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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Feb 23. 2020

봄방학 중 어느 날

사립초 교사의 일상

신문 기사를 읽으며 '밀라논나'라는 유투버를 알게 되었어요. 밀라노 할머니의 줄임말이라고... 동네 할머니스러운 별명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 장명숙 씨.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를 한국에 들여오신 패션계의 거장이셨네요. 

마지막으로 밀라논나의 ‘다락방에서 시작하는 하루’ 편을 추천하고 싶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의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를 떠올리게 되는 그의 아침 루틴을 소개하는 영상이다. 고요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간단한 스트레칭에 이어 소박한 아침식사를 준비해 먹는 이 짧은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리듬대로 살아가는 아침’을 늙어감의 장점이라 이야기한다. 자신이 꾸린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에 따라 돌아가는 평화로운 작은 우주를 목도하는 것 같다. 

신문 기자님의 추천대로 이 영상을 열어봤답니다. "자신의 리듬대로 살아가는 것이 늙어감의 장점인 것 같아요."라는 밀라논나님의 자막을 보며, 아이 셋에 한창 현역인 저는 왜 지금도 저만의 리듬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건 다 엄마 덕분이 아닐까, 그리고 언제가 엄마에게 갚아야 할 빚이 아닐까 싶기도 했네요. (밀라논나님의 당당한 자태가 너무 멋있어 오늘 저도 오랜만에 홈트 했습니다. ㅋㅋ)


얼마 전 제가 첫 학교로 일했던 곳에서 퇴임하시는 선배 선생님께, 축하 인사를 드릴 겸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인생의 큰 고비 4가지를 이야기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친정어머니와의 이별이었습니다. 저처럼 선배님이 교사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선배님의 자녀를 도맡아 키워주시고 모든 살림을 맡아주신 친정어머니와의 추억, 친정어머니께서 요양병원에 계실 동안 내내 퇴근길에 요양 병원에 들른 이야기, 그 와중에 졸음운전, 또 돌아가신 후로도 힘들었던 이야기 등... 저라고 피해 갈 리 없는 이야기인 것만 같아, 제 얘기처럼 들으며 눈물 지었어요. 저희 엄마가 편찮으시면, 제가 제 리듬을 깨서 돌봐드려야 할 텐데... 저희 엄마처럼 제 딸의 아이를 돌봐주진 못하겠지만, 저희 엄마만큼은 잘 돌봐드리리라 브런치를 빌어 다짐해봅니다. 




봄 방학이 한창이자 주말인 이 시각, 저는 대학 도서관에 와 있습니다... 또르르...(분명 자발적으로 온 것인데...ㅎㅎ)

코로나로 교보문고도 나가기 힘든 상황인데 집 근처에 대학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고 (종로구 관내 모든 도서관은 휴관된 상태입니다. ㅠㅠ) 이 도서관의 출입이 자유로운 교직원이라는 것이 정말 큰 혜택으로 여겨집니다!! (저의 베프인 옆 반 선생님은 그 혜택을 사용하는 교직원이 도대체 몇 명이겠냐며 ㅎㅎ) 


저희 동네에도 확진자가 발생하여 아이들 어린이집도 휴원 하여 금요일부터 계속 함께 하였더니... 공부나 뭔가 생산적인 활동!? 그런 것이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였어요. 오늘은 교회도 못 가고 다 함께 영상으로 예배를 드렸으나 저는 결국 도서관으로 나왔답니다. 여기서 손 소독, 마스크 철저히 착용하고 조용히 새 학기를 위한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새로운 학년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불안감, 긴장감 등으로 주말도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일지 모르죠. 




'질문이 살아나는 학습 대화'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기본 편, 활용 편/전병규/교육과학사) 질문과 대화가 있는 학생 중심의 수업을 하도록 도와주는 책인데요, '질문과 대화가 있는 배움의 공동체'는 제 청소년기 주요한 배움의 방식이기도 했고, 지금도 가장 핵심적인 배움의 방식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에 해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주제인 것 같아요. 


책을 읽다가 가슴이 뛰는 부분이 있어 독서를 잠시 멈추고 브런치를 쓰게 되었어요. 

