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
유튜브를 볼 때 댓글 창을 함께 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 흥미 밖 대세에 대한 탐구가 습관으로 이어졌고, 덕분에 요즘 말의 흐름을 조금 배운다. 그중 '무해하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주로 귀여운 동물 영상의 댓글에서 보이던 것이 최근엔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고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등등. 만능의 저자극 긍정어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르코를 본 후 첫 생각은 '참 낙관적이고 무해하네'였다. 내겐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고, 충만함이었다. 아마 많은 관객이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만큼 뻔뻔하고 강한 무해함이다. 이 무해함은 낙관을 타고 전달되는데, 별다른 논리는 없다. 언뜻 서사의 허술함이나 선의에 대한 맹신, '결국 다 잘될 거야'라는 막연한 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너머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아르코의 낙관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향한다.
아르코 일행이 이뤄내는 위기의 극복에는 일관된 선의가 있다. 과거와 미래를 그대로 수용하는 아르코와 아이리스, 20여 년의 꿈보다 기다림을 선택하는 바보 삼인방,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기억을 소중하게 기록하는 미키. 자라는 키만큼 커지는 세상의 그림자를 마주할 어린이들에게. 감독은 '너무 불안해하지 마. 아르코 일행처럼 잘 해낼 거야.'라 응원을 건넨다.
반면 이들의 배경엔 미래의 시스템과 아이리스의 부모, 즉 안일한 어른들이 있다. 부모는 자식을 시스템에 의존해 키우고, 그 시스템은 대재앙의 발생에도 흡사 우산을 쓰듯 수동적으로 방어할 뿐이다. 감독은 위기를 일상으로 취급하며 사는 우리에게 아이리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변화를 원했어."라고.
어른들의 게으른 낙관을 서늘하게 응시하는 동시에, 어린이를 위한 따뜻한 낙관을 전달하는 이 영화는 분명 무해함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이리스가 '변화'를 외치며 낙관의 동력을 스스로 쟁취할 때, 고작 '해롭지 않음'에 머문 내가 겸연쩍다. 본래 '무해'는 매뉴얼 따위의 언어다. '일반적 사용을 전제로 해로움이 입증되지 않았다.'라는 차가운 기계적 언어. 이 단어를 정반대의 온도로 사용하는 현상은 꽤 재미있다. 긍정어 무해함의 확산은 유해함의 확산과 같다.
정보는 넘치고, 신뢰 회복력은 없다. AI는 생산을 가속하고, 알고리즘은 멍청하게 반복 전달한다. 수익성에 굴복한 윤리는 유해성과 유해 가능성을 구분하지 않는다. 낙관을 갉아먹는 건 현재의 거짓말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아니면 말고'라는 태도다. 우리는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무해함에 이끌렸고, 무의식적으로 무해함의 성질을 찬사로 전환했다. 안타깝고 안타깝다.
이미 안다. 현실이 무해하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관객석에 앉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우리 내면에 여전히 오염되지 않은 영역이 남아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우리의 삶엔 유해와 무해의 기준에서 벗어난 좋은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우리도 이 영화의 온기에 공명하는 좋은 사람이지 않은가.
아이리스를 따라 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다.
우선 우리에게 물어보자.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