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을 다문 채 노래하라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by 잡식성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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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뒤 어떤 고양감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형태나 방식을 멋지게 구현한 영화를 만났을 때 느끼곤 했다. 이 고양감은 아마 흐뭇함이라는 말이 가장 가까울 것 같다.


장르적 쾌감도 좋지만, 블랙코미디를 선호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약자를 응원하는 마음이다. 모순은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나타나고, 현실에 가까운 상대적 약자가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풍자든 블랙코미디든 이런 행위는 그 모순을 알아봐 주고, 비틀어주고, 웃음을 준다. 약자는 그 마음에서 위안을 얻는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가 끝나고 내가 느낀 고양감은 이런 주제에서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여간해선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이기에 궁극적인 가치를 다루는 작품은 대부분 주제의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름 신선하게 다룬다고 해도 그 시도보다 그 태도에 반감을 사기 마련이고, 재치는 조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블랙코미디에도 까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더 냉담한 시선과 더 온화한 시선이다. 전자는 모순을 서슬 푸르게 폭로하여 대상을 소모하기 쉽고, 후자는 대상을 확실하게 단죄하지 않아 날을 잃기 쉽다. 이 영화는 후자에 가까우면서도 무뎌지지 않는다. 인물들을 희화화하되, 연민하지 않는 것이다.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동조자를 다면적으로 비추고 그들의 관계를 존중한다. 덕분에 궁극적 가치에 관해 다루면서도 생생하다. 그리고 주제 의식을 끝까지 굳건하게 지킨다. 비판과 온기, 역사와 현재의 균형이 절묘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내가 접한 블랙코미디 중 가장 밝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감각이다.


델리아의 딸 마르첼라는 어머니에게 화를 낸다. 왜 도망가지 않느냐고, 왜 이렇게 사느냐고. 그 분노의 바닥에는 자신도 델리아처럼 살게 될까 봐 겁내는 마음이 있다. 생존에서 자유로운 이는 처절한 생존을 쉬이 비굴로 오해하곤 한다. 델리아의 저항 방식이나 존엄의 하한은 암울하고 참혹하다. 하지만 적재적소에 배치한 해학들이 그 무게를 덜어준다. 비극에 대해 애련하기만 한 방식으로는 닿지 못할 정서다. 관객의 대부분이 여하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자, 나름의 치열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 중 '비극에 공감하고, 네 삶에 감사해라. 그것을 위안 삼아라.'라는 말을 진정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보다는 '너도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든 버텨낼 거잖아. 기왕에 우리 같이 웃으면서 버텨보자.'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의 무게를 덜어주는 재치가 얼마나 고맙던지.


강인한 약자 델리아는 혁명가가 아니다. 델리아는 생존자다. 그녀는 살아남기로 했다. 모순을 깨는 것만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변혁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생존자의 항쟁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다. 뒤에 숨어 영화를 지탱하던 그것은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한다.

델리아는 굳게 다문 입술로 A bocca chiusa를 노래한다.


생존이 혁명이 되는 이 순간은 아주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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