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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 Jan 13. 2024

죄와 삶

연극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4) 리뷰


※ 본 포스트에는 연극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석 달이 넘는 시간 부재하다 해를 넘긴 끝에 돌아온 이번 리뷰는 조금 특별하다. 나의 올해 첫 연극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오랜 친구가 배우로서 큰 역할을 맡은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혜화를 오랜만에 방문하기에 훌륭한 동기가 되었다. 덕분에 이틀 동안 혜화로 출퇴근을 했고,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었고, 친구들을 만났고, 눈을 맞았고, 이렇게 리뷰를 쓰기 위해 브런치에 쌓인 먼지를 후후 불어 털어냈다.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이다. 


연극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현역 고교 교사이자 극작가인 하타사와 세이고의 작품으로, 2008년 일본에서 초연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극단 신시가 세종M씨어터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처음 접한 작품이었고 사전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시놉시스와 캐스트를 확인했을 때는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소재가 학교폭력인데, 학부모와 교사만 등장한다는 점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실 작품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현시점 대한민국에서는 이 지점에 적잖은 시의성이 실리게 되었다. 지금껏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뉴스 앵커의 입에서 오르내릴 때 이토록 부모가 대두된 적이 또 있었던가. 


이 작품은 작가 하타사와 세이고의 어떤 '의식'에서 출발했다. 2006년 이지메(집단 괴롭힘)을 당하던 중학교 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가해 학생들은 반성하긴커녕 죽은 피해 학생을 조롱하고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더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래도 사람이 죽었다면 뭔가를 느끼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생각했다'며 창작의 계기를 밝혔다. 그러한 이 작품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가해 학생의 부모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또 낱낱이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앞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주로 이것이다. 




이미지 출처 도화지


삶이 졸렬해지는 순간


"우린 살아야 하니까."

이 작품에 나온 대사들 가운데 가장 괘씸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이거다. 대사는 이 작품에서 가장 살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 중 한 명의 입에서 발화된다. 다른 부모들이 모두 자식을 만나기 위해 흩어지고 초아의 부모만이 맨 마지막까지 남아 각자의 눈물을 쏟는다. 먼저 얼굴을 닦은 초아 모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고개 숙인 남편에게 서진의 장례식장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초아 부는 거절한다. "갈 수 없어. 우리 초아를 생각하면." 그리고 묻는다. "이상한가?" 그때 초아 모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이상하지 않아요. 우린 살아야 하니까." 초아 부는 "살아야 하니까" 그 말을 되뇌며 일어선다. 마침내 초아의 부모까지 빈 교실을 남겨두고 떠난다. 


초아 모는 시종 사건을 은폐하려 시도하고 담합하는 사람들, 특히 남편인 초아 부와 동창회장으로서 학교에 '기부'를 아끼지 않는 시아 모를 비꼰다. 언뜻 남편과 마찬가지로 교사인 입장에서 자신의 학급에는 학교폭력 따위 없다고 단언하는 그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돈으로 학교와 사건을 무마해 딸의 가해 행위를 덮으려는 시아 모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태도가 기인한 진실은 극의 후반부에서 밝혀진다. 초아 모는 이미 한 달 전부터 초아의 가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조소는 다름 아닌 자조였다는 것이다. 삶을 다짐하면서 그의 자조는 더욱 깊고 날카롭게 벼려져 양심을 베었을 거다. 


그러나 찢어진 부분은 필히 봉합될 것이다. 그게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면수심(人面獸心). 죄책감의 부재를 지적하는 작가의 의도가 이 부분에서 속절없이 무색해지는 것 또한 그래서다. 살아가는 것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시간은 사람을 지나가며 사건을 마모시킨다. 마음을 괴롭히는 뾰족한 것들 모두 무뎌지고 둥글려져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순간은 분명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람을 죽게 하고 살아있는 그들이 언젠가 맞이하게 될 순간이다. "살아야 하니까"라는 말은 마치 이 사실을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아주 건조하고 냉정하게. 


초아 모는 자조함으로써 그의 죄악감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 또한 시아 부모와 마찬가지로 기득권자다. 세라와 주리, 민아의 보호자가 자신의 딸만은 가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혹은 가해 사실을 정직하게 시인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각자 가진 약자성이 근거로 자리한다. 세라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로 학교폭력 피해를 당했던 당사자다. 주리의 가정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서진 모에게까지 도움을 받는 지경이었다. 민아는 조손 가정에 속해 있으며 사실상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조부모 손에 떠맡겨졌다. 가여운 내 자식이, 괴로움을 아는 내 자식이 다른 아이를 괴롭힐 리 없다는 것이 그들 보호자의 기제다. 