과연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정답이 아닌 생각을 나누도록 지도할 수 있을까요?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교수 기법이 아닌 선생님의 철학에 있습니다. 가장 먼저 선생님 스스로 정답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정답 주의 사고관을 버려야만 합니다. ... 선생님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선생님의 수업과 평가가 바뀌지 않습니다. 수업과 평가가 바뀌지 않으면 학생들의 생각도 바뀌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뼛속 깊이 들어와 버린 정답 주의적 사고관과 그에 따라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과 말을 폐기할 수 있을까요? 무의식을 버리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적인 질문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믿음으로 인해 프로그램화된 무의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문자답하여야 합니다.
 
"내가 수업을 이렇게 준비한 이유는 무엇이지?"
"내가 아이들에게 이것을 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내가 쪽지 시험을 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당장 선생님이 하고 계시는 교육 활동에 질문을 던지십시오. "나는 이것을 왜 하지?" 그리고 다시 질문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지?" 


저와 남편은 서로 시간 포인트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오늘 같은 주말은 친정어머니께서 안 계시는 날이기 때문에 한 명이 육아를 할 경우에 그 시간만큼 포인트를 얻게 되지요. 제가 오늘 도서관으로 출발하면서 (집중이 잘 된다면) 약 7~8시간은 공부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남편이 매우 반기며 "제발 집중이 잘 되길 바란다"라고 진심으로 응원해주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시간만큼, 남편에겐 나중에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요. 아이가 하나 둘 늘어나며 많은 협의 끝에 고안한, 저희 부부에게 최적화된 시간 활용 제도입니다. ㅎㅎ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주말에 하겠답시고 도서관에 오면서, 그것도 내 자유시간이라는 대가를 치르며 도서관에 오면서, 계속했던 질문입니다. 


어차피 교실엔 내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가치로운가?

 

2009년에 교사생활을 시작하여 2019년을 찍고, 이제 2020학년도를 앞두고 있습니다. 1학년을 여러 번 하다가 오랜만에 윗 학년으로 올라가게 되어, 예전 3학년 맡았던 시절 아이들이 남겨둔 공책을 다시 펼쳐 보았어요. 그런데 세상에, 알림장에 일기장 댓글 달듯 매일 댓글을 단 것도 부족해 학부모 편지를 매월도 아니고 매주 1편씩 써서 알림장에 붙여서 보냈지 뭐예요. 게다가 학부모 독후감 대회까지 열었더군요. ㅎㅎㅎ 지금도 열정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싶은데 과거의 나 자신의 열정에 조금 놀랐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힘든 아이들은 있었고, 제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그저 수용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들, 어려운 마음으로 출근하며 과연 이 일이 내가 원했던 일이던가 반문하던 여러 나날들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삶이라는 것이 정말 열정이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도서관으로 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아이나 학부모님이 있을 수 있고, 내 능력 한참 밖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고. 또 나의 잘못이 아닌 일로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고. 하지만 저에게는 여전히 저를 믿고 의지하는 80~90%의 아이들이 있고, 감당해야 하는 삶이 있고, 누려도 되는 시간들도 있다고. 이것도 저것도 다 삶의 한 부분이라고. 80~90%의 아이들을 위해, 또 인생의 대부분을 교실에서 보내는 나를 위해서라도, 좀 더 나은 수업과 배움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보자고. 


남은 시간도 열심히 공부하고, 또 집에 가서는 세 아이들과 복닥복닥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하도록 할게요.  

공부하다가 머리 식힐 겸 브런치 하는 건데, 엄청 시간 많이 썼네요. 공부는 역시 딴 길로 새는 것이 제 맛! ㅎㅎ



추신: 이 브런치를 어찌할까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학부모님들을 분명한 독자로 두고 시작한 것은 맞는데, 때론 독자가 너무 분명하여 글을 쓰는데 제약이 있고 민망하기도 하고요! ㅎㅎㅎ 그런데 이제 학부모님이 아닌 다른 독자분들도 계셔서 마음대로 그만두기도 죄송하고... 새로운 학년에서는 학부모님들께 브런치를 오픈하지 않고, 지금보다는 좀 사적으로 브런치에 글을 써 볼까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제 브런치가 비밀은 아니지만 ㅋㅋ 애매하게 되었네요. ^_^ 2019학년도 학부모님들께서는 저희 학교의 방향보다는 제 개인의 글을 쓰는 공간임을 염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밀라논나님에 대한 신문 기사 원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2211614005&code=940100#csidxb175d524d445a78b5baa282aded76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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