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 평등의 감각(마지막 회)

-일상 속 언어에 스며든 성인지감수성-

by 전온유

말을 통해 그 사람의 평소 생각과 신념을 알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마음에 없는 말로 포장할 수는 있지만, 결국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폭력예방 강사로서 사람들을 만날 때, 오히려 조마조마한 것은 제 자신이라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관계라면 괜찮지만,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직책이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

혹은 평등과 인권, 폭력예방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과 대화를 나눌 때 불현듯 튀어나오는 몇 마디 말에 저는 긴장합니다.


불평등과 차별을 무심히 드러내거나, 가해자의 입장을 두둔하는 말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제 마음은 철렁 내려앉습니다.

‘아, 저분이 저런 말을 이런 자리에서 하시면 안 되는데.....’




몇 해 전, 어느 단체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식순에 따라 지역의 유명인사가 축사를 하셨는데, 처음엔 행사의 취지에 맞는 말씀을 하다가 마무리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남자들이 살기 참 힘듭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잘해줘야 합니다. 집에서 좀 잘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자리는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은 저만의 몫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분은 본인이 어떤 행사에 축사를 하는지조차 잘 모르셨을 겁니다.

하지만 설령 몰랐다 해도, 그 말의 맥락은 분명 평등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저는 이제 일종의 ‘직업적 불안’을 느낍니다.

혹시 이번에도 그런 말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마음속에 작은 경계심이 피어오릅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직업병이라 해야 할까요?


동시에 문득 생각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내가 하는 말이 그런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을 줄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더 조심하게 됩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성인지감수성에 관한 브런치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도 조심스러움이 컸습니다.

주제가 민감하고 특정적이기에, 자칫 제 미숙함으로 잘못 전달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과 사명감이 순간의 열처럼 저를 밀어 올렸고,

결국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강의 현장에서 만나는 시민분들은 대체로 성인지감수성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정을 다해 이야기해도, 그건 강사의 열정일 뿐

‘의무적으로 듣는 교육’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인지감수성이 결코 먼 개념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 언어, 태도, 존중과 배려, 그리고 공감과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인지감수성이란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일입니다.

일상 속 익숙한 말과 행동에 숨어 있는 불평등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감각. 그것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곧 우리가 품고 있는 세계관의 반영이며,

그 말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문화를 만들어갑니다.


“여자가 조신해야지”, “남자가 그것도 못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이런 말들은 단지 관용적 표현이 아닙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누군가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하며,

불평등한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오늘 하루, 무심코 내뱉으려던 말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잠시 멈춰 생각하는 것.

익숙한 표현 속에 숨어 있는 차별을 발견하고, 다른 말을 찾아보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더 평등하고 존중받는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인지감수성은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저 역시 여전히 배우고 있고, 실수하고 있으며, 성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겠지요.


이 연재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부디 이 글들이 여러분의 일상에 작은 울림이 되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로를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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