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낭만이 소멸한 순간

영화 《로맨틱상실사》와 한 시대의 종말

by 허유영

2016년 겨울, 중국 극장가를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흔들어 놓은 영화 한 편이 있었다. 청얼(程耳) 감독의 《라만체극소망사(羅曼蒂克消亡史)》, 번역하자면 《로맨틱상실사》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관객과 평단에서 극명하게 다른 두 가지 평가를 받았다. 어떤 이는 “최근 10년 이래 최고의 중국어 영화”라고 극찬했고, 어떤 이는 “시간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대형 뮤직비디오”라고 혹평했다.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이토록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관객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하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국내에 수입되지 않았다. 다만 감독이 쓴 동명 소설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적이 있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소설을 번역하며 쉽지 않은 내용에 애를 먹었지만, 왠지 사람을 매료시키는 묘한 분위기가 손 끝을 맴돌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지난해 유튜브에서 우연히 풀영상을 발견하고 드디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The Wasted Times'를 검색하면 볼 수 있지만 아쉽게도 영어와 중국어 자막뿐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몇 년간의 의문이 풀렸다.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갈우(葛優)와 장쯔이(章子怡) 주연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이유 말이다. 이미 소설을 번역한 나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중국 근대사를 모르는 한국인이 보기에 상당히 난해한 영화였다. 하지만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 역자로서 감히 추측컨대, 만약 이 영화가 국내에 정식 개봉되었다면 분명 적지 않은 흥행과 평단의 찬사를 동시에 이끌어냈을 것이라 확신한다. 촘촘하게 짜인 동명의 소설이 영화의 여백을 채워주는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탄탄한 완성도를 갖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상과 역사를 잘 모르는 관객들이 본다면 이해하기 힘든 영화이긴 하다. 심지어 중국 영화팬들조차 이 영화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평이 많았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관객의 반응에 청얼 감독이 내놓은 대답이 재미있다.

“이해가 안 가면 두 번 보십시오.”

세계적인 거장의 입에서 나왔어도 오만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이 말을, 이제 고작 세 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내뱉다니. 이렇게 호기로운 감독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청얼은 1976년생으로 1999년 베이징영화학원 연출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이미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그의 위상은 졸업 작품에서부터 증명되었다. 그가 연출한 31분 분량의 단편 《범죄분자(犯罪分子)》는 압도적인 완성도로 화제를 모았으나,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범죄자가 체포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유유히 도주해 버리는 파격적인 결말 때문이었다. 중국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며 유통되지 못하던 이 영화는 2020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청얼은 데뷔 초부터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서사와 완벽에 가까운 연출력으로 영화계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아왔다. 필모그래피가 쌓이지 않은 신인급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네 번째 영화에 갈우, 장쯔이, 아사노 타다노부 등 아시아 최정상급 배우들이 기꺼이 출연을 결정했음은 그가 중국 영화계에서 갖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영화와 동일한 세계관을 소설로도 써내는 문학적 재능까지 겸비했으니 그의 다재다능함이 부러울 따름이다.

졸업작품 후 25년 넘는 세월 동안 그가 발표한 영화는 《세 번째 사람》(2006), 《변경풍운》(2012), 《로맨틱상실사》(2016), 《무명》(2023), 단 네 편이다. 작품 수는 극히 적지만, 그는 내놓는 작품마다 독보적인 스타일과 높은 완성도를 증명해 왔다. 비선형 서사, 응축된 대사, 대칭 구도와 더불어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놓인 개인의 운명을 다루는 주제 의식은 그의 영화를 상징하는 공통된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지점은 영상미다. 《로맨틱상실사》를 보고 있으면 이 감독에게 강박증이 있나 의심스러울 만큼 정교한 미장센에 압도당하게 된다. 장면 하나하나가 건축 도면처럼 치밀하게 설계된 듯한 대칭 구도는 웨스앤더슨의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을 연상시키면서도, 청얼 특유의 무거운 역사적 긴장감과 결합해 독특한 미학을 창조한다.


2편_1.png
2편_11.png
2편_3.png
2편_2.png
모든 장면의 구도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2편_20.png
2편_21.png
2편_6.png
2편_7.png
식탁의 봉투 하나조차 허투루 놓여 있지 않다.

