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도로 혼자 하는 것,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혼자서 한다는 것'의 의미는 내 삶의 모든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내가 원하는 만큼만,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삶의 모든 것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하며 산다는 뜻이다. 이 경우 남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맞추는 과정이 없으니 당연히 내 시간을 최대 효율에 맞춰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무슨 일을 하든 나의 생각대로만 진행하면 되기 때문에 누구와 트러블이 날 일도 없어 정말 간편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고, 바뀌어야 하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런 나의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혹시라도 생길 것 같으면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며 그 자리를, 그 상황을 피해왔었다.
나는 내가 아닌 단 한 명이라도 타인과 무슨 일을 도모하게 된다면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할 사항들이 대량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건 한쪽이 본인의 의견을 굽히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는, 누군가와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로 해진다는 말이다. 나는 사실 그런 일들을 극도로 혐오해왔다.
내 생각에 효율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해나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왔다.
이런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나는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 여러 가지 능력들을 갖추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소모되는 에너지와 감정들을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에 그런 시간들은 계속해서 축적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나보다 나는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나는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진심으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는 없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 극도로 효율성을 따지다 보니, 관계를 맺고 이어나가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어려운 숙제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누군가와 만남을 가질 때면 그 사람을 만나는 시간에 비례하여 내가 혼자 있고 혼자서 내 할 일을 했을 때의 시간을 비교한다. 그리고 둘 중 더 얻을 게 많은 쪽을 택한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계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가족, 친구, 연인에게도 모두 이런 방식의 잣대를 두다 보니 나는 점점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애초에 나는 그런 깊은 관계가 되어 관계성에 의지해 더 큰 희생을 당연하게 강요하는 관계를 혐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하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요구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을 오랜 시간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에게 최근에 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 비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인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주는 가치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조금의 희생은 기꺼이 할 수 있을 만큼 관계를 맺음에서 오는 긍정적인 측면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한쪽만의 희생이 아닌 쌍방의 희생이 필요로 된다는 것, 상대방 또한 나와의 관계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희생을 쌓아나가며 나와 너는 점차 돈독한 인간관계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고, 그렇게 쌓아 올린 모든 시간들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아마도 나는 쉽게 내가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변화해 나간다는 것은 혼자서 꼿꼿하게 살아오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인생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