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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Jan 27. 2019

새해 아침 첫 책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새해 아침에 집어든 첫 책. 책의 제목이자 목차의 첫 글의 제목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였고, 두번째 글은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였다. 새해가 밝은 아침에 심기일전해도 모자를 판에 왠지 찬물을 짝 끼얹는 듯한 책. 저자는 지난 추석에 히트쳤던 <추석이란 무엇인가> 란 칼럼을 쓴 김영민 교수다. 추석에 덕담이랍시고 작은 잔소리 한 친척에게 그야말로 팩트폭격을 하는 칼럼을 보며 깔깔거렸던 기억이 나서, 아마도 그 사람이 새해 아침에 끼얹는 찬물이라면 뭔가가 있어도 있겠지 싶어서 골랐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칼럼을 모은 모음집이었다. 저자가 연재하고 있는 칼럼의 신문을 구독하는데도 요즘 신문을 악세사리 삼아 들고다니는지라, 그나마 거의 다 처음 읽어보는 글이라 다행이면 다행이었다. 책은 크게 일상 / 학교 /사회 세 파트로 나누어 칼럼을 분류해놓았고, 알고보니 영화 평론가를 꿈꿨던 그의 영화 비평문과 인터뷰까지 총 다섯 파트로 구성돼있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고 한다. 어느 관점에서 지금의 삶을 보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도, 나아가야 할 방향도 달라진다. 계속 시험에 떨어지던 취준생 시절, 처음으로 내가 한 노력만큼 보상받지 못하고 포기해야했던 꿈, 그 때는 캄캄했지만 아마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얼마나 자만했을지 모른다.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부었음에도 개선되지 않았던 관계도 있었고, 노력을 할 기회조차 없이 끝이 나버렸던 관계도 있었다.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쌓아가는 것만큼 어렵고 소중한 것이 없다는 걸 몰랐을 거다. 지나고나면 다 괜찮아진단 섣부른 위로가 아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또 다시 비슷한 순간이 왔을 때는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단 거다. 그렇게 시야가 넓어지면, 어떤 가치 판단을 할 때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내년 이 시간에 죽는다면, 한달 후에 죽는다면, 내일 죽는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란 질문을 해봤다. 책의 말대로 삶이 진행되는 이 하나하나의 순간에는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없으니 죽음이라는 끝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어떤 가치가 나에게 우선될까. 죽음의 시기에 따라 그 대답은 달랐다. 내일이라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고, 한달 후라면 좀 더 자유롭게 살 것이고, 내년이라면 하고싶었던 일을 해보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짧음과 나의 소중한 것이 저렇게 비례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해서 당장 저걸 행동으로 옮겨서 사는 것이 답이 될 순 없다. 당장 매일매일 가족과 붙어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회사를 때려 치거나,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늘을 자유롭게 사는건 책임감이 없는 거다. 다만 인생이 무한하지 않고 죽음이라는 끝이 있다는 것만 알고 산다고 해도,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정념으로부터 다소나마 풀려날 것이다. 평생 원했으나 가질 수 없었던 명예에 대한 아쉬움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영원히 살 것처럼 굴기를 멈출 것이다. 소소한 근심에 인생을 소진하는 것은, 행성이 충돌하는데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좀 더 다르게 살게 되겠지. 그래, 근심을 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되돌아봤다. 죽어가는 존재라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좀 더 잘 죽는 것일까. 아마 대다수가 행복을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행복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 행복할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푹 자는 것도 행복하다. 일을 하면서 무언가 성취해내는 기쁨이 있고, 책을 읽다가 시야가 넓어지는 기쁨도 있다. 달리기를 하면서 아무 생각이 안나는 것도 좋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있는 것도 좋다. 출근 길 아침에 따뜻한 라떼를 마시는 것도 좋고, 퇴근 후에 편한 사람과 술을 한잔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도 좋다. 이렇게 적고보니 내 인생은 지금 꽤나 행복한 것이다. 만약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면, 여전히 취준생이었다면 지금 나에게 중요한 행복은 눈앞에 닥친 바로 그 근심거리의 해결이었을 것이다.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나역시 저자처럼, 올 한해가 다만 불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진짜 좋았던 것은 저자의 글쓰기(혹은 사고) 방식이었다. 모든 것에서 그는 '재정의'와 '반문'을 한다. 추석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뜯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의 의미를 파고들고, 다시 묻고, 새롭게 정의하다보면 무언가 그 안에 진짜 중요한 것이 남게된다. 아마 죽음으로 삶을 정의한 것도, 불행으로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새긴 것도 그런 태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보통 뭔가를 치열하게 생각하다가도 막히거나 답이 안나오면 아 모르겠다 하고 덮어버리기 일쑤다. 하루는 그렇게 또 지나가고, 내일은 밝아서 또 내일의 일을 하기에 바쁘니까 말이다. 늘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한채 그 순간의 감정이나 욕구에 휘둘려 결정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중요한 순간을 지나쳐버리고나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없이 살게된다. 이미 지나간 걸 어떡하냐면서. 그럴 때 중요한 것이 바로 '다시 묻기'와 '재정의' 일 것이다. '대선후보와 토론하는 법'이란 칼럼처럼 말이다.


