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목소리를 켜다
10년 만에 속편 방영이 예고된 인기 드라마 <시그널>에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낡은 무전기가 등장한다.
"지지직... 이재한 형사입니다."
잡음 섞인 주파수를 타고 과거의 목소리가 전해지면, 현재의 형사는 멈춰 있던 진실의 퍼즐을 맞춘다. 빙하 속 공기방울도 그렇다. 오랜 시간을 건너, 과학자의 손끝에서 다시 목소리를 낸다. 이 목소리를 처음 수신한 과학자는 1960년대 남극의 추운 밤, 위스키가 담긴 잔에 오래된 빙하 조각을 넣자 "톡, 톡" 소리와 함께 녹은 얼음에서 작은 기포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관찰한 프랑스의 빙하학자 클로드 로리우스(Claude Lorius)로 알려져 있다.
빙하는 눈이 쌓이고 다져지며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빙하 부피의 약 10%에 해당하는 공기가 얼음 전체에 '이븐'하게 퍼진 기포로 갇힌다. 냉동실 얼음과 차별되는, 빙하를 빙하답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그 안에는 질소, 산소는 물론 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같은 온실가스와 기체 동위원소의 흔적까지, 그 시절의 대기가 그대로 봉인된다. 과학자는 빙하코어를 잘라 진공 용기에서 얼음을 부수거나 녹여 그 공기를 회수한다. 무전기의 전원을 켜고 과거의 주파수에 맞추는 순간과 닮았다.
<시그널>의 무전기에 항상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끼듯, 과거의 신호는 수정처럼 맑지만은 않다. 갓 내린 눈(snow)이 틈 많은 펀(firn, 눈과 얼음의 중간 상태)을 거쳐 공기가 완벽히 갇히는 단단한 얼음(ice)이 되기까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걸린다. 이 때문에 공기가 갇힌 시점과 그 공기를 둘러싼 얼음의 나이에는 미세한 시간 차가 생긴다. 연구자들은 여러 단서를 조합해 이 잡음을 정교하게 걷어낸다. 잡음이 사라져야 비로소 과거의 목소리가 선명해진다.
지구는 나이테, 종유석, 퇴적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를 기록한다. 하지만 빙하 속 공기는 그들과 격이 다르다. 그것은 과거 대기의 '실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기록들이 과거의 사건을 적어둔 '사건 보고서'라면, 빙하 속 공기는 사건 현장에서 녹음한 '육성 증언'에 가깝다.
남극 고원 돔 C(Dome C)에서 시추한 3km가 넘는 길이의 빙하코어 최하단에는 무려 80만 년 전의 공기가 갇혀 있었다. 과학자들은 그 몇 밀리리터(mL)의 공기에서 이산화탄소 농도를 백만 분의 일(ppm) 단위로 측정해 과거 대기를 복원했다. 지금 우리가 마시는 공기와 분자 하나하나가 같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온 공기. 오래된 육성 녹음을 재생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빙하 연구의 진정한 묘미는, 서로 다른 원리의 두 기록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킬 때 드러난다. 얼음 자체(물 분자)의 동위원소 비율은 눈이 내릴 당시의 '기온'을 알려준다. 동시에 공기방울은 당시 대기의 '온실가스 농도'를 직접 보여준다. 이 두 독립적인 기록은 놀랍게도 함께 오르내린다. 빙하기에는 기온이 낮고 이산화탄소는 약 180ppm, 간빙기에는 기온이 높고 이산화탄소는 약 280ppm. 두 기록은 온실가스와 기후가 서로의 손을 잡고 움직이는 파트너임을 보여준다.
지난 80만 년 동안, 지구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규칙적이었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차할 때마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180~280ppm 사이를 오가는 안정적인 리듬을 유지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이 평온한 리듬은 깨졌다. 인류가 화석연료를 태우며 내뿜은 이산화탄소는 단숨에 대기 농도를 420ppm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80만 년의 기록 어디에도 없던 수치다. 무전기 너머 고요한 목소리는 멈췄고, 이제는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80만 년은 인류에게 영원처럼 길지만, 지구의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과학자들은 약 100만 년 전에 거대한 전환이 있었음을 안다. 4만 년 주기로 반복되던 지구의 기후 리듬이 10만 년 주기로 길어진 것이다. 왜 지구의 맥박은 다른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을까? 그 거대한 전환의 순간, 온실가스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 비밀을 풀기 위해 과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얼음(Oldest Ice)'을 찾아 150만 년 전의 목소리를 수신하려 애쓰고 있다.
이 무전의 주파수는 이제 지구를 넘어 우주로 향한다. 목성의 위성 유로파와 토성의 엔셀라두스. 두꺼운 얼음 아래 거대한 바다를 품은 그곳 얼음 속에도 어쩌면 낯선 지질 활동이나 외계 생명의 희미한 목소리가 갇혀 있을지 모른다. 지구 밖에서 들려올 새로운 무전에, 과학자들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시그널> 속 무전기가 현재를 바꾸었듯, 빙하 속 공기는 기후 이해의 판을 바꾸었다. 과거 대기의 실체를 확인했고, 온실가스와 기후의 긴밀한 연결을 입증했으며, 지금 인류가 맞닥뜨린 전례 없는 대기 조성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나아가 미래 기후를 예측할 토대도 마련했다.
만약 우리가 과거로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면, 100년 전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까?
혹은 100년 후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에게 목소리를 건넨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