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고 내뱉은 말

여전히, 술은 여자가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by 전온유

성인지감수성은 단지 성별 이슈에 국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입니다.

성별을 떠나 타인의 존재를 배려하고, 공감하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이해를

실천으로 드러내는 감수성이 바로 성인지감수성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말은 공기와 같습니다.

그 안에 따뜻함을 담으면 위로가 되고, 차가움을 담으면 상처가 됩니다.

"호~" 하고 불 때의 온기와 "후~" 하고 불 때의 냉기처럼요.

이렇게 말 한마디에도 온도가 있습니다.


문제는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던 말, 친근함을 표현하려던 말이

상대방에게는 불쾌한 말, 공격적인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지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자기 말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thinking about talking)


내가 지금 어떤 말을, 어떤 어조로, 어떤 의도를 담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대화.

즉, 메타 커뮤니케이션이죠.

이런 자기 인식이 곧 비폭력 대화의 출발점이 됩니다.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언어폭력이나 성희롱 사건을 보면,

행위자는 자신이 한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를 거의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죠.

하지만 '의도'가 아니라 '영향'이 문제입니다.

상대가 상처받았다면, 그 말은 이미 흉기가 된 것입니다.


특히 술자리에서 이런 말은 자주 등장합니다.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맛이지."

이 말은 여전히 어떤 자리에서는 농담처럼, 어떤 자리에서는 관습처럼 통용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성인지감수성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첫째, 말의 권력 구조를 살펴보면,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상급자일 경우, 듣는 사람은 그 말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그 한마디 안에는 지위와 힘의 불균형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억지로 술을 따르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동의'나 '예의'가 아니라

'억압적인 순응'이 됩니다.


둘째, 문화적 배경을 보면,

술은 왜 여자가 따라야 할까요?

우리 사회에 오랜 시간 누적되어 온 접대문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접대문화는 특정 성별에게 서비스와 친절을 기대하는 불균형한 관계를 만들어왔습니다.

이 말 안에서의 여성은 동료로서 평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표현은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성적대상의 역할에 가두는 언어입니다.


셋째, "제맛"이라는 표현은,

이 행위가 가장 자연스럽고 즐겁다는 뉘앙스를 담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제맛일까요?

힘을 가진 쪽에게만 유쾌한 제맛이라면, 그건 이미 누군가의 불편 위에 세워진 즐거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말이 빙산의 꼭대기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입 밖으로 내는 한 문장은, 눈에 보이는 작은 조각일 뿐

그 아래에는 오랜 시간 쌓인 생각과 가치관, 성역할에 대한 통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듣고 익혀온 언어 습관, 사회가 만들어온 성별 고정관념이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얼음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죠.

그 층이 바뀌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말의 형태도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술기운 때문"이라는 변명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술이 본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춰왔던 생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술은 진심을 빙산 위로 떠오르게 하는 기폭제일 뿐입니다.


예전엔 농담으로 넘겼던 말이

현재 사회에서 문제로 지적되는 이유는 시대가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불편함이 아니라 성장의 증거입니다.


우리 사회와 문화는 달라져가고 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고, 권력이 있으며,

내가 사용하는 그 힘을 인식하는 것이 곧 존중의 출발이라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성인지감수성은 결국,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닿을까?"를

끊임없이 묻는 태도입니다.

그 질문 하나가 말의 온도를 바꾸고,

그 온도가 인간관계의 품격을 바꿉니다.

이전 07화'그래'라는 말이 동의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