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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Aug 13. 2020

내게 참 소중했던 비닐봉지

여행 이야기-쿠바

흔하디 흔한 비닐봉지를 버리지 못하고 집안 구석구석 감춰 두시는 시어머님 때문에 시댁에 내려가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 구석구석 숨어 있는 비닐봉지를 찾아내 버리는 일이었다.
비닐봉지는 냉동실 바닥, 냉장실 안쪽, 싱크대 구석, 서랍장이나 책 사이, 책상 위, 옷장 안, 심지어 옷 주머니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비닐 봉지를 발견할 때마다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도대체 이 비닐봉지가 뭐라고.

비닐봉지뿐만 아니다.

두부를 담았던 플라스틱 통 같은 것들도 모두 찾아내서 미련 없이 재활용 통에 넣는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시동생은 나중에 필요해질 것까지 버릴까 봐 본인이 필요한 것은 아예 방에  따로 모아 둘 정도다.
내 집엔 겨우 서너 장의 비닐봉지만 여분으로 둘 뿐이다. 그렇게 해도 장 한 번 보고 나면 금방 쌓이는 게 온갖 종류의 비닐봉지다.
 
쿠바 여행을 할 때 같은 방을 썼던 일행분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쓰고 남은 밀폐용 비닐봉지 몇 장을 주고 가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 비닐봉지를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몇 번이고 재활용하며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쿠바에서 비닐봉지는 구하기 힘들 정도로 드물고 귀한 것에 속했다.
큰 가게나 제법 비싼 물품을 취급하는 곳은 물건을 비닐봉지에 담아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는 그야말로 물건만 주었다.
바나나 한 송이를 사면 바나나만, 빵을 사면 빵만 , 달걀을 사면 달걀만 주는 식이다.

담아주는 게 아니라 그냥 준다.

그렇다면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면 어떨까? 물론 고기만 달랑 들고 와야 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많은 쿠바인들이 집 근처 작은 가게에서 물건을 사서 바로 집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내게 비닐봉지를 주고 간 분들은 삶아 먹을 달걀을 샀더니 두 손에 올려 주어서 쓰고 간 모자에 담아 왔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아침은 주로 숙소에서 먹었는데 음식이 남는 경우 점심이나 간식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어 다녔는데 이것도 얻어 놓은 비닐봉지가 있어서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그 비닐이 더러워지고 낡아 하나씩 버릴 때마다 얼마나 초조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쿠바 여행을 하면서 까사 부엌에 걸려 있는 비닐봉지를 발견할 때라든가 빨랫줄에 매달려 있는 비닐봉지를 보았을 때라든가 비닐봉지를 가지고 물건을 사러 온 쿠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시어머님 생각이 났다.
쿠바에서 시어머님 생각을 그렇게 자주 하게 될 줄은 또 몰랐다.
현재의 기억보다 과거의 기억이 더 선명한 시어머님은 비닐 한 장이 절실했던 시간을 다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급할 때 비닐봉지 하나가 없어 난감했던 기억이 가방이나 호주머니 속에 자꾸 비닐봉지를 넣게 만들고 필요할 때 찾기 쉬워야 하니 여기저기 보이는 곳마다 넣어 두어야 했을 것이다.

그 시절 어머님은 그렇게 사셨을 터다.
시댁에 가서 비닐봉지를 치우면서도 시어머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본질적인 심리를 이해한 것은 쿠바 여행을 하면서이다.
그 비닐봉지 하나가 내게도 귀했으므로.
 
​넘치게 많아서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과 너무 없어서 그 가치가 새로워지는 것 사이에서 내 쿠바 여행은 종종 휘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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