을 꾸려왔다. 그만큼 스스로를 '정형의 삶' 속에 가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그 틀이 흐트러져도 괜찮음을, 긋던 선을 넘어야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음을, 인생의 풍성함에 누구나 다다를 수 있음을 작가님께서 넌지시 문을 열고 알려주셨다. '무정형의 삶'을 모험해 보아도 괜찮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동안 속박되어왔던 무언가 탁 풀린 기분이 들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은 잠시 덜고, 고정된 삶을 조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빚어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용기가 번져온다.
"Demain, C'est L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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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5~66
살고 싶은 속도대로 살아도 되는 여행이라면, 내가 살고 싶은 속도는 어떤 걸까. 그 속도를 열심히 찾아보자, 라고 쓰려다가 멈춘다. 찾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그래도 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되는 시간을 내가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p.139
선을 넘어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을 넘어야 예상치 못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선을 좀 넘어야 비로소 인생은 풍성해진다.
p.189
우연의 축제가 벌어진다면, 여행자의 목적지는 그곳이어야 한다. 오늘 계획한 것들을 모두 뒤로하고 우연의 축제에 뛰어들어야 한다. 평생을 이야기할 에피소드가 그곳에서 탄생할 것이다.
p.314
막막한 만큼 자유로울 것이다.
고독한 만큼 깊어질 것이다.
불안한 만큼 높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은 이제 끝나지만,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