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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Dec 08. 2020

내 이름은 소녀

사노라면



눈 오기 전에 시골에 한 번 다녀오자고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은 둘째 시동생이었다.
그렇잖아도 내려갈 날을 남편과 조율 중이었다.
둘째 시동생 네가 내려오면 나나 시동생 입장에서는 먹여야 하는 객이 4명 더 늘어나는 셈이라 준비할 게 훨씬 많아진다.
늘 기꺼이 내려와 주는 동서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항상 궁금하다.
언제쯤 되면 한두 가지 반찬이라도 준비해 내려올 생각이 들까?
형님 이번에는 제가 이런저런 것을 준비해 갈게요, 라는 말을 듣게 될까?
내려가면 온 집안의 그릇을 꺼내서 설거지부터 하는 옆에서 그럼 저는 뭐를 할까요? 묻는 동서를 볼 수 있을까?
동서를 미워하는 마음이 참깨 한 알만큼도 없지만 가끔 진심으로 궁금하다.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이 내 부하거나 동료라면 어떨까?
이제 동서는 밥 먹은 후 설거지만큼은 자기 일로 알고 제법 야무지게 잘한다.
말하지 않아도 큰 냄비나 솥까지 찾아서 깨끗하게 설거지를 해 놓는다.
전에는 동서가 설거지를 하고 나오면 다음에 내가 뒤처리를 더 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일을 던 게 어디냐며 동서가 기특하기까지 하다.

전에 내 이웃 블로거 한 분이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라고 했다.
손이 빠르고 척척 일을 알아서 하는 형님 옆에서 동서의 마음도 편치 않을 거라고 했다.
일을 나눠 주는 것도 내 몫이요 시키는 것도 내 일이라 했다.
못해도 자꾸 시켜야 하고 느려도 같이 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동서가 부엌일에 약하고 일머리가 느린 편이지만 시키는 것은 잘한다.
그 시키는 것을 내가 참 못한다.
시켜서 할 바에야 내가 하고 만다.
시댁에 내려가서 동서까지 챙길 여력이 내게 없기도 한 이유도 있다.
시켜가며 일을 하기에 할 일은 쌓여 있고 신경 써야 일들이 너무 많다.
시댁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전투 모드로 들어선다.
시아버님이 대충 닦아 놓은 그릇들을 죄다 꺼내 설거지를 다시 하는 동안 눈으로 빠르게 주변을 스캔한다.
점심을 준비하기 전에 먼저 끝내 놓을 일의 순서를 정하기 위해서다.
늘 설거지가 우선인데 제대로 설거지가 안 되어 있는 그릇과 수저를 먼저 닦아 놓은 후 물로 대충 씻어 놓은 큰 냄비들을 싱크대 안에서 꺼내 씻어 밖에 내다 널 때쯤이면 밥을 안쳐야 할 시간이 된다.
그 사이 남편과 시동생이 거실 바닥과 방을 쓸고 닦는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쯤 둘째네가 도착하는데 그보다 일찍 도착하면 거실과 방 청소를 돕는다.
그리고 내가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상을 차리는 동안 막내 시동생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모두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한 것이다.  
막내 시동생은 내 부엌일을 돕는다.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은 아는 사람은 내 입장에서는  막내 시동생밖에 없다.
같이 살면서 생긴 동료의식이랄까?  부엌일을 나눠하면서 생긴 이심전심이랄까? 이런 것이 막내 시동생과 나 사이에 있어 우리는 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안다.

점심을 먹을 때 시어머님 옆은 항상 내 자리다.
이제 온 가족이 모일 때 시어머님을 돌보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그저 그 일을 내가 가장 잘하고 기꺼이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도 싫지 않기 때문이기도 해서이다.
시댁에 가면 어머님을 욕실로 모시고 가 씻기고 새 기저귀를 갈아 드려야 일단 마음이 편하다.
어머님 표정이나 걸음걸이만 봐도 기저귀 상태를 알겠기에 나는 이제야 애를 키우는 엄마들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시어머님은 내가 반찬을 놓아주지 않으면 앞에 보이는 것만 드신다. 수저를 들고 있으면 수저로만 먹고 젓가락을 들고 있으면 젓가락으로만 밥을 드신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배가 부르면 더 드시지 않는다.  

다른 가족들은 내 뒤에서 필터를 통해 바라보듯 시어머님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아내, 형수, 형님, 큰며느리라는 필터.
그래서 나는 또 궁금하다.
나라는 필터가 사라지면 다들 어떻게 할까?
둘째 네만 따로 시댁에 간 적이 없는데 앞으로도 그럴까?
내가 없을 때 남편과 막내 시동생만 시댁에 가면 누가 어머님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길까?
아마 조금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또 어찌어찌 굴러갈 것이다.
어쩌면 각자 자기의 몫을 더 잘 찾아 해낼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고 동서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부엌 바닥을 닦고 폭격을 맞은 전자레인지 내부를 청소하고 가스레인지 주변 벽을 닦아내고 날아다니는 나방의 출처를 찾아 곰팡이 핀 각종 가루들을 버리거나 밀봉해서 냉동실에 넣고 김치냉장고와 냉장고 내부를 살피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밖으로 가서 버려야 할 것과 재활용해야 할 것을 정리하고 다시 들어와 시아버님 안 계시는 동안 안방을 청소하고 여름 옷가지를 정리하고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쌓였지만 잠깐 자고 일어나 저녁을 준비했다.
막내 시동생이 밖에서 고기를 구워 온 걸로 저녁을 먹고 동서가 저녁 설거지를 하는 동안 어머님 기저귀를 한 번 더 갈아 드리고 아버님이 가져가라는 것들을 챙겨 일어났다.
끝내지 못한 일들이 눈에 밟히지만 어차피 끝이 없는 일들이다.

차에 타기 전에 어머님에게 물었다.

“어머님 제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네 이름? 네 이름은 소녀.”

어머님이 소녀처럼 까르륵 웃었다.
어머님 마음이 그 새 소녀가 되었나 보다.
내 이름은 이제 소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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