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상하이를 지배한 세 남자
두월생,황금영,장소림

하나의 도시, 세 개의 운명

by 허유영

청얼의 영화 《로맨틱상실사》는 1930년대 상하이라는 파란 많은 도시를 배경으로, 지금은 사라진 세계의 중심에 실재했던 세 남자의 이야기를 소환하고 있다. 영화 속 루 선생(갈우(葛优) 분)과 그가 모시는 왕 사장(니다훙(倪大紅) 분), 둘째 형님 장 선생(마샤오웨이(馬曉偉) 분)은 1920~30년대 상하이를 주무르던 청방의 세 두목인 두월생, 황금영, 장소림을 실제 원형으로 하고 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의 절반을 놓치는 셈이다. 영화 속 배신과 암살, 망명은 실제 역사에서 그대로 일어났고, 어떤 면에서는 영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했다.

각각 밑바닥에서 상하이의 정점으로 올라간 세 남자, 권력과 피로 맺은 계약, 같은 조직 안에서 쌓인 균열과 은원, 일본이라는 외력 앞에서 갈라진 세 갈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만들어낸 세 개의 다른 결말까지. 이들 세 남자는 상하이의 격동기를 화려하게 불태우고 스러진, 근대 상하이가 낳고 또 삼켜버린 시대의 초상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이미 수차례 영화로 각색된 것만 보아도 그들의 삶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상해 포스터_2.JPG
대상해 주윤발_2.JPG
대상해_4.JPG
대상해 홍금보.JPG
세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왕정(王晶) 감독의 2012년 영화 <대상해>. 주윤발과 홍금보가 각각 두월생과 황금영 역을 맡았다

이번 글에서는 그들의 실제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운하에서 일하는 선원들의 상호부조 조직으로 시작된 청방은 1850년 태평천국 운동이 발발하고 전란으로 인해 대운하의 조운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때부터 계산하면, 193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반(半)식민 반(半)봉건의 사회 환경 속에서 장장 80년에 걸친 확장과 진화를 거쳤다. 청방은 1930년대 중반부터 막강한 조직을 거느리고 돈과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전성기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청방의 3대 두목으로 불린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이 있었다.

두월생_장소림_황금영.jpeg 왼쪽부터 두월생, 장소림, 황금영 출처 : 바이두
황금영.JPG
장소림.JPG
황금영(좌)과 장소림(우) 출처 : 바이두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이는 황금영이었다. 1868년 쑤저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글공부보다 싸움질을 좋아했고, 20대 초반 상하이로 건너가 순포(오늘날의 순경) 시험을 거쳐 프랑스 조계지 순포방에 들어갔다. 얼마 후 가톨릭 신부 실종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프랑스 조계지 경무처 최초의 중국인 독찰장(督察長)으로 승진했다. 이 직위는 그에게 공식적인 권력과 사적인 세력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황금영에게 공권력은 범죄를 감추기 위한 방패였다. 암암리에 도박장을 열고 극장을 운영하면서 청방이라는 거대한 지하 조직과 손을 잡더니, 차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하 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했다. 단속이 뜨기 전에 미리 알고 피했고, 경쟁자가 생기면 자신이 직접 잡으러 갔다. 경찰관이면서 동시에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두 세계를 넘나들며 세력을 키워나갔고, 1925년 마침내 경찰직을 내려놓은 뒤 정식으로 청방에 가입했다.

두월생은 1888년 상하이 근교 푸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소년은 상하이 뒷골목을 전전하며 숱한 고생 끝에 황금영의 아내 임계생의 눈에 들었다. 임계생이 그를 눈여겨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두월생은 말수가 적었고, 지시를 받으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그 이상을 해냈다. 조직의 생리상 폭력으로 해결할 일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처리했으며, 언제나 상대가 스스로 물러나도록 상황을 설계했다. 여러 일을 해결하면서 차츰 황금영의 오른팔이 되었고, 어느새 오른팔을 넘어 스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지만 스승 앞에서 언제나 자세를 낮추었다.

장소림은 셋 중 가장 거칠고 직선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877년 저장성 항저우에서 태어나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졸업한 정식 군인 출신으로, 탁월한 사격 솜씨와 격투 실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승진이 더딘 것에 불만을 품고 군복을 벗어던진 뒤 건달들과 어울리다가, 상하이로 건너와 청방에 투신했다. 무술에 능하고 총을 잘 다루는 그는 청방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었고, 말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주먹과 총으로 빠르게 처리하며 단숨에 두각을 나타냈다.

