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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Mar 26. 2021

[스파이의 아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와 국가에게 동시에 배신 당한 개인의 비참한 최후

* 아래 리뷰는 영화 [스파이의 아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극장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영화의 제작 및 배급사들의 로고가 하나 둘씩 화면을 스치고 사라지는 와중에 일본방송협회, 즉 NHK의 약자가 당당히 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고편을 통해 예측할 수 있는 인상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보들로 인해 본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의 과오를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그러한 측면에서 현 일본 사회의 우경화 세태를 감안했을 때 NHK의 투자 이력은 분명 눈에 띄는 요인이었다 (사실 [스파이의 아내]가 NHK에서 방영했던 스페셜 드라마의 확장판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그렇게 의외의 마음가짐을 품고 시작한 영화의 뒷편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명민함과 치밀함, 동시에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강직한 의무감을 마주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인물들을 차별한다. 차별이라 함은 각각의 인물들과 카메라 사이의 내적인 거리가 서로 확연히 다름을 지칭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결과는 관객이 캐릭터에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를 형성한다. 기본적으로 카메라가 자행하는 차별의 원인은, 몇몇 예외적인 장면들을 제외하고 영화의 시점 자체가 애당초 사토코 (아오이 유우 분)의 것에 의도적으로 맞춰져 있음에 기인한다. 제목부터가 스파이의 '아내'를 지칭하고 있음에서 드러나듯, 영화는 사토코의 내면을 관객에게 이해시키고 동일시를 유도하고자 오롯이 집중한다. 물론 사토코 이외에도 대다수의 인물들은 일반적인 모호함과 거리가 멀다. 비중이 적음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평면적인 캐릭터성을 지니거나 (후미오 (료타 반도 분)와 타이지 (히가시데 마사히로 분)의 경우), 언뜻 중요해 보이지만 이내 극에서 퇴장시켜 존재를 다급히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히로코 (현리 분)와 드러먼드 (니히 분)의 경우). 그러나 유사쿠 (타카하시 잇세이 분)는 다르다. 다소 충격적이지만 일부 예측할 수 있는 결말에 다다르고 나면, 관객은 유사쿠의 정체성을 쉽게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그가 과연 진정 코스모폴리탄은 맞는지, 히로코와의 관계가 과연 순수한 정의감에 근간한 것인지, 사토코에 대한 그의 감정은 어떠한지, 정확히 어떤 의도를 갖고 사토코를 배신했는지에 대한 무수히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그에 대한 해답을 탐구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빛의 사용 방식이다. 대부분의 실내 장면에서 비추어지는 유리창의 역광은 바깥의 풍경을 송두리째 들어내고 막연한 여백만을 제공한다. 마치 바깥의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 급급하는 것처럼, 햇빛은 사람들을 포근히 감싸는 척 하며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 일본 제국의 만행을 감추려는 도구로서 햇빛을 상정하는 또 다른 증거 (일제의 대표적 상징인 욱일승천기가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는 다음의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유사쿠가 히로코라는 여성을 만주로부터 데리고 왔고, 그녀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했다는 사건 소식을 타이지에게 전해 들은 사토코는 복잡한 감정을 안고 서를 나선다. 길 위의 모든 사람들이 햇빛을 등지고 화면 앞쪽으로 걸어나가 사라지는 반면, 사토코만이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힘겹게 걸어간다. 이는 쉽사리 결정짓기 어려운 수준의 선택에 운명적으로 떠밀린 개인이 최초의 심리적 균열을 겪는 순간이다. 히로코에게서 731 부대에 관해 끔찍한 사실을 전해 받고 이를 국제 사회에 폭로하려는 유사쿠는 스스로가 명확하게 언급하는 것과 같이 코스모폴리탄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외국인을 상대로 한 무역업을 하고, 미국의 풍경을 동경하는 유사쿠에게 세계의 시민으로서 구현해야 할 정의란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개인의 행복이나 사랑과 같은 가치는 미시적인 부수 따위에 불과할 뿐, 삶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야 할 거시적인 정의의 실현이다. 반면, 일견 과도한 이상주의처럼도 보이는 남편의 사상을 상대하는 사토코의 반응은 조금 더 소시민적이다. 폭로에 뒤따르는 매국노라는 낙인, 혹시나 감내해야 할지도 모를 소중한 가족의 해체와 같은 비극은 일개 개인이 짊어지기에 다소 과도한 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가, 혹은 사토코라는 개인이 저울질하는 주체는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와 같은 극단적 사상의 대립 따위가 아니라, 미약한 시민으로서 가정의 평안을 추구할지 혹은 존엄한 인간으로서 반인륜적인 행위를 고발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눈앞의 현실과 도덕적 이상 간의 갈등이라고 할까.


