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되기는 쉽지만 현지인이 되기는 어렵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소수였다. 마이너리티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유학을 결정한 순간부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선택적 이방인이었다. 어쨌든 내 선택이었고, 좋든 싫든 살아남아야 했다.
8년여의 유학을 마치고 완전 귀국을 택했을 때, 집이 되어줄 줄 알았던 한국은 생각만큼 나에게 집이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서울에 연고가 없었고,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혼자였고, 여전히 외국에서 온 사람 그뿐이었다. 완벽한 타지인은 아니었지만 완전한 “우리”의 일부는 되지 못했다. 국제학교 – 해외 고교 – 해외 대학이라는 내 학력은 나를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오클랜드에서, 도쿄에서는 내 여권의 색깔이 달랐기 때문에 내가 이방인인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지만 내가 “그들 중 하나” 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서울에서도 이방인이라니.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나였고 꾸준히 소속감을 갈망하던 나였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온 첫 해, 내가 느껴야 했던 그 상실감과 실망감은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꽤나 자주 그리고 꽤나 주기적으로 즐거운 기억들이 가득했던 유학시절을 추억하곤 했다. 오히려 내 자신이 이방인인 게 당연했던 시절이 훨씬 마음이 편했고 훨씬 행복했던 것이다.
오클랜드 시티 한복판에서 걷던 열다섯의 내가 술에 취한 – 혹은 마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마오리족에게 이마를 얻어맞고 이유 없이 욕을 들어야 했을 때도, 도쿄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던 열아홉의 내가 동기에게 뜬금없이 정치적인 질문을 듣고 당황했을 때도, 나는 어차피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고 별로 상처받지도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스물 두 살의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공부한 사람들이 가득했던 신림동 고시촌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고시공부는 일 년여 만에 금방 관두긴 했지만 공부가 힘들었던 것만큼 나에게 충격을 준 건 고시촌의 사람들 역시 때때로 나를 외부인으로 여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농담이셨지만 학원 선생님은 나를 동경소녀라고 부르셨고 학원 사람들이 각자 학교에서의 엠티, 축제, 술자리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외국에서 친구들이 나에게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물어왔듯 한국 친구들은 이제 나에게 뉴질랜드와 일본 문화, 영어와 일본어를 물어왔다. 나는 종종 그들이 나를 그들과 다른,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외국에 혼자 살던 몇 년 간 나는 여행자는 아니었다. 돌아갈 집이 타지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 물론 본가는 계속 한국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곳이 내 “집”은 아니었다. 실제로 중간에 몇 년 간은 본가에 내 방이 아예 없기도 했고 - 아무튼 나는 몇 년 이상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이었고 내 삶의 터전이 그곳에 있었으니 완전한 타지인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그렇겠지만 여행자도 아니고 현지인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수많은 시간을 지내왔다.
기꺼이 이방인이 되기로 선택한 건 나지만 가끔 정말 별 거 아닌 것들이 쌓이고 쌓여 터지는 날도 있었다. 이 땅엔 나의 가족도 없었고 나의 집도 없었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가야 하는 뚜렷한 목적이 흐려지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지치는 날이면 종종, 길을 잃은 아이가 되기도 했다. 이방인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타지에서는 핸드폰을 개통하는 것, 자취방에 인터넷을 설치하는 것, 병원에 가는 것, 건강보험이나 세금 관련해서 구청에 다녀오는 것, 은행 업무를 보는 것과 같은 일상의 무게가 더 버겁다. 아주 사소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그 버거움이 심연이 되어 나를 덮치고 나는 물 밑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그럴 때면 더 이상 이방인이고 싶지 않았다.
도쿄에 산지 3년이 조금 넘었을 때, 다니던 댄스 스튜디오에서 강사분께 처음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 이름이 일본인의 이름이 될 수 있다 보니 십여 분 간을 자연스럽게 대화하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은 채 출신지가 어디냐는 대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제서야 한국인이라고 하니 강사분께서 혼혈이냐고 되물으셨고, 한국인 유학생이라고, 일본 온 지 이제 3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놀라시며 그냥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당연히 이름이 일본어로도 자연스러운 이유도 크겠지만, 내가 언어적, 문화적으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산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취미로 아마추어 밴드에 들어갔다. 당시 나는 한국 인디 밴드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제이팝과 제이락, 영미권의 락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같은 팀이 된 멤버들은 한국 밴드의 노래들을 연주하고 싶어 했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한국 밴드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한두 달 정도 매주 만나서 합주하고 놀고 친해지면서 그들의 노래 취향을 알아갔고 나 역시 그 밴드들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 취향도 그들 사이에 스며들며 변해 갔다.
이방인으로 살기로 내가 선택했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녹아들고 그 도시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일부”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항상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소속되고 싶고, 안정감을 찾고, 이제는 정착하고 싶은 욕구.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도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내가 영원히 머물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몇 년 후면 떠날 곳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회문화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머무는 장소는 일시적인 곳이었고, 따라서 내 에너지를 소모해 가며 내 자신을 이 장소에 정착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 미적분이나 복잡한 수학 계산이 어려울 때, 혹은 사람들과 얘기하다가 모르는 속담이 나왔을 때, ‘나는 한국에서 학교를 안 나왔으니까’ 하고 스스로를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과 다르게 취급했다. 그냥 정당화였을 수도 있지만 한국에 사는 동안 그러한 행태가 반복되다 보니 내 안에서도 내가 어느 정도 이방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내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십 대에서 이십 대 초반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나도 모르는 새 그러한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내 관성이 되고 버릇이 되어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취직을 준비하면서도 나는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생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김영하 작가님의 에세이집 <여행의 이유>에 작가님이 이 년여간 뉴욕에 체류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그러나 거기에 내 그림자는 없었다. 곧 자리를 털고 떠날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사회에 아무 책임도, 의무도 없었다.”
바로 그거였다. 나는 뉴질랜드에서도, 일본에서도, 심지어 한국에서도 스스로를 그냥 구경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자리를 털고 떠날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고 있지 않았고, 붕 뜬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게 내 관성이었고 습관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거나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제주에서도, 오클랜드에서도, 도쿄에서도, 그리고 서울에서도 행복했고, 지인과 친구를 만들어서 적응했으며, 내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었다. 다만 완전히 발을 붙이진 못했다. 집이 아닌 기숙사나 일 년 단위의 단기적 계약에 묶인 자취방에 살았다. 굳이 거리를 두고자 하지 않았으나 굳이 정착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항상 어느 정도 붕 떠 있는 존재로 남았다.
그러기를 십여 년, 실질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인생의 시간 속 나는 대부분 붕 뜬 존재였다. 어디서든 붕 뜬 존재로 살아가자니 내 스스로가 이제는 불안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 있어도 안정적이지 못했고 마음을 놓지 못했다. 조금씩 안정감과 소속감을 더 열망하게 되었고, 나에게도 돌아갈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서울을 내 돌아갈 자리로 삼아보려고 하는 중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그 선택지는 물론 아직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에서 살아오고 자라온 경험은 내 안에 존재하고, 언제든 다시 나가고자 하면 나갈 수 있을 테지만, 한 곳에 정착해서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이 여느 때보다 강하다.
이방인으로 살아가기는 쉽다. 언젠가 어딘가로 다시 떠나면 나는 다시 이방인이 되어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현지인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한두 해 정도로 되는 게 아니다. 다년의 경험과 인생이 녹아 있을 때 당신의 도시는 당신을 비로소 그들의 일부로 바라봐 줄 것이다. 나는 이방인으로 살기로 선택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