초아와 시아는 이들과는 형편이 다르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과 교사, 사업가 등이 갖는 사회적 지위, 부모 두 사람이 자식을 건사하는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의 가정. 자신이 가진 돈으로, 힘으로 얼마든지 부끄러움을 면제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렵게 딸에게 향하는 걸음을 뗀 초아의 부모도, 딸과 먼저 대화해 보고 필요하다면 학교 측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을 거라 말하는 시아의 부모도 어떤 식으로든 딸을 지켜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으니까. 서진의 죽음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못하니까.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살아야 하니까"에 뜨거운 짠물기가 있어도 도무지 처절함이 담길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비참해질 때


죽은 서진이 생전에 어떤 아이였는지는 극의 중반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는다. 서진을 가르쳤던 담임교사 서연주도 '서진은 거짓말을 할 아이가 아니다' 이상으로 증언하지 못한다. 결국 서진의 얼굴을 가린 흰 천을 벗겨내는 사람은 서진이 아르바이트로 근무했던 편의점 점장이다. 서진은 그가 발설하는, 얼굴엔 여드름이 많아 연고를 챙겨 발라야 했고, 몸은 빼빼 말라 볼품없었고, 가해 학생들에게 돈을 갈취당하다 강제로 원조교제까지 하게 되었다더라는 정보의 파편들로써 재구성된다. 그런 서진이 그를 만난 적 없는 우리에게도 아주 낯선 존재만은 아니다. 자식을 지킬 힘이 없는 부모 밑의, 평범함 혹은 그 미만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미적 기준 밖의 생김새, 작고 마른 몸, 죽음을 결심하고도 주변인들의 친절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상냥함, 아르바이트 매장 점장의 추궁에 못 이겨 피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터놓는 순진함까지. 서진은 의도적으로 느껴질 만큼 몰개성 한 요소들로, 또는 스테레오 타입대로 설정된 인물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결코 서진과 같은 피해자를 섬세하게 보듬어 주는 작품이라 할 순 없다. 서진을 꽤나 아낀 것으로 보여지는 편의점 점장의 행동만 보아도 그렇다. 그는 서진에게서 편지를 받고 곧장 학교를 방문하여 가해자 부모가 모인 것을 보곤 그들 자녀의 원조교제, 즉 성매매 강요 행위 사실을 폭로한다. 그 과정에서 서진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고민할 때 어른이 되면 더 예뻐질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땐 데이트해 달라고 고백(?)한 사실을 털어놓는가 하면, 가해 학생들이 서진을 협박하기 위해 찍은 서진의 나체 사진을 가해자 부모들에게 들이밀며 서진에게 사과하길 종용한다. 학생 주임 교사에게 서진의 편지(유서)를 넘기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고 홀연히 떠나는 그의 모습은 여러 모로 의아스러운 데가 있다. 원조교제를 '그 짓'이라며 길길이 날뛴 것과 어울리지 않게 성인인 자신의 (마냥 장난이라기에도 미묘한) 고백을 가해자 부모들에게 터놓는 것하며, 서진의 나체 사진은 대체 어디서 났단 말인가. 제 할 말을 마치고 자못 후련하게 떠나는 뒷모습은 이에 방점을 찍는다. 


하물며 서진의 모도 그렇다. 관 속의 서진이 목매달아 죽은 시체를 더러 떠도는 괴담과 달리 예쁘더라는 말로 입을 연 그는, 종국에는 죽어버린 서진을 원망하며 "너무해!"라고 소리치며 오열한다. 확실히 보편적으로 그려지는 어머니의 상과는 벗어난 반응이다. 남편 없이 홀로 서진을 키운 서진 모에게 딸은 어떤 존재였을까.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보루였을 테고, 의지하고 의지 되어야 할 유일한 가족이었을 테지만 어쩌면 혼자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는 삶을 더 무겁게 만든, 생명을 가진 짐이었을 수도 있었다. 서진 모는 "나 더 살아야 해?"라고 몇 번이나 묻는다. 곧 살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비통함만큼이나 마음에 빽빽이 들어찬 원망은 아마 이런 것이다. 나도 죽고 싶은데, 나만 남겨둔 채 이 삶에서 도망치는 거니? 


