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퐁네프의 연인들 (레오 까락스, 1991)
0.
자정 무렵의 텅 빈 도시는 일종의 공허함을 품고 있다. 대낮의 붐비던 거리가 소위 잘 나가는 그들의 시간이라면, 조용한 야밤의 도시는 아웃사이더들의 시간이다. 조명뿐인 터널을 지나 막을 내린 도시를 걷는 두 남녀. 확실한 아웃사이더들이다. 텅 빈 도로를 거니는 불안정한 그 5분의 시퀀스가 <퐁네프의 연인들>의 시작이다.
다리를 절룩이는 남자와 화구통을 든 여자. 불완전한 두 사람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그 주위를 맴돈다.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도시의 숨겨진 주인, 아웃사이더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속에 놓인 두 부랑자에게서 흥미롭게도 다른 것들이 보인다. 남자는 불, 여자는 어둠이다.
1.
미셸의 눈은 점점 멀어가고 벌써 작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학습된 규칙이 적용되던 자신의 일상은 어둠에 잠식되기 시작했고, 그녀는 도망치듯 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과거에 허덕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겁 많던 그녀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여자는 어둠이다.
알렉스는 거리에서 자랐다. 누구도 그에게 규칙을 정해준 적 없었고, 감정의 학습 또한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수면제를 받아 들고 폐쇄된 다리 위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남자. 그런 남자 앞에 그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를 위해 남자는 불을 밝히고, 불을 뿜고, 불을 지른다. 남자는 불이다.
2.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질감은 그들의 사랑에서도 느낄 수 있다. 여자가 떠날까 불안에 빠져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그녀의 수배 전단에 불을 지르는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은 타오르는 불꽃의 원초적인 이미지이다. 반면 여자에게 사랑은 어둠 속 렘브란트의 그림 앞 작은 촛불에 기댄 여자의 모습처럼 구원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크기와 형태를 지닌 그들의 사랑도 잠시 닮아 가는 순간이 있다. 잠이 든 척 다시 수면제를 꺼내는 남자와 술에 취해 내키는 대로 춤을 추던 여자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남자에게 사랑은 경험해본 적 없는 규칙을 세워가던 과정이었고, 여자에게는 사랑은 규칙들을 무너뜨리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순간을 부정하는 그녀의 문장만을 남겨둔 채 어둠은 작은 불꽃을 포개어 홀연히 사라진다.
3.
불꽃이 터지는 파리의 밤하늘 아래 난간을 구르고 제 멋대로 춤을 추던 두 남녀와 빠른 속도로 센느 강을 가로지르던 그 순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해변을 달리던 실루엣과 뱃머리에 몸을 기댄 채 파리에 작별을 고하는 엔딩까지. 이 감각적 체험의 순간들을 지나고 나니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누구의 사랑이 맞나, 되짚어보면 원초적인 그 남자의 사랑이 맞다고 한다. 누구의 현실이 맞나, 되짚어보면 기회주의적인 그 여자의 현실이 맞다고 한다. 그럼 현실 속 사랑은 무엇이 맞나, 되짚어보면 불꽃과 같던 두 사람이 뒤엉켜 물속에 풍덩 빠지는 핑계 같은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모르겠다.
글_ 최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