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부모님을 떠나 혼자 출국했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캐나다 밴쿠버로 향하던 비행기에 올랐을 때였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쓰여진 당시의 일기장을 열어보면 매일같이 엄마가 보고 싶다는 내용만 가득하고, 실제로 인터넷 전화로 매일같이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며 전화했던 기억도 있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해 놓고, 떠날 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떠나 놓고, 낮에는 밴쿠버에서 세상에서 제일 신나게 잘 놀아 놓고, 해가 지기 무섭게 엄마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곤 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세 살의 나는 또 스스로의 선택으로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도 역시 혼자였고, 떠날 때는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떠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울었다. UM서비스 없이 혼자 탄 첫 비행기에서 나는 심하게 멀미를 했고 – 이때의 트라우마로 나는 지금까지도 기내식을 잘 못 먹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 열두 시간 정도 되는 비행 후 한껏 수척해진 채 공항에 내린 나를 기다리는 건 커다란 검은 개와 커다란 마오리족 경찰관 아저씨였다. 마약류 검사였겠지만 열셋의 나는 그저 그 커다란 개가 무서웠고, 그래서 달아났고, 경찰은 그런 내가 미심쩍었을 테고, 나를 쫓아와서 내 여권을 요구했고 내 캐리어를 열었다. 덕분에 입국수속이 두어 시간 늦어졌고, 나를 데리러 왔던 보호자 분과의 일정이 어긋나 버렸다.
입국수속장을 벗어나서 나갔을 때 보호자 분은 나를 기다리다 결국 다른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러 이미 떠난 상태였고, 겨우겨우 와이파이를 찾아 엄마와 연락이 닿은 나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십몇 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처음 가는 나라에서 안 그래도 무서워하는 개에게 붙잡혀 있었으며,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고, 혼자였고, 모든 게 두려웠다. 공항에 앉아서 보호자 분을 기다리던 그다음 두어 시간도 정말 지쳤던 기억이 난다. 첫 입국에서 액땜을 전부 한 덕분인지 그 이후로 스물두 살 때까지 계속된 유학생활에서 나는 셀 수 없이 입국장을 들락날락했음에도 – 심지어 코로나 시국에도 여러 번 입출국을 반복했지만 – 단 한 번도 겁먹거나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이 때 오클랜드에서의 생활은 밴쿠버 때보다 몇 년정도 성장한 탓이었는지, 감기로 고생하고 아팠던 며칠을 제외하면 많이 울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홈스테이 가정에서도 잘 지내고 행복했으며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매일같이 전화하거나 일기장 가득 엄마가 보고 싶다는 내용으로 가득 채우지 않았다. 당시 홈스테이 엄마는 통가 분이셨는데, 내가 아플 때면 신라면을 끓여 주셨다. 다만 그 방법을 잘 모르셨는지, 국물은 하나도 없었고 면발은 팅팅 불어있는, 뭐랄까, 볶음면 같은 비주얼이었다. 아픈 와중에도 차라리 스크램블 에그를 먹고 싶다고 속으로 불평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인터넷이 엄청 느렸던 때라 유튜브 영상 하나를 트는 데 한 시간씩 걸리기 일쑤였기 때문에 홈스테이 가정의 삼 남매였던 모니카, 피터, 투포우와 나는 마당의 나무를 타고 놀았고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바닷가나 놀이터로 향했다. 피터와 투포우는 집 앞의 초등학교에, 나와 모니카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의 중학교에 다녔는데, 우리는 하굣길에 항상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피터와 투포우가 한 방에 살았고, 나와 모니카는 각방을 썼는데, 우리는 밖에서는 함께 잘 놀았지만 집에 오면 책을 읽거나 할 일을 하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한국에서는 한창 카카오스토리를, 뉴질랜드에서는 처음 인스타그램을 시작할 때였는데, 가끔 동네 도서관에 가서 와이파이에 연결될 때면 두 계정 전부에 행복한 게시물만 잔뜩 올리곤 했다. 뉴질랜드에서 중학교 생활을 해보고 한국에 돌아온 후 국제학교 진학을 결정한 것도 내 스스로가 뉴질랜드에서 너무 행복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고, 기숙사에 혼자 살아도 독립적으로 잘 살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제주도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이후에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꾸준히 잘 살아냈고, 매 번 방학이 끝날 때마다 공항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떠났다. 엄마는 매 방학이 끝날 때마다 그게 장하면서도 조금 서운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9월, 처음 도쿄로 향하던 날에도 나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 마냥 설레여했다. 방학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확실치 않아 처음으로 왕복이 아닌 편도 티켓을 끊었는데, 한국-뉴질랜드보다 훨씬 가까웠어서 그랬는지 전혀 긴장되지도 않았고 실제로 영화 한 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에 착륙했을 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기내식은 왜 주는 걸까, 하면서.
도쿄에서의 2018년도, 2019년도 즐거웠고, 행복했다. 일본어를 처음부터 배우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고등학교 때와 비교하면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졌기에 나는 놀러 다니느라 정말 바빴다. 도쿄 내에서 뿐 아니라 일본 곳곳을 여행하기도 했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해외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며,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혼자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꿈꾸던 대학생활이었다.