그렇지만 그 원망이 보잘것없게도 서진은 그리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죽고 나서도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나체가 까발려지고, 그의 인격과 행실은 산 사람들의 멋대로 훼손되고 날조된다. 오히려 체육복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책상에 낙서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서진을 짓누른다. 죽음으로도 서진을 향한 가해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연쇄의 연속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작품은 가해자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들의 추악한 이기본위와 비양심적인 작태를 적나라하게 늘어놓고 보여줄 뿐이다. 다만 작가가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의도했다면, 지금 시대에 이러한 악인들의 비양심선언과 악행 전시의 방식으로 관객들의 각성을 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학교폭력은 지켜줄 부모나 부모에게 힘이 없는 아이들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학교폭력은, 더 나아가 폭력은 그 자체로 범죄이고 사회가 극복해야 할 해악이다.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되는 이유는 좁게 보면 결국 나보다 강한 타인으로부터 날 보호할 논리가 해체되기 때문이고, 넓게 보면 그 누구도 약하다는 이유로 폭력의 피해를 입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이 이상(想)이라는 허울로 치부되어 망각되고 있지 않나. 당연히 사라져야 할 폭력마저 타인을 그곳으로 내몰아야 자신을 보전할 수 있다는 제로섬적인 시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초아 모는 여드름이 많다거나 하는 구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라고, 결국 괴롭힘 당해 마땅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뿐이라고 말하지만 단지 그뿐은 아니다. 서진과 마찬가지로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세라와 서진의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이다. 그 차이는 세라 모가 세라를 전학 보내온 것과 반대로 서진 모는 피해 사실조차 제때 인지하지 못하다 서진을 잃은 것으로써 여실히 드러난다. 작품은 이런 실재적인 불균형의 표현으로써 현실성을 다분히 의식하고 있는 듯하지만 거기에 그칠 뿐, 반(反) 폭력에 대한 보편타당한 메시지에서는 다소 멀어졌다. 더구나 그런 가해자들이 살아감을 운운하며 동병상련하고, 애도나 참회가 아닌 눈물을 보이는 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명백한 경계를 흐리는 시도로 비칠 뿐이다. 



젊은 배우들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리 모 역을 연기한 노유경 배우의 능란한 중년 여성 연기와 초아 모 역을 연기한 이은비 배우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비밀을 품은 채 자신의 남편이자 딸의 아버지인 초아 부를 바라볼 때의 그 불안, 경멸, 연민, 두려움. 이 모든 것이 잔에서 넘치기 직전인 물의 표면처럼 찰랑거리는 눈빛이었다. 노유경 배우는 관객들 중 상당한 이들이 납득할 만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다. 특히 좋은 발성과 또렷한 발음은 듣기에도 물론 좋았지만 지금과 앞으로 억척스러워져야 할 상황에 내몰린 주리 모의 상황과 결부되어 더욱 와닿았다.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에 모두 몇몇 부분 배우들이 대사를 더듬은 데에 아쉬움이 다소 남았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배우의 역량을 탓하기보단 다른 것을 논하고 싶다. 시아 모가 세라 모의 교내 흡연을 지적하며 담배와 라이터를 빼앗는 장면에서 "담배와 라이터."라고 거듭 요구하는 대사는 문어체의 말투로 일상적이고 현대적인 이 작품의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대사 군데군데 직역 수준의 일본어 번역 투가 드러났는데, 이왕 배경을 한국으로 현지화했다면 대사도 어느 정도 한국어의 어순과 어법을 반영해 수정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문장의 구조가 대사를 말함에 있어 자연스러움과 유려함을 방해한 요인이라고 여겨졌다. 






참고

1. 전성희, 김광보, 김영순, 김재선, 김정미, 백승무, 선우환 외. "토론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공연과이론, 2012.
2. 김문환. "연극 본격적인 일본연극들의 면모." 공연과리뷰, 2012.
3. 와타나베 히로미 집필, 오니가타 요시로/노오토 편집 기사. "戯曲『親の顔が見たい』作者・畑澤聖悟さんに聞く いじめを巡る言葉(연극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 작가 하타사와 세이고 씨에게 듣는 왕따를 둘러싼 말들)" 웹 미디어 크리스크 플러스, 2019. (https://www.tsuushinsei-navi.com/real/expert/6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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