소화하지 못한 멋진 말들을 외워 나열하는 후보가 그 말들을 제대로 실천에 옮길 리 없다. 예컨대 후보가 인권을 보장해야한다고 역설할 때, 토론자는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만약 그들의 권리에 대해 유보적으로 나온다면, 토론자는 물어야 한다.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막연히 성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할 경우에는, 동성결혼 법제화에 대한 견해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연속질의를 통해서 후보가 해당 사안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위해서는, 장밋빛 공약을 제시할 때마다 “그와 같은 정책을 실현시킬 재원은 어디서 오나요?”라고 물어야 한다. 그 재원이 곧 증세를 의미한다면, 국민들에게 늘어난 세 부담을 어떻게 나누고 설득시킬지 물어야 한다. 구체적인 공약들은 모여서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구성해야 한다. 올바른 방향감각 없이는 개별 공약들이 제대로 된 비전을 이룰 수 없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결혼, 교육, 사회에 대해 말한다. 특히 마음이 새기고 싶었던 것들이 몇가지 있었다. 나에게도 화두인 것들이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에게 서로를 '연민하라'고 한 것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살다 보면 둘 중 한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잘못을 하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나머지 한 사람은 잘못을 한 상대보다 우위에 서게 되고,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게 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제발 정도 이상으로 잔인해지지 말기 바랍니다. 요컨대, 상대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일상적인 습관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 애정이 따뜻함의 습관을 만들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거꾸로 일상적으로 따뜻함을 살천하는 습관이 길게 보아 두 사람 간의 애정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에게 캠퍼스에서만큼은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하라고 한 것

우리가 고급 양식만 먹으며 일생을 살 수는 없는 것처럼, 정신을 환하게 하는 사치스러운 지식만을 추구하며 평생을 소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활인으로 살기 위하여 입시, 취직, 고시 공부를 해야만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시험공부를 해서 기왕에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한다. 자루에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러한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 그리고 입시를 위해 보내야 했던 그 지루했던 시간에 대한 진정한 보상을 그 환한 앎에서 얻어야 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     


졸업생들에게는 '정치적 덕성'을 쌓아야한다고 한 것,

학교 졸업 후 얼마나 높은 연봉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현실 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즉 정치적 덕성을 얼마나 습득했느냐는 것, 즉 얼마나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졸업생들이 염두에 둘 만한 평가 기준이다.


사회에 대해서는 '쉬운 선(善)이 되길 거부하라'고 한 것

<오멜라스 이야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복지국가라는 풍요를 누리되, 한명의 아이만은 지하실에서 박약한 상태로 가두어져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 아이의 처지를 개선해준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누리는 그 행복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 떠나는 사람들은 그런 쉬운 선이 되길 거부하고 스스로를 유형에 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진부함으로부터 우리가 구제받는 것은 이러한 비타협적인 사람들을 통해서다. 대학이야말로, 오멜라스에서 사라진 이 비타협적인 이들을 기억하는 곳이기를 나는 바란다.


모든 것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진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에 대해선 생각하다 쉽게 지쳐버리고, 그냥 넘어가도 될 소소한 근심을 붙잡고 늘어지는 나에게 말이다. 그래도 죽음을 염두에 두었을 때, 하루하루 죽어갈수록 조금이나마 나은 사람이 되어갔으면 좋겠다. 나은 사람이 된다는 건 성장한다는 거다. 나에게 있어서 성장은, 위에 있는 말들과 가깝다. 누군가가 그래도 내 옆에 머물 때, 따뜻함이나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잘 모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 둘러대지 않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탐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개인적인 성장도 좋지만, 타인과 부대끼며 같이 성장했으면 좋겠다. 불편해질 것이 두려워 세상의 부조리함에 입을 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올 한해는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도 행복을 바라지는 않겠다. 삶의 방향에 대해서는 고민하지만, 지금 당장 행복해지겠다며 스스로를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게 하진 않겠다. 되려나? 진짜 새해는 구정부터니까..설날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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