청얼은 촬영과 후반작업 기간이 길기로도 유명하다. 《로맨틱상실사》의 후반 작업은 무려 1년 넘게 진행되었고, 편집 버전이 15개나 있었으며 추가 촬영도 이루어진 탓에 크랭크인 후 2년 가까이 지나서야 개봉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의 집요한 완벽주의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렇게 미장센에 집착하고 제작 기간이 길게 늘어지는 점은 왕가위 감독을 떠올리게 한다. 왕가위가 《동사서독》을 찍을 당시, 그의 지독한 완벽주의 탓에 무한정 기다리다 지친 배우들을 보다 못한 제작자 유진위(劉鎮偉)가 그 배우들을 데리고 그 세트장에서 그대로 찍어낸 코미디 영화 《동성서취》가 흥행에 성공해 《동사서독》의 제작비를 충당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청얼 역시 《로맨틱상실사》 촬영 현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 소설판 《로맨틱상실사》를 썼다고 하니,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을 듯하다. 한 술 더 떠서, 청얼 감독이 《로맨틱상실사》 이후에 연출한 《낭만적이지 않음》은 촬영이 끝난 지 5년 넘도록 개봉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왕가위의 《동사서독》이 3년 만에 개봉했던 전례를 떠올리면, 청얼 역시 자기만의 ‘낭만’을 완성하기 위해 시간을 두고 침묵을 견디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집스러운 괴짜천재 청얼 감독에 대해 호기심이 든다면, 그가 연출한 양조위 주연의 영화 《무명》을 보길 추천한다. 2023년 국내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로맨틱상실사》와 비슷한 시기인 1940년대 초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첩보전을 다룬 작품으로, 청얼 특유의 세련된 영상미와 비선형적 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의 독창적인 미학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로맨틱상실사》가 어떤 영화인지 살펴보겠다.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을 뒤섞은, 이른바 비선형적 서사 구조 때문이다. 1934년, 1937년, 1941년, 1945년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인물들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조각조각 등장한다. 하지만 시간 순서대로 재배열하면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해진다.

1934년, 상하이 청방의 실질적 두목인 루(陸) 선생은 조직 안팎의 일을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다.(영화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이 조금씩 다른데, 영화를 기준으로 하겠다.) 그의 큰형 왕 사장의 젊은 아내 샤오류(小六)가 삶의 무료함을 못 이겨 사교계에서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니자 그녀를 영화배우로 데뷔시켜 주지만, 상대역 남자배우와 바람을 피우다 발각된다. 체면을 중시하는 조직은 그녀를 상하이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루 선생의 일본인 매부 와타나베를 시켜 그녀를 북부로 보내 버리게 한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호송 도중 동승자를 모두 살해하고 샤오류를 자신의 일식집 지하실에 감금한 뒤 자신의 성노예로 삼는다.

같은 해, 은막의 대스타 미세스 우(吳)는 남편의 바람기와 도박 빚 문제로 곤경에 빠졌다가 루 선생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 일을 도와준 권력가 다이(戴) 선생은 타지에 일자리를 주어 그녀의 남편을 멀리 보낸 뒤 미세스 우를 자신의 첩으로 앉힌다.

1937년, 상하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가진 일본인들이 루 선생에게 협력을 요청한다. 그는 단호히 거절하지만, 그와 같은 조직에 있는 형제 장 선생은 일본과 손을 잡으려 한다. 사실 루 선생의 매제인 와타나베는 일본군 장교 스파이였다. 그는 일본군과 내통해 루 선생을 암살하고 온 가족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루 선생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여동생과 아들이 목숨을 잃은 뒤 조카 둘을 데리고 홍콩으로 떠난다. 1941년, 홍콩에 머물던 루 선생은 장 선생이 일본과 손잡고 은행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상하이에 있는 애첩 라오우(老五)와 자신의 부하인 인력거꾼을 시켜 장 선생을 암살한다.

홍콩이 일본에 함락되기 직전 충칭(重慶)으로 떠났던 루 선생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상하이로 돌아와 수용소에 있던 샤오류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들은 필리핀의 전쟁 포로수용소로 향한다. 상하이를 떠나 필리핀으로 옮겨갔던 와타나베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루 선생은 와타나베를 수용소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와타나베의 큰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를 살해하고, 와타나베가 밖으로 나오자 샤오류에게 총을 주고 그를 향해 직접 방아쇠를 당기게 한다.

1949년, 루 선생이 홀로 홍콩행 배에 몸을 실으며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영화는 이 줄거리를 축으로 삼아 시골에서 올라와 조직의 궂은일을 도맡는 말단 조직원부터 루 선생의 집사, 사교계의 여배우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통과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운명을 엮어냈다.