사토코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을 돌린 결정적 계기는 영화의 빛이다 (영화는 실로 빛의 예술이다). 유사쿠의 창고에 몰래 침입하여 폭로 자료를 훔치려던 사토코는 처음 보는 필름을 발견하고, 이를 돌려보기 위해 집에 돌아와 모든 창문에 커튼을 친다.  그리고 카메라는 바깥의 햇빛이 모두 차단되어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에 영화의 빛이 가닿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후 펼쳐지게 될 사토코의 극단적인 행동 — 후미오를 희생양으로 삼아 유사쿠를 구하는 — 과 유사쿠의 사상에 대한 열정적 지지는 모두 사토코가 영화의 빛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화는 햇빛과 달리 진실에 눈 뜨게 하고 선택의 길라잡이로서 기능한다.



다시 유사쿠의 정체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는 영화를 찍는 사람이다. 이야기의 시작, 드러먼드가 헌병대에게 붙잡혀 간 뒤 유사쿠는 영화를 찍는다. 남녀 주인공으로 사토코와 후미오를 캐스팅하여, 스파이인 연인과 그녀를 직접 총으로 쏘아야만 했던 남자 간의 비극적인 멜로 드라마를 완성한다. 동료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팔자 좋게 영화나 찍는 유사쿠의 태도는 일반적인 시선 하에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앞서 기술한 영화의 기능과 연관지어 본다면 유사쿠가 영화를 찍은 이유는 실로 명확하다. 그는 스스로 나아갈 길을 개척하기 위해 영화의 힘을 빌린 것이다. 꼭 미리 짜여진 것처럼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후미오와 사토코는 차후 유사쿠를 보호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미국으로 건너가 필름과 노트를 공론화해야만 하는 대의를 실행하기 위하여 차례로 희생된다. 물론 서사적인 측면에서 유사쿠가 처음부터 사토코와 후미오를 배신하려는 큰 그림을 그렸다고, 그래서 둘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찍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이정표적 기능, 또한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함을 넘어 행위를 정확히 예측하기에 이르는 (사토코가 실험 노트를 탈취하기 위해 회사 창고의 금고를 여는 모습은 명백하게 극 중 영화 장면의 반복이다) 전지적 능력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야말로 영화의 빛은 이미 일제의 선동 도구로 전락하고 만 햇빛과 달리, 혼돈과 비인간성의 세계에서 길 잃은 개인의 경로를 밝혀주는 한 줄기 희망인 걸까.


이쯤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본작의 주제는 빛 좋은 개살구 수준에 그쳤을지도 모르겠다. 4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어 놓고 정작 최종적인 결론이 영화의 전능성을 찬양하는 데 그친다면, 소위 말해 뭣이 중한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일본인 영화 감독으로서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핵심에서 도피해버리고 말았거나.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본작으로 미루어 볼 때, 기요시는 그의 가장 주요한 두 가지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과 '영화'를 동시에 공격하고 반성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영화의 말미에는 사토코의 입을 빌려 두 번 반복되는 대사가 등장한다. "훌륭해!" 첫 번째로 비로소 유사쿠의 배신을 깨닫고 자신이 연기한 영화의 앞에서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치고, 두 번째로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난 뒤 홀로 바다에 도착하여 나지막한 보이스오버로 읊조린다.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훌륭해!" 그 순간 유사쿠와 일본은 하나로 겹쳐진다.


먼저, 사토코는 유사쿠의 아내로서 유사쿠에게 배신을 당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토코를 배신한 주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토코는 731 부대의 만행을 찍은 필름-영화를 믿고 전복적인 행동 변화의 근거로 삼았으나, 그 믿음은 자신과 후미오가 재미로 찍은 보잘것 없는 영화에 의해 깨어진다. 그리고 그 영화를 찍은 감독은 다름 아닌 유사쿠다. 분명 영화는 누군가에게 신성하고 전지전능한 진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오직 창작자의 입장에서 그러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기요시는 스스로 반성한다. 영화에게 배신 당한 채 외마디 발악을 남기고 쓰러진 인물을 매개로, 기요시는 자신의 영화를 보고 의도치 않게 속아 넘어간 수많은 관객들의 배신감을 헤아리고자 한다.


또한 사토코는 일본의 국민으로서 조국에게 배신을 당했다. 이는 일제 당국을 제외한 모든 일본 국민에게 적용되는 명제다. 다시 한 번 영화의 제목이 스파이의 '아내'인 이유를 되새겨보자. 미스터리하고 속내를 알 수 없던 유사쿠의 진실은 사실상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물론 전통적 의미의 스파이가 아니었지만, 마치 스파이처럼 사토코를 안심케 하고 궁극적으로 주저 없이 배신했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 순간 스파이에게 배신 당한 스파이의 아내가 품게 될 허망함이란 얼마나 거대한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은 선동과 왜곡을 도구 삼아 일본 국민들을 배신했다. 제국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받았던 일본 국민들이 사실 그들의 조국은 전세계를 유린했던 악의 축이고 지금까지 그들의 믿음은 단지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면, 그들이 품게 될 원망과 허무함이란 얼마나 기막힌가.


일본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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