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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Oct 09. 2023

제가 도와줄게요 그냥 걱정말고 해봐요

삼성동에서 사골스지오뎅나베

- Simon님 혹시 퇴근하셨습니까

- 아뇨 아직 사무실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 Hoxy... 가볍게 한잔 하시겠습니까? ㅋㅋㅋ

- 아? 좋죠 ㅎㅎ


얼마 전 어떤 저녁 자리에 합석하면서 알게 된 옆 팀 정재님의 메신저 채팅에 불현듯 얼마 전 내가 요청했던 업무가 떠오르며 혹시 놓친 것이 있던가 싶었는데, 의외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때마침 저녁 일정이 없기도 해서 채비를 해서 곧 로비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난데없는 저녁 제안에 그 역시도 겸연쩍었는지 처음 그와 인사했던 저녁 자리에 같이 있었던 몇몇들도 같이 올 수 있는지를 물어봐달라 하여 곧바로 그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돌렸으나, 아쉽게도 모두 다른 일정이 있었다.


- 뭐 이왕 시간 잡은 거 둘이 가서 간단하게 마시죠.




무슨 할 이야기가 있었나 싶었는데,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술이 한 잔 하고 싶었다고 했다. 뭐, 술 한 잔 할 수 있는 상대가 하나 더 생기면 좋지. 근래들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업무들이 많아졌기에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요즘 일 어때요?

- 아직은 낯설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적응하고 있어요.

- 상무님이 말씀 많이 하던데요? 싸이먼 술 잘 마신다고.

- 아...? 저 술은 잘 못 마시고 술자리는 좋아합니다.

- 술 잘 못 마신다고요? 그래도 두 병은 할 것 같은데?

- 하하, 뭐 그 정도...일 거에요.

- 잘 드시네요 뭐. 그럼 제가 종종 가는 데로 갈래요?

- 좋죠. 저 뭐 가리는 거 없어서 따라갈게요.


크게 한 블럭을 가득 메운 코엑스와, 그 건너편으로 불빛 가득한 속세를 저 높이서 내려다보고 있는 봉은사의 미륵대불과, 크나큰 대지를 둘러싼 채 한창 공사중인 옛 한전부지를 제외하면 술 한 잔을 기울일 마땅할 장소가 여의치 않는 삼성동에서 퇴근 후 가끔 동료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이면 다섯 곳도 안 되는 선택지 중에서 고르기 마련이었는데, 오랜만에 새로운 곳을 가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연초를 다 태운 그가 앞장서서 향한 곳은 회사 근처 먹자골목 내에 차분한 분위기의 이자카야였다.




다소 중후한 분위기의 그 이자카야에서 그는 따끈한 사골스지오뎅나베에 소주와 맥주 한 병씩을 주문했다. 추측컨데 그는 맥주를 주문할 생각은 별로 없었으나 빳빳한 직장 동료 간에 처음 갖는 술자리인만큼 체면을 차리고자 스스로에게 미리 제동을 걸기 위함이었을지 모르겠다. 다만 글라스에 조심조심 소주 반 잔을 따르고 맥주를 채워넣었던 첫 잔이 건배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자, 알량한 가식 따위는 이제 다 버리라는 듯 – 남은 맥주를 게 눈 감추듯 마시고 빈 소주잔을 테이블 위에 깔았다.


- 이자카야 좋아해요?

- 그럼요. 술 마실 때 뭐 많이 먹는 거 안 좋아해서, 이렇게 이자카야에서 음식 하나 시켜놓고 마시는 게 나아요.

- 오 저도 그런데, 그럼 여기 잘 왔네. 맛 괜찮아요?

- 네, 국물이 엄청 진해서 좋네요.


그 날은 때마침 초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어두운 퇴근길을 드리웠기에 주문한 사골스지오뎅나베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오뎅, 스지, 채소만 넣고 끓여내도 충분할텐데 거기에 푹 고아낸 사골국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걸쭉한 사골국물과 오뎅 몇 점을 접시에 덜어내 서로 건네며 이제 각자의 배를 좀 채우는 듯 했으나, 좀처럼 오뎅과 스지가 줄지 않고 사골국만 서서히 줄어들었던 것은 아마도 각자 날 것의 모습을 보이긴 여전히 조심스러웠던 까닭이었겠다.




그러나 그 소심한 대치 상태는 결국 수시로 비워지던 소주에 의해 금새 사그러들었고, 상대에게 하나둘 물음을 던지고 그에 맞춰 제 소개를 꺼내보였다. 입사시기, 팀 분위기, 상사와의 관계, 요즘의 업무 이슈, 대학 시절 전공, 이전의 직장들과 커리어 등. 일종의 면접을 보는 기분이었으나, 대화의 물꼬가 터지니 그제서야 시장했는지 접시에 덜어냈던 오뎅과 스지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마음 속 어딘가에 자리하던 작은 고민들도 그 때 슬그머니 수면 위로 올라오던 와중이었다.


- 지금껏 해오던 것하고는 너무 다른 일이라서...

- 뭐... 잘 하면 되죠.

- 처음엔 조금 뚝딱거릴 것 같은데, 곧 적응하겠죠 뭐.


정재님을 거울삼아 그저 나 혼자 스스로에게 사기진작을 하던 와중에 그가 나지막히 한 마디를 건넸다.


- 제가 도와줄게요 그냥 걱정말고 해봐요.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건가- 잠시 멍해지다가 조금 지나 그 문장의 기운이 서서히 마음 속의 안개를 걷혀내던 느낌은 시간차를 두고 찾아오는 사골국물의 진득함과도 같았다. 나는 다른 누군가의 목표를 나의 능력과 에너지로 밀어주겠다 자신해본 적이 있던가.




예상치 못했던 지원 계획에 피어오르던 감사함은 하필 술기운과 맞물려 열기로 승화되다보니 이마에 조금씩 땀이 맺혔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꿋꿋이 불을 피우던 버너를 잠재우고, 담배를 피우러 잠시 나가는 정재님의 제안을 따라 찬바람에 땀을 식혔다.

- 싸이먼님도 저처럼 땀이 많네요. ㅋㅋ

- 네, 그래서 여름엔 진짜 힘들어요 .

- 뭐, 2차 간단히 하고 가실래요? 괜찮아요?

- 아, 그럴까요?


간단히 마시자던 처음의 제안과는 달리 생각보다 길어진 자리에 뭐 진작에 이렇게 될 거였네- 싶었다. 가방을 챙겨 술집을 나와 시간을 보니 밤 8시. 삼성동 먹자골목의 모든 술집에 그 날의 어떤 하루를 마친 직장인들로 가득한 시간. 한 병씩만 딱 반주로 먹고 가자던 팀 후배도, 우연히 같은 곳에서 만난 옛 대학원 동기도, 승진 축하를 위해 한데 모인 팀 회식도, 해외에서 출장 온 손님들을 접대하는 자리도, 500m 남짓되는 그 골목의 작은 술집들에서 한데 건배와 웃음으로 가득 채우고 있을 시각. 그 날 예기치 않게 찾아온 새로운 상대와의 술자리 역시 그 반복된 일상으로 가득한 직장인의 하루의 마지막에 재미진 요소였다.


- 2차는 정재님이 안 가보셨을 곳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후 계속)




이 이야기의 전문을 신간 <병헤는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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