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가정 청년 #근데뜨뜻미지근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귀하게 컸다는 생각이 드는 때는 언제일까? 언제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자랐었나 고민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처음으로 집을 나왔을 때 그 생각을 했다. 다 큰 성인이 가출이라니, 출가나 독립이라고 부를 테지만 내 경우는 가출이 맞다.
나는 3년 전 아버지를 피해 집을 나왔다. 아버지는 다수의 50대 남성 가장처럼 때로는 가부장적인 권위를 원하고,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지만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다소, 폭력적인 분이었지만, 일상이 편해서 나는 사실 성인이 돼도 독립하겠다는 꿈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매 순간 폭력적인 사람은 없다. 집에 없을 때는 평화롭고, 집에 있을 때는 다소 성질을 부리지만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큰 문제없이 넘어가곤 한다. 항상 그럴 줄 알았지만 일이 터지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이 사람이 두려워진 날에 나는 가진 것 중 최대한 값나가는 것을 가득 담아 집을 나왔다.
상황이 바뀌면 시야도 바뀐다. 집을 나온 내내 나는 비참했고, 스스로의 무능력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야 했던 사람들, 나오고도 갈 데가 없어서 길거리를 전전하는 학교 밖 청소년들, 그리고 보호기간이 종료되어 무작정 사회인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거나 들여다볼 생각조차 갖지 못했던 삶들이 놀라울 만큼 많았다. 나는 대학이라도 졸업했고, 모아둔 돈이 조금이나마 있고, 의지할 친척이 있지만 그것조차 없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찾아보면 볼수록 나는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한참이나 무기력해졌다.
내 조건을 부러워할 사람들도 열심히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무능력할까.
누구에게도 내 상황을 똑바로 말할 수 없었다. 먼저, 그전부터 똑바로 독립을 준비하거나 능력을 키우지 못한 자신이 신물이 나도록 싫었고, 그다음으로는 그 자괴감 때문에 누구에게도 상황을 털어놓지 못해서 속이 아팠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안 꼴보다 이 나이에 능력도 없고 뒷받침할 기반도 없고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도 못하고 온실에 화초처럼 자란 내가 부끄럽고도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다.
미디어에 나오는 사람들은 항상 불우한 환경을 멋지게 극복하고,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가끔 위태로울 때도 있다지만 씩씩하게 세상과 부딪히는 것 같았다. 근데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고 며칠, 몇 달, 적어도 1년은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다시 보면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 자괴감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래서 더 우울해졌다.
그러다 올해, "탈가정 청년"이라는 말을 처음 보았다. 2020년에 이미 서울시 청년 네트워크 연구 결과로 나온 말이었는데 난 올해 브런치에서 OPCL님의 글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날 표현할 말이 없어서 "가출 청년"이라고만 생각하던 내게 정의할 뭔가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탈가정 청년은 ‘원가족과의 ①주거 분리, ②경제적 단절, ③정서적 단절이라는 세 가지 상태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는 청년’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청년정책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탈가정 청년' 실태조사⌟,2020,91p.
가출보다 번듯해야 쓸 수 있는 이름 같지만 부정적 의미에 잠식되지 않은 중립적 용어에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그리고 보고서를 천천히 읽으면서, 기존 미디어의 지나친 극복이나 극단적 비극과 다른 논문 특유의 차분한 삶을 곱씹게 되었다.
꼭 극복하거나 비극의 대상이 되진 않았지만 나는 "탈가정 청년"이다. 사회면에 나올 만큼 비참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고, 소소한 행복은 충분히 만끽했고 여전히 비빌 구석은 조금은 있지만 집도 절도 없다. 아직 취업도 못하고 자립도 못했다. 여전히 미래는 고민 중이고, 씩씩하게 극복하지도 못했다. 여전히 가족관계는 어렵고, 무섭고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움츠러들다가 나이만 왕창 먹은 주제에 여전히 세상이 무섭다. 미래가 너무 겁이 난다. 아직도 비슷한데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싫다.
그래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이 그 사람을 덜 고통스럽게 했으면 좋겠다. 나처럼 끊임없이 우울해지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지근한 물처럼 애매하게 견디는 삶도 있으니까 작은 일에 힘들어한다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 자신은 사랑하거나 동정하기 힘들지만 나와 비슷한 조건의 누군가를 생각하면 온 마음으로 응원해주고 싶다. 그 마음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또 다른 내가 많이 우울해하지 않고,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부디 행복해져서 내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