장소림과 두월생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젊은 시절 두월생이 적에게 두들겨 맞아 피범벅이 된 채 길가에 쓰러져 있을 때, 지나가던 장소림이 그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두월생은 두고두고 그를 은인으로 여겼고, “내가 오늘 여기 있는 건 모두 장소림 형님 덕분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장소림은 두월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였다. 두월생이 상황을 계산하고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장소림은 외교가 필요한 자리에서도 주먹으로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폭력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무법천지에 가까운 상하이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힘은 때로 서류도, 명분도, 돈도 아닌 물리력이었다. 마지막에 문을 부수고, 화물을 지키고, 경쟁자의 기세를 꺾어 놓을 사람이 필요했고, 장소림은 그 역할을 누구보다 훌륭히 수행했다.

장소림이 두월생, 황금영과 손을 잡은 것은 순수한 힘의 논리였다. 상하이 지하 세계에서 혼자 버티는 것보다 연합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셋 사이에 자연스러운 분업 구조가 생겨났다. 황금영은 공권력과의 커넥션을 제공했고, 두월생은 뛰어난 사업적 감각으로 자금과 인맥을 관리했으며, 장소림은 물리적 집행력을 쥐고 있었다. 역할이 뚜렷하게 나뉘었고,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구조였기에 이들의 연합은 삼각형처럼 견고했다.

20260412_023503.png
20260412_023229.png
20260412_023751.png
영화 속 루 선생(두월생)과 장 선생(장소림), 왕 사장(황금영) (위부터 시계 방향)

1920년 세 사람은 함께 삼흠공사(三鑫公司)를 설립했다. 세 사람의 연합이 진정한 권력으로 전환된 계기는 아편이었다. 1920년대 상하이에서 아편은 단순한 마약이 아니었다. 아편은 곧 돈이자, 세금이며, 정치자금이었고, 권력 운영의 윤활유였다. 조계 당국도, 군벌도, 국민당 정부도, 모두 어떤 식으로든 아편에서 나오는 수익에 의존했다. 삼흠공사는 표면적으로는 무역회사였지만 실제로는 아편 유통을 독점한 조직이었다. 프랑스 조계 당국조차 여기서 수익을 배분받았다.

삼흠공사 운영에서 두월생이 보여준 방식은 그의 일관된 처세를 잘 보여준다. 그는 회계 장부를 정리하고 납품 일정을 관리했으며, 조계 당국에 뇌물을 줄 때도 상대방의 직급과 권한에 따라 정기적으로 상납했다. 한 번은 프랑스 조계 당국이 평소와 달리 강한 압박을 가해왔다. 그러자 두월생은 공식적인 협상 대신 그 고위 관리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파악했다. 알고 보니 그 관리에게 본국에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두월생이 조용히 그 빚을 대신 처리해 주자 조계 당국의 단속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싸우지 않고 상대가 필요한 것을 먼저 내어줌으로써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두월생의 일관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상하이를 장악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27년 3월, 상하이는 폭풍 전야였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상하이 외곽까지 진군해 왔을 때, 도시 안에서는 공산당이 배후에서 일으킨 노동자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상하이 총노조를 장악한 노동자 수만 명이 파업과 시위를 감행했다. 장개석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면 비난과 반발이 쏟아질 것이라 판단하고, 군대를 대신해 봉기를 진압해 줄 검은손과 결탁했다. 바로 청방이었다.

4월 12일 새벽, 두월생은 상하이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던 왕수화(汪壽華)를 처치한 뒤 흰 완장을 두른 청방 조직원 수천 명을 동원해 상하이 전역의 노동자 거점을 급습했다. 국민당 군대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고, 수천 명이 사망했다. 두월생이 부하를 시켜 왕수화를 생매장하는 장면은 영화 《로맨틱상실사》 초반에도 등장한다.

이 사건 이후 두월생은 더 이상 어둠 속의 보스가 아니라 국민당 정권이 공인하는 사회적 인물이 되었다. 상하이 상공회의소 이사, 각종 자선단체 이사장, 은행 감사위원 등 번듯한 직함이 그에게 주어졌다. 아편 무역과 청방 조직의 수장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상하이 최고의 자선사업가이자 사교계 명사. 두월생의 이 두 가지 얼굴은 모순이 아니라 서로를 증폭시키는 힘이었다.

군벌, 정치인, 문인, 배우, 영사관 직원, 사업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두월생의 저택을 드나들었다. 그는 찾아오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의 병원비를 내줬고, 누군가의 소송을 해결했고, 누군가의 자녀를 취직시켰다. 그리고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황금영은 돈을 탐하고, 장소림은 권세를 탐하고, 두월생은 사람의 마음을 탐한다." 돈과 권세는 빼앗길 수 있지만 인심은 빼앗기 어렵다는 걸 두월생은 알고 있었다.