2편_18.png
2편_8.png
2편_5.png
2편_4.png
2편_9.png
2편_19.png
2편_16.png
2편_17.png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실제 역사 속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청얼 감독은 “순전한 허구”라고 말했지만,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실제 인물들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 속 루 선생은 상하이 청방의 거물 두월생이 분명하고, 조직의 큰 형님으로 나오는 왕 사장은 청방의 대부였던 황금영(黃金榮)이다. 또 루 선생을 배신하는 장 선생은 청방의 3대 두목 중 한 명인 장소림(張嘨林)이 모델이다. 실제로 장소림은 일본과 손잡고 항일 운동가들을 탄압하다가 두월생의 부하 임회부(林懷部)에게 암살당했다. 영화에서도 그는 일본과 결탁해 조직을 배신한 뒤 마부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다.

여배우 미세스 우의 원형은 당시 최고의 영화배우였던 호접(胡蝶)이고, 그녀를 첩으로 삼은 다이 선생은 지난 1편에서도 언급했던 국민당 군통인 대립(戴笠)이다. 장쯔이가 연기한 샤오류는 어떤 특정한 인물을 원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서사가 융합된 복합체인데, 자유분방한 면은 황금영 첩이었던 경극 배우 노란춘(露蘭春)과, 비극적 운명은 호접과 닮았다.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 역사를 그대로 옮겨오기보다, 역사 속 실화에 상상력을 더해 새롭게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이들 인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우선 영화의 연출 스타일에 대해 살펴보자. 청얼 본인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듯이, 이 영화를 보면 타란티노의 폭력 미학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많다. 루 선생이 일본군 스파이였던 매제 와타나베에게 배신당해 부하들과 가족들을 모두 잃는 장면을 보자.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와중에도 루 선생은 허둥지둥 도망치지 않고 긴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느릿느릿 걸어 나간다. 참혹한 학살 현장과 루 선생의 기묘한 여유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카메라는 그의 움직임을 슬로 모션으로 포착하고, 배경에는 종교적인 색채의 영어 노래 <Where Are You, Father>가 흐른다. 루 선생은 모든 식솔이 몰살당한 피 비린내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치 정물화 속을 우아하게 걸어가 듯 시신 사이를 걷는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은 여동생(와타나베의 아내이기도 하다.)의 시신에서 붉은 꽃잎이 피어나듯 검붉은 핏물이 조용히 번지며 스크린을 화려하게 물들인다. 이 장면에서도 폭력의 순간은 생략되고, 관객들은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폭력은 더 이상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슬픔과 상실의 미학으로 재탄생한다.

총알이 곁을 스쳐도 동요하지 않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루 선생. 그가 지키는 것은 목숨이 아니라 체면이다. 체면이 있기에 피 비린내 나는 장면이 우아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루 선생의 면모는 영화 전반에 걸쳐 보이는데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이 바로 장삼과 중절모다. 다음은 루 선생이 일본인들과 담판을 지으러 가는 장면이다.

자신을 압박하는 일본군 장교들을 만나러 가면서 장삼의 맨 윗단추를 끼우고 중절모를 반듯이 쓴 뒤 장삼 자락을 날리며 나가는 이 순간은 어떤 압박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그의 단단한 기개가 체면으로 형상화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 루 선생의 이러한 모습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루 선생의 실제 원형인 두월생은 폭력조직의 두목이지만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한 인물이었다. “인생에는 가장 먹기 어려운 세 그릇의 국수가 있다”라고 했다는 그의 말이 유명한데, 인면(人面), 장면(場面), 정면(情面)이 바로 그것이다.

‘인면’이란 자기 체면을 지키는 것이다. 두월생은 출세한 뒤 거친 건달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 당시 상하이 폭력배들이 즐겨 입던 짧고 검은 단삼 대신 긴 장삼을 즐겨 입고, 중절모를 착용했으며,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장삼의 첫 단추를 절대 풀지 않았다. 부하들도 옷을 단정히 입고 여름철에도 아무리 더워도 웃통을 벗지 못하게 했다. 또 그는 ‘두 사장’이 아닌 ‘두 선생'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단순한 폭력배가 아니라 교양과 품격을 갖춘 인물로 인정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장면’이란 자신의 영향력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1931년 두월생이 두 씨 가문의 사당을 세우며 열었던 낙성식은 상하이 역사상 가장 성대한 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 장개석이 보낸 대형 편액을 비롯해 당대 최고 명사들의 편액이 수백 개나 걸렸고, 시대를 풍미했던 4대 경극단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역사적으로도 유일무이한 기록이었다. 낙성식을 보러 온 행렬이 3킬로미터에 달해 구경꾼이 강물에 빠질 정도였다. 또 같은 해 상하이에 큰 홍수가 나자 그는 직접 나서서 거액을 기부하고 구호 활동을 펼쳤고, 항일 전쟁이 터지자 군대에 전투기 두 대를 기증하고 전병 수만 장을 구워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냈다. 누군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통해 나를 본다. 장면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두월생이 아니다.”

