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질문으로 관계를 다시 세우는 성인지감수성
폭력의 가해자들은 자신이 한 행동을 돌이켜볼 때,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 사람도 잘못했잖아요.”
한 번은 제가 폭력행위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과정에서 뉴스에 보도된 폭력 사건 영상을 보여주고,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조별로 토론을 시켰습니다.
영상 속 사건은 이랬습니다.
영업 마감 직전, 손님 세 명이 카페를 찾아왔습니다.
직원은 “지금은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고 안내했고,
손님은 동의하며 음료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가게 안에서 마시겠다”며 태도를 바꾸었고
언쟁이 오가던 중, 세 사람은 결국 카페 주인을 집단 폭행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명백히 폭력을 행사한 손님들이 잘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폭력적인 성향이 있던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카페 주인이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팔았어요? 그럼 이런 일 안 생겼죠.”
“분명히 카페 주인이 먼저 욕했을 거예요.”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이야기를 덧붙이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 장면에서 드러난 건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내면의 합리화 였습니다.
“맞을 짓을 했다.”
“오죽하면 내가 이러겠냐.”
“이건 다 너를 위해서야.”
그 말 속에는 책임 회피와 통제의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한때 우리는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을 얻는다.”
“진심은 통한다.”
성실과 인내의 맥락이라면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열 번 찍는다’는 말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상대의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들이대는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 속엔
여성을 ‘얻는 성적 대상’으로, 남성을 ‘소유하는 주체’로
규정하는 불평등이 숨어 있습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의사를 묻지 않은 일방적인 진심은
때로 폭력이 됩니다.
진심은 통할 수도 있지만,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지요.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거절 없는 대화’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챗봇은 늘 긍정하고, 위로하고, 칭찬의 언어만을 아낌없이 줍니다.
언제나 나의 말을 받아주는 존재.
그러나 실제 사람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거절하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내 말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이때, ‘거절’을 내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면
감정은 왜곡되고 드러나는 말과 행동은 폭력적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날 싫어하니까 날 밀어내는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몰라줘?”
이런 생각은 사랑의 언어로 포장된
또 다른 통제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성인지감수성은
‘힘의 불균형’을 감지하는 감각입니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힘, 지위, 나이, 경험의 차이로 인해
누군가가 통제받거나 억압당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그래서 성인지감수성은 늘 질문합니다.
나는 지금 평등한 자리에 서 있는가?
내 말과 행동 속에 차별이나 강압은 없는가?
나의 위치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면서 말하고 있는가?
이런 다정한 질문으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성인지감수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