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긴장하는가
[바쿠라우]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적 폭발의 다양한 양상을 최대한 거칠게 스케치하는 영화다. 그 모습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기인한 뒤틀린 분노로, 집단적 제의가 내뿜는 기이한 기운으로, 뜬금없이 표출되는 성적 욕구로, 무엇보다 무자비한 살육과 과잉의 폭력으로 변주된다. 이렇듯 통제할 수 없는 혼돈의 발생 원인을 굳이 분석해보자면, 표면적으로는 물론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원주민들의 본능적인 방어 기제를 꼽을 수 있겠다. 생활용수의 공급을 차단함으로써 주민들을 협박하고 대놓고 거만한 태도를 드러내며 표심 확보에 혈안이 된 토니 주니어의 모습은 영락없는 악한 권력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의 사주로 밝혀진 재래식 테러리스트들의 학살 행위는, 그 주체가 전원 미국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돈이 오가는 거래 행위가 바탕이 되었다는 것, 또한 이에 대응하는 주민들의 생활 양식이 대체로 전근대적인 형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원시 집단의 저항처럼 비추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본질을 이와 같이 간편하게 단정짓기에는 사뭇 모순적인 지점들이 두드러진다. 바쿠라우의 주민들은 전원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거나 아이들의 교육에 태블릿과 같은 현대 문물들을 활용하는 등 결코 문명과 동떨어진 집단이 아니다. 게다가 주민 중 일부가 버젓이 범죄를 자행해 왔고 심지어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민들의 대척점에 있는 테러 단체는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페셔널의 성격보다는 진심으로 살인 행위 그 자체를 즐기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막장 동호회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까, [바쿠라우]는 어떤 거시적인 담론을 제시하기보다 그러한 담론을 연상시키는 느슨한 얼개를 갖추어 놓고 이를 무대 삼아 마구잡이로 활개치는 영화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충동적인 광기가 자리한다. 영화를 통해 강렬한 쾌감을 느꼈든 무언가 찝찝한 불쾌함을 느꼈든, 이는 어디까지나 순전한 취향의 영역이다. 다만 시종일관 밀도 높게 형성된 거무튀튀한 공기가 자아내는 압도적인 서스펜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감히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