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주말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와 잘 놀아줘야 한다', '다양한 자극과 경험을 줘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았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다.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 소꿉놀이다. 기승전 음식 놀이. 심지어 비싸고 화려한 부엌놀이 세트를 사준 것도 아니다. 당근에서 육아용품을 사다가 마음 좋은 분께 덤으로 얻은 작은 부엌세트였다. 기능도 거의 없는 그 작은 부엌에 그렇게나 몰입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좋은 장난감'을 사주고 싶어서 발달 영역별로 좋다는 홍보 문구에 혹해 비싼 원목 블럭도 잔뜩 사놨다. 쌓기 놀이로 운동 능력도 기르고 공간감각도 키우길 바랐는데… 현실에서는 그 블럭들이 소꿉놀이에서 빵과 과자 역할을 대신했다.
장난감 도서관에 가도 가장 먼저 달려가는 건 부엌세트나 냉장고. 어른들은 하루 종일 토마토를 씻고 굽고 먹는 연기를 하느라 지쳤지만, 아이에게는 오직 이것만이 재미였다.
소꿉놀이만 너무 몰입하는 것 같아 촉감 놀이도 해보고 싶어서 쌀, 콩, 미역을 플레이매트에 올려줬다. 하지만 손에 들러붙는 감각이 너무 싫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블럭을 쌓아 모델링 해봐도 잠깐 보고는 다시 자기 부엌으로 돌아갔다. 읽는 책도 음식이 나오는 책만 좋아하고.
이쯤 되면 부모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때되면 다 알아서 할 거란 걸 알지만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양한 놀거리가 있는 키즈카페에 갔다. 결과는… 부엌놀이 존 직행. 다른 곳으로 데려놔도 잠시 후 우다다 뛰어가 부엌으로 복귀.
그때 생각했다. '이러려고 이 돈 내고 여길 들어왔나.'
물놀이는 대부분 좋아한다니까, 이번엔 수영장에 도전했다. 50일 무렵부터 베이비스파도 경험한 아이라 당연히 잘 놀 줄 알았다.
하지만 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들어가서는 내내 울었다. 수영장 특유의 울리는 소리, 튀는 물방울, 그 모든 자극이 너무 불편해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번 수영장에 가서 물놀이감도 만지고, 어떤 날은 미끄럼틀을 재밌게 타고, 또 어떤 날은 '절대 안 타겠다'며 단단히 버티고.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환경에 쉽게 압도되는 아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은 참 어렵다.
여름휴가로 해수욕장에 갔을 때도 다른 아이들은 튜브를 타고 파도를 즐기는데 우리 아이는 모래놀이만 했다. 물 가까이만 가도 불안해하며 울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보지도 않고 무서워만 한다면, 이 아이의 세계는 너무 좁아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바다도 한 번만 기회를 줘보자"고 달래고 아이를 번쩍 안아 튜브에 태워 물로 들어갔다.
아이의 몸이 굳었다가… 잠시 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종종 이야기해준다.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시도해보는 것, 한 번 기회를 줘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바다에서 돌아온 뒤, 아이가 먼저 "수영장 가고 싶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며 거부하던 수영장을, 이제는 스스로 찾게 된 거다.
우리는 억지로 다른 활동을 강요하는 대신 소꿉놀이를 중심으로 확장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 시장·마트 역할놀이
장보기 목록 고르기, 물건 담기, 계산하기. 자연스럽게 사회성과 언어 능력, 관찰력이 연결된다.
2) 블럭으로 '음식 배치용 식탁' 만들기
접시, 의자, 트레이 같은 구조물을 함께 만들어보는 식으로 소꿉놀이 안에서 공간 구성 능력이 확장된다.
3) 실제 요리에 작은 역할 맡겨보기
아직 어려운 건 못하지만 재료 씻기, 재료 담기, 다듬어진 채소 옮기기. 이런 과정은 아이가 성공 경험과 감각 경험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아이 본인이 만져 본 나물 반찬은 더 맛있게 먹는다.
소꿉놀이 → 실제 요리 → 실제 식사.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확장 활동이 정말 효과적이었다.
4) 음식 그림 그리기
우리 아이는 끼적이기 활동에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스케치북에 과일이나 음식 그림들을 그려주기 시작하니까 끼적이기 활동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꿉놀이는 제일 좋아하지만 다양한 공간을 다니다 보니 변화도 생겼다.
자동차 박물관에 다녀온 뒤로 '탈 것'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소꿉놀이 중심이긴 해도 조금씩 세계가 확장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는 이것만 할 거야'라고 쉽게 단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렇게 울며 거부하던 쌀과 콩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만지고 있더라. 촉감적으로 덜 예민하게 변한 건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억지로 적응시키려 하지 않고 기다려줬더니, 아이는 스스로 준비가 됐을 때 그 문턱을 넘었다.
아이는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고 낯선 환경에 쉽게 압도되곤 한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도 기회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에서 출발해 확장시키는 경험, 조금 불편하지만 안전한 환경에서 시도해보는 경험. 그 속에서 뜻밖의 즐거움이 자라고, 그 작은 즐거움들이 아이의 세계를 넓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