2020년 초, 코로나19 가 스멀스멀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고 나는 2학년 1학기를 마친 겨울방학에 도쿄대-서울대 학술교류 동아리 활동을 위해 서울에 일시 귀국해 있었다. 일주일간의 서울 세션을 마친 후 대학 동기 세 명과 함께 프랑스를 2주간 여행했는데, 첫 일주일의 파리 일정을 마치고 우리가 남프랑스로 내려갔을 때 파리의 모든 관광지가 코로나로 인해 폐쇄되었다. 프랑스에서의 2주 여행을 끝내고 나는 한국으로, 동기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우리는 처음 마스크를 썼고, 나는 그 이후로 일 년 이상 동기들을 볼 수 없었다. 코로나가 심각해지며 내 일본 비자에 문제가 생겼고, 나는 도쿄로 돌아가지 못하고 3학년 2학기가 시작할 무렵까지 한국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게 된다.
예상치 못한 한국에서의 생활은 곧 초등학생 때 이후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장기간 생활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물론 불편한 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족들과 같이 사는 건 생각보다 좋았다.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인사를 받아줄 부모님이 계셨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집에 혼자 있지 않았다. 티비를 보더라도 함께 볼 사람이 있었고, 밥을 먹더라도 함께 먹을 사람이 있었다. (채널이나 메뉴를 가지고 동생과 싸우는 일도 종종 있긴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동안 외로워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혼자 살아내면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무언가를 일본어로 번역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편하게 말하고 알아들을 수 있었고, 여기서는 서류나 비자 문제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프면 쉽게 병원에 갈 수 있었고, 부모님이 나를 챙겨줄 수 있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은행업무를 보러 다니고 구약소에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혼자 아프면서 서러웠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비자 문제가 전부 해결되어서 도쿄로 돌아갈 날이 확정되었을 때, 나는 울었다. 출국날이 결정되었을 때, 출국이 두려워서 운 건 처음이었다. 아무 겁 없이 밴쿠버로 떠나던 초등학생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고작 두 시간 거리인, 그것도 이미 살다 온 장소인 도쿄로 돌아가는 게 무서워서 울고 있었다. 영어가 통하지 않을 걸 잘 알아서 두려워했고, 일 년 정도를 떠나 있던 학교가 변해있을까 봐 두려워했다. 일본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가본 적 없는 장소였던 것도 아닌데도 나는 두려워하며 울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무서웠던 건 다시 혼자 사는 거였다. 내 안의 외로움이 성장해 있었다. 출국 11일 전일기에 이렇게 써 놓았더라.
"[...] 사실 제일 무서운 건 다시 혼자 사는 거다! 중학생 때부터 혼자 살았었기 때문에 별 두려움 없었는데 코로나로 몇 년 만에 집에서 가족들이랑 생활하고 나니까 하루가 끝나고 집에 돌아갔을 때 아무도 없는 깜깜하고 좁은 기숙사 방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너무 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싫어.
이제까지는 가족이랑 같이 오래 지낸 적도 없고 그냥 방학 때 잠깐 머무르는 게 전부였고 내가 주로 생활하는 곳은 나 혼자 사는 해외였고, 가족이랑 같이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거의 까먹고 있었어서 겁도 없었고 힘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같이 사는 거에 익숙해져서 다시 혼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너무 싫어.
[대학생활의] 마지막 여름이라고 생각하면 일본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생활한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집에 가고 싶다. 혼자 살 생각만 하면 엄마 옆에서 떨어지기 싫은 게 그냥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초중학생] 때는 울지도 않고 혼자 지구 반대편도 잘 갔는데.
[...]
이제까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기숙사를 그냥 home이라고 불렀는데 진짜 home에 살아버려서 이제 그것도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도쿄에서 혼자 지낸 마지막 2년 동안 나는 내 전체 유학생활을 통틀어서 가장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매일 밤 요요기우에하라역에서 자취방으로 향하는 8분여의 도보는 항상 무거운 발걸음의 연속이었고, 열쇠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불 꺼진 방이 나를 마주하면 나는 매 번 좌절했다. 자취방에 친구들을 자주 초대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옆 동네의, 옆 도시의, 옆 나라의, 혹은 지구 반대편의 가족, 친구들과 몇 시간이고 보이스톡을 하거나 페이스타임을 하는 습관도 생겼다. 화장을 할 때도, 요리를 할 때도, 닌텐도 스위치를 하거나 웹서핑을 할 때도 혼자 하는 것보다 누군가와 전화하며 하는 것이 좋았다. 그만큼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만큼 혼자라는 사실이 싫었다.
가족과 함께한다는 것의 가치를 몸소 느낀 이후의 나는, 외로움을 참 많이 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립적이었던 이방인의 속에 내재되어 있던 외로움이 코로나라는 강제적 환경에 의해서 발현하고 성장한 것이다. 나는 성장했으나 내 외로움도 성장했다. 나는 독립적이었으나 외로움을 참 많이 타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