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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Jul 25. 2021

[더 파더] 기성 제도를 향한 우회적 공격

알츠하이머와 노인, 시간과 가부장제

* 아래 리뷰는 영화 [더 파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뒤엉키는 시간의 난동을 붙잡을 수 없어 그 주체가 타인의 농간이라 믿었던 노인은 그저 두렵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허용한 몇 안되는 딸의 시선마저 아버지의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 매몰되는 광경은, 마침내 스릴러를 차용한 장르적 화법이 꼭 들어 맞음을 확신케 한다. 알츠하이머는 그런 병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앤서니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앤이 등장하는 오프닝과 그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반부의 몇 장면을 빼면 전적으로 앤서니의 독무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공간은 최후반부를 제외하고 집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앤서니는 집에 대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애착을 보인다. 앤서니의 집은 곧 앤서니 자신을 그대로 표상하는 첫 번째 실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앤서니의 심기를 건드리는 외부인들의 침입이 잦아지고, 그때마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해 간병인을 들이려는 딸의 노력도 그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번번이 물거품이 된다. 앤서니의 불안정한 심리를 유추하여 거칠게 단언하자면, 그는 당장 존재의 근거를 위협받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따라 담당하게 되는 역할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크게는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함으로써 사회의 생산적인 일원이 되는 것이겠고, 작게는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안락한 보금자리를 구축하는 것일테다. 유복한 경제력과 고상한 생활상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지위는 (후술하겠지만, 이를 단번에 내보이는 것도 역시 집이다. 그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런던 한복판에 떡하니 위치한 앤서니의 고급 아파트를 보라)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됨에 따라 잃어버린지 오래다. 그나마 남은 것은 가족 안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아버지라는 직책 뿐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단연 집이다. 외부의 거친 세상으로부터 나의 가족을 든든히 보호하고 일상의 기초를 형성하는 공간. 이는 모름지기 아버지라면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들로부터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는 필사적인 이유다. 사뭇 고전적이다 못해 현대의 대체 가족화 흐름과는 한참 동떨어진 구시대적 사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로부터 고착화된 젠더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의 낡은 산물이라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은 앤서니가 그토록 강력하게 강조해왔던 그의 집이, 사실은 한참 전에 팔리고 없으며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딸 앤의 소유임을 깨닫는다. 나아가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그마저도 전부 환상 (혹은 뒤섞인 기억; 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몇 개의 섬뜩한 장면들에 비추어보면 이 쪽이 더 그럴 듯할지도 모르겠다)에 불과하였으며 집이라 굳건히 믿어왔던 공간은 정작 요양병원이었고 앤은 정말 파리로 떠났음을 알게 된다.


앤서니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앤을 제외하고, 영화 속에서 괄호 쳐져 있는 또 한 명의 딸, 루시. 앤서니가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들에서 비춰지는 주변인들의 난감한 반응으로 보아, 짐작컨대 그녀는 오래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가족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었던 아버지는 기어코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딸마저 그를 떠났다. 영화는 앤이 앤서니에게 곧 파리로 떠날 것이라는 이별의 통보를 고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아버지는 또 다시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이내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인 그의 '집' 역시 본래의 실체는 완전히 휘발되어버린 채 그의 박약한 정신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엘리트로서, 가정적으로 어엿한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근거라고 굳건히 믿어왔던 앤서니는 그 요건들을 전부 상실해버렸다. 삶의 근간이 소멸한 노인에게 남은 길은 유아기로 퇴행하는 것 뿐이다. 책임져야 할 아무런 역할도 없고, 따라서 이에 따라 결정되는 개인의 목적도 없는 미완성의 상태로 회귀하여 애타게 엄마를 찾는 노인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잔인하다. 결국 [더 파더]는 현대 사회에서 급격하게 붕괴하는 가부장제를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으로 빗대어 공격하고 있는 걸까. 기운 없이 스러져가는 세대의 그 아버지, 그 집. 시간은 그렇게 덧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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