1.jpg
10.jpg
2.jpg
9.jpg
5.jpg
3.jpg
4.jpg
6.jpg
8.jpg
7.jpg
상하이 외곽에 복원된 두월생의 저택. 2000년 도시 개발로 철거 위기에 처하자 캐나다의 한 화교 사업가가 사비로 매입한 뒤, 자리를 옮겨 10여 년에 걸쳐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그의 권력이 커질수록 황금영과의 관계는 미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두월생은 끝까지 황금영을 스승으로 대우했다. 황금영의 생일이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모든 공식 석상에서 황금영에게 상석을 내어주었으며, 누구든 황금영을 가볍게 말하면 단호하게 제지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직의 돈과 결정권과 인맥은 이미 두월생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1924년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황금영은 당시 상하이 최고의 경극 배우 노란춘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금영은 역시 노란춘을 마음에 둔 저장성 군벌 노영상(盧永祥)의 아들 노소가(盧筱嘉)와 시비가 붙는 바람에 군벌에게 납치되고 말았다. 상하이 청방의 두목이 군벌에게 끌려가 감금됐다는 소문에 상하이 전체가 술렁였다. 두월생은 노영상과 노소가를 찾아가 거액의 위로금을 건네며 황금영을 석방해 달라고 설득했고, 황금영은 며칠 뒤 무사히 풀려났다. 이 사건 이후 둘 사이의 위계는 사실상 뒤집혔다. 황금영은 이미 권력의 중심이 이동했음을 직감했는지, 차츰 일선에서 물러나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 해군이 상하이에 상륙해 중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제1차 상하이사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상하이가 더 이상 안전한 도시가 아님을 선언하는 신호탄이었다. 열강의 조계지가 있고 국제 무역이 집중된 상하이는 그동안 일종의 성역이었으나, 그 성역에 포탄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세 사람의 견고한 연합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황금영은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했다. 이미 예순을 넘긴 그는 평생 일군 재산과 안위를 지키는 것 외에 어떤 정치적 판단도 내릴 의지가 없었다. 황금영이 침묵에 빠져 있을 때 두월생은 분명하게 항일 노선에 섰다. 일본의 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의 금고를 열어 막대한 자금과 구호물자를 국민당 정부에 지원했으며, 조직원들을 동원해 첩보를 수집하고 항일 지하 활동을 도왔다. 마약을 팔고 노동자의 고혈을 짜낸 암흑가의 보스가 조국의 위기 앞에서 돌연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이 기묘한 행보가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는지, 아니면 장개석과의 결탁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치욕스러운 매국의 길은 택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회유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이 미묘하게 다르다

반면 장소림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포성 속에서 새로운 권력의 주인을 보았다. 1932년 이후 그는 일본 군부를 기웃거리며 은밀히 접촉을 시도했고, 1937년 상하이 전투를 기점으로 마침내 일본의 품에 안겼다. 국민당군과 일본군이 석 달간 격전을 벌인 끝에 상하이가 일본의 실질적 통제 아래 들어가자, 세 사람은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섰다.

두월생은 상하이를 떠났다. 막대한 재산과 사업과 인맥을 두고 떠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홍콩으로, 다시 국민당의 임시 수도 충칭으로 향했다. 충칭에서 그는 자금 조달, 정보 연결, 후방 지원 등 장개석 정권을 위한 많은 일을 했다. 황금영은 상하이에 남았지만 일본에 협력하지는 않았다. 일본군이 여러 차례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는 매번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장소림의 행보는 달랐다. 그의 친일 행각은 단순한 생존 방편을 넘어 적극적이고 탐욕스러웠다. 공개적으로 일본 군정의 직함을 받아들이고 점령지 행정에 적극 참여했으며, 청방이 쥐고 있던 아편 무역망을 재편해 군비 조달에 목마른 일본군에 영합했다. 심지어 상하이에 남아 있던 항일 인사들과 두월생 지하 조직원들의 명단을 일본 헌병대에 넘겼다는 소문이 퍼졌다.

두월생은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장소림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 철저히 두월생 다운 침묵이었다. 그러나 그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국민당 특무 조직 군통 내부에서는 장소림을 겨냥한 암살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 논의에 두월생이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의 관여가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지만, 일단 적이라고 판단되면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영화 <로맨틱상실사>에서 장 선생은 기차역에서 암살당한다