세 번째 ‘정면’은 서로 주고받은 인정과 의리라는 이름 아래 지켜야 하는 체면인데, 이것이 가장 먹기 힘든 국수다. 인정과 의리, 규칙과 감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두월생은 평생 “돈을 저축하지 않고 인연을 저축한다”는 말을 지키며 살았다. 대표적인 일화로 유명한 유학자 장태염(章太炎)과의 일이 있다. 장태염의 조카가 상하이에서 부동산 분쟁을 겪자, 장태염이 두월생에게 편지를 써 도움을 청했다. 두월생은 그 일을 잘 처리한 뒤 직접 쑤저우(蘇州)까지 장태염을 찾아가 결과를 보고하고, 떠나오기 전 찻잔 아래에 2천 위안짜리 수표 한 장을 조용히 넣어두었다. 당시 화폐 가치로 2천 위안은 쌀을 1톤 넘게 살 수 있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는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은혜를 베푸는 두월생 특유의 방식이었는데, 그 후 장태염은 두용(杜鏞)이었던 그에게 두월생(杜月笙)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는 등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 두월생과 황금영 모두 정기적으로 거지들에게 돈과 죽을 나눠주는 자선 활동을 했는데, 황금영은 한 사람이 여러 번 받아가지 못하도록 거지들을 한 곳에 가두어놓고 나눠주었지만, 두월생은 “거지에게도 체면이 있다. 같은 사람이 다시 온다면 나는 죽 한 그릇 더 주면 그만이지만, 그들을 가둬놓는 건 그들의 체면을 짓밟는 일이다.”라며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다.

두월생이 죽던 해,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평생 보관해 온 차용증을 모두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적게는 수천 위안, 많게는 수십만 위안에 달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는 “내가 빌려준 것은 돈이 아니라 인연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영원히 두 집안의 우정을 기억할 것이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너희들이 빚을 요구했다가는 도리어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결정 덕분에 두월생이 죽은 뒤 그의 가족들은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이 세 그릇 국수는 서로 충돌하는 역설적 관계를 갖는다. ‘인면’을 지키려면 남의 체면도 올려줘야 하고, ‘장면’을 유지하려면 돈과 정을 끊임없이 베풀어야 하며, ‘정면’을 챙기려다 규칙을 어긴다면 오히려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 이 세 그릇 국수는 단순한 생존 기술을 넘어, 난세의 상하이에서 자신의 지위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생존 전략이었다.

20260408_105803.png
20260408_105908.png
20260408_110256.png
20260408_110346.png

이 영화에서 '로맨틱하다'는 건 단순히 연애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넓은 개념의 체면, 품격, 규칙, 우아함, 의리, 자유 등 한 시대를 구성하는 모든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포괄한다. 두월생이 평생 지켜온 바로 그 체면과 품격이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로맨틱함'이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일본인들이 닥쳐왔다. 자기 아내조차 죽여버린 와타나베의 가족 몰살은 두월생이자 루 선생이 평생 지켜온 이 체면과 규칙의 세계를 한 방에 산산조각 내는 폭력이었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즉 체면과 품격, 우아함과 의리가 소멸하는 순간. 그 소멸의 현장을, 청얼 감독은 느릿느릿한 슬로 모션과 우아한 대칭 구도, 그리고 차가운 클로즈업으로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로맨틱상실사》는 한 시대의 종말을 그린 영화다. 전쟁이라는 야만성 앞에서, 체면과 품격, 우아함과 자유는 무참히 짓밟힌다. 루 선생은 상하이를 떠나고, 샤오류는 더 이상 여배우의 꿈을 품을 수 없으며, 와타베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제국과 함께 무너진다.

영화 마지막 장면인 홍콩 세관. 루 선생은 사람들 틈에 섞여 줄을 서 있다. 늘 장삼 차림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장삼이 아닌 양복 코트를 걸친 채였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오자 그는 세관 직원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중절모를 벗고 두 팔을 들어 올린다. 그가 평생 지켜온 장삼의 단추 하나, 그가 목숨처럼 여긴 체면과 품격, 그가 세상에 보여주던 우아한 걸음걸이,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두 팔을 들고, 낯선 세관 직원의 손에 몸을 맡길 뿐. 이것이 바로 ‘로맨틱의 소멸’이다. 한 시대의 낭만이,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철저하게 종말을 고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영화 속 인물의 실제 원형이 된 청방의 3대 두목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풀어보고자 한다. 두월생, 황금영, 장소림. 혼란한 시기를 살았던 풍운아들의 의리와 배신, 권력과 몰락.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들이 남긴 치열하고도 비정한 궤적을 따라가 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01.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 그 틈새 위에 선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