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온도가 아니라 거리다

남극의 빙붕 가까이 따뜻한 바다가 다가오고 있다

by 지온

남극을 떠올리면 우리는 대개 위를 본다. 하얀 대륙, 얼어붙은 바다, 눈보라, 갈라진 빙하의 표면. 하지만 남극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는 변화는 종종 아래에서 일어난다. 바다 속에서, 그것도 얼음 밑에서.


남극의 얼음은 모두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륙 위에서 흘러나온 얼음 일부는 바다 위로 길게 떠 있다. 이것이 빙붕이다. 빙붕은 그냥 떠 있는 얼음판이 아니다. 뒤쪽에서 흘러내리려는 거대한 빙하를 붙잡아주는 버팀목이다.


이 버팀목이 약해지면 대륙 위의 얼음은 더 빠르게 바다로 흘러든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진다. 남극의 얼음은 남극에만 머물지 않는다. 녹은 물은 결국 전 세계 해안선의 높이를 바꾼다.


그래서 남극을 이해하려면 얼음의 표면만 봐서는 부족하다. 그 아래로 어떤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빙붕은 아래에서 녹는다


빙붕은 위에서만 녹지 않는다. 햇빛보다 더 조용하고 집요하게, 바닷물이 빙붕의 밑면을 녹인다.


남극 주변 바다에는 빙붕을 녹일 수 있을 만큼 따뜻한 물이 있다. 열대 바다처럼 뜨거운 물은 아니다. 하지만 얼음에게는 충분히 따뜻하다. 이 물은 표면에 있지 않고, 수백 미터 아래 깊은 곳을 흐른다. 과학자들은 이 물을 Circumpolar Deep Water, 줄여서 CDW라고 부른다. 의역하면 남극을 둘러 도는 깊은 바닷물 정도의 의미인데, 여기서는 그냥 ‘따뜻한 심층수’라고 부르자.


이 따뜻한 심층수는 오래전부터 남극 주변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물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가다.


보이지 않는 고리가 있다


지도를 펴고 남극을 본다. 흰 대륙 주위로 푸른 바다가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건 그 정도다.

하지만 그 푸른 바다 속에는 보이지 않는 고리가 하나 더 있다. 남극 대륙을 감싸고 도는 따뜻한 심층수의 큰 흐름이다. 실제 바다에서 이 선이 완벽한 원형의 고리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극을 둘러싼 바다 속에는 따뜻한 심층수가 분포하는 큰 구조가 있다.


이 따뜻한 물의 흐름은 오래도록 그곳에 있었다. 다만 지금보다 조금 더 바깥쪽에 있었을 뿐이다. 그 거리가 중요했다. 따뜻한 물이 있다는 것과, 그 물이 얼음에 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리가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다


2026년 4월, 학술지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케임브리지대와 스크립스해양연구소 연구팀은 지난 20년 동안 남극 주변의 따뜻한 심층수가 조금씩 남극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연구팀은 배를 타고 직접 관측한 바닷물 자료와, 바다 속을 떠다니며 온도와 염분을 재는 관측 장비의 자료를 함께 분석했다. 그 결과, 따뜻한 심층수의 경계가 평균적으로 해마다 약 1.3km씩 남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하루 단위로 보면 거의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속도다. 하지만 20년이 쌓이면 약 25km가 된다. 바다의 거대한 구조가 한 방향으로 그만큼 움직였다는 뜻이다.


물론 이 변화가 남극 전역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 속도와 방식은 달랐다. 어떤 곳에서는 차갑고 무거운 물이 줄어들며 자리를 내주고, 어떤 곳에서는 중간 깊이의 물이 밀려났다. 중요한 것은 세부 양상이 달라도, 큰 방향은 같았다는 점이다.


이미 있던 따뜻한 물이, 조금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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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온도보다 거리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식탁 위에 뜨거운 냄비가 있다. 냄비의 온도는 그대로다. 그런데 그 냄비가 조금씩 내 손 가까이로 미끄러져 온다. 위험은 냄비가 더 뜨거워져서만 생기지 않는다. 가까워져서도 생긴다.


남극 주변의 따뜻한 심층수도 그렇다. 이 물은 이미 빙붕을 녹일 만큼 따뜻하다. 문제는 그 물이 빙붕 아래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다. 남극 주변 바다가 전체적으로 더 뜨거워진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더 가까운 곳에서 열을 받게 되고 있다.


문제는 열의 총량보다 배치다. 같은 열이라도 멀리 있으면 배경이고, 가까이 오면 압력이 된다.


차가운 물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남극 주변 바다는 단순히 차갑거나 따뜻한 것이 아니다. 층을 이룬다. 표면에는 차갑고 가벼운 물이 있고, 그 아래에 따뜻한 심층수가 흐른다. 그리고 대륙 가까이에는 다시 차갑고 무거운 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차갑고 무거운 물은 일종의 문지기다. 따뜻한 심층수가 빙붕 쪽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보호막이다.


그런데 이번 연구는 따뜻한 심층수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일부 지역에서는 이 차가운 보호막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 따뜻한 물이 가까워지고, 동시에 그것을 막아주던 문지기도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문이 활짝 열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사건이 아니라 구조의 변화다


이 변화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빙산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어느 한 해에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뉴스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중요하다.


따뜻한 물의 고리는 안쪽으로 좁혀오고, 차가운 물의 문턱은 낮아지고 있다. 열이 빙붕 가까이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바뀌고 있다.


이건 하루아침에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바다의 배치가 조금씩 바뀌는 일이다. 말하자면 구조의 변화다.

연구팀의 분석에서도 이 남쪽 이동은 단순한 흔들림이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반복적으로 드러난 가장 큰 변화 패턴으로 나타났다. 아주 느리지만, 방향이 있는 변화라는 뜻이다.


구조의 변화는 천천히 오지만, 단기간에 쉽게 되돌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 남극 바다의 일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먼 곳의 일처럼 들린다. 남극 바다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물이 1년에 1km 남짓 움직인다는 말은 일상과 너무 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멀리 있지 않다.


빙붕이 약해지면, 그 뒤에 있던 대륙의 얼음이 더 빠르게 바다로 흘러든다. 그렇게 바다로 들어간 얼음은 해수면을 올린다. 해수면 상승은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다. 해안 도시의 배수, 항만, 지하 공간, 저지대 주거지, 태풍 때의 침수 위험을 바꾼다. 남극의 바다 속 변화는 결국 지도 위 해안선의 문제로 돌아온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선이다


남극은 겉으로 보면 여전히 차갑다. 얼음으로 덮여 있고, 바다는 얼고, 공기는 차갑다. 위성 사진을 봐도, 지도만 봐도, 작년과 올해의 차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 속에서는 선 하나가 움직이고 있다. 따뜻한 물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가리키는 보이지 않는 선이다. 그 선이 남쪽으로 조금 이동했다는 것은 단순한 위치 변화가 아니다. 열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는 뜻이다.


남극에서 중요한 변화는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붕괴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선들이 천천히 자리를 옮긴다.


지도를 다시 펴보자.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흰 대륙의 가장자리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바깥, 푸른 바다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옮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선. 남극의 미래는 어쩌면 그 선의 움직임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 Lanham, J. et al. (2026), “Observational evidence for a poleward migration of warm Circumpolar Deep Water towards Antarctica,”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

커버이미지: Tamsitt, V. et al. (2017), "Spiraling pathways of global deep waters to the surface of the Southern Ocean", Nature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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