자신이 군통의 암살 명단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장소림은 수많은 경호원을 곁에 두고 외출을 일절 삼갔다. 그러나 그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은 외부의 습격이 아니었다. 1940년 8월 14일, 장소림은 자신의 집에서 경호원 임회부가 쏜 총에 즉사했다. 임회부는 오랫동안 장소림의 신임을 받아왔지만 이미 군통에 포섭된 내부 첩자였다. 부하 수백 명도, 일본군의 권세도 심복이 쏜 총알 한 발을 막아내지 못했다. 외부 세력과 손잡고 형제의 등에 칼을 꽂는 자는 반드시 처단한다는 청방의 암묵적인 법도가 국민당 특무요원의 손을 빌려 집행된 셈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고 상하이에 다시 국민당 깃발이 휘날렸다. 황금영은 여전히 상하이에 있었다.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범이나 부역자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장개석 정권은 대만으로 퇴각했다. 상하이의 자산가들, 국민당 인사들, 청방의 조직원들이 대거 홍콩과 대만으로 떠났다. 두월생도 이미 홍콩에 있었다. 하지만 황금영은 끝내 남았다. 재산을 두고 빈손으로 도망칠 수 없었던 탓인지, 이미 여든을 넘긴 노구로 피난길을 견딜 수 없다는 체념 때문인지, 그 이유는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공산당 정권은 황금영이 평온한 노후를 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수만 명의 인민들 앞으로 끌려가 공개적인 자아비판을 수없이 강요받았고, 상하이 신문에는 그의 자아비판문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굴욕의 정점은 1950년대 초의 어느 서늘한 아침이었다. 공산당은 늙은 황금영에게 허름한 옷을 입히고 빗자루를 들려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는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대세계(大世界) 오락장 앞 골목을 쓸어야 했다. 한때 상하이 뒷골목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그가 바로 그 골목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려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공산당이 노린 것은 처형이 아니라, 황금영이 표상하던 구시대의 질서가 완전히 청산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퍼포먼스였다. 황금영은 그 굴욕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다 1953년 겨울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여든다섯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상하이를 떠나지 않았다. 굴욕을 당했지만 살아남았고, 살아남았기에 굴욕을 당했다. 그의 마지막은 화려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오래 살다가, 자신이 만들었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죽었다.

황금영 노후.jpeg 말년에 굴욕을 견뎌야 했던 황금영 출처 : 바이두

두월생의 말년도 겉보기에는 황금영보다 훨씬 덜 굴욕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1949년 공산당이 상하이를 점령하기 직전 홍콩으로 건너간 두월생은 대만으로 오라는 장개석의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왜였을까. 피 묻은 학살부터 항일전쟁의 자금줄 역할까지 국민당을 위해 헌신했지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서운함, 그리고 장개석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대만도 중국 대륙도 아닌 홍콩이라는 중립 지대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홍콩에서의 삶은 초라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권력이 있던 시절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이제 권력 없는 유명인사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았다. 홍콩에서 두월생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두 가지였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상하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돌아가보길 원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고독이었다. 말년의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평생 남을 도와줬는데, 내가 정말 필요할 때 도와준 사람이 없다.” 과장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 말년에 고독을 느꼈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살았던 그의 외로운 말년은, 그가 평생 인정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권력의 그림자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강도 빠르게 악화됐다. 심한 천식을 앓았고, 홍콩의 습한 기후가 몸에 맞지 않았다. 1951년 8월 16일, 두월생은 예순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 남자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끝났다. 장소림은 부하의 총에 맞아 자신의 집에서 죽었다. 황금영은 자신이 지배했던 골목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했다. 두월생은 돌아갈 수 없는 도시를 그리워하며 타향에서 숨을 거뒀다. 세 개의 다른 결말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자신이 만든 세계의 소멸을 살아서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배했던 상하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이한 세계였다. 식민지와 근대의 경계, 법과 무법의 경계,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겹치는 공간. 그 경계의 틈새에서 청방 3인방은 번성했다. 경계가 사라지면 틈새도 사라진다. 1949년 공산당의 상하이 점령은 그 경계를 모두 지웠다. 조계는 폐지됐고, 아편은 근절됐으며, 청방은 해산됐다. 세 남자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그러나 소멸이 곧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소환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범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이 위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또 어떤 선택이 어떤 결말을 만드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장소림은 살해당했고, 황금영은 상징적으로 죽은 후 생물학적으로 죽었으며, 두월생은 망명 뒤 서서히 소멸했다. 어떤 죽음이 더 나은지 물을 수는 없다. 다만 각자의 삶이 각자의 죽음을 만들었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낭만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낭만이 사라진 자리에, 이 이야기가 남았다.

11.jpg
12.jpg
13.jpg
상하이에 남아 있는 두월생의 곡식창고. 현재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대, 같은 도시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았던 이들이 있었다. 권력을 드러내는 대신 감추고, 이름을 알리는 대신 지우며 살았던 사람들. 다음 편에서는 상하이 조계지의 그림자 속에서 활동했던 스파이들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02. 낭만이 소멸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