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회사에서 문순이 마케터의 균형 찾기
낯설고 어려운 산업이 막상 겪어보면 나에게 더 잘 맞는 산업일 수도
경제학을 공부했을 때 가장 자주 등장했던 용어 중 하나는 균형이다. 경제학자들이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균형을 이탈하면 뭔가 문제가 발생한다.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익숙할 동아시아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미중무역분쟁과 같은 현실 세계의 굵직한 거시경제학적 위기들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을 벗어났을 때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경제학과는 일견 무관해 보이는 기술회사에 입사한 나는 또다시 균형을 생각한다. 정보전달과 브랜딩 사이의 균형, 회사와 나 사이의 균형. 나 스스로의 균형까지.
엔지니어가 절대 다수인 이 회사의 풍경은 나에게는 참으로 생경하다. 회사에서 보고 듣는 용어에서도, 회의할 때 마주치는 너무나 새로운 관점에서도, 고객 문의 내역에서도. 이 회사에서 문순이이자 마케터라는 소수자인 나는 엔지니어의 언어와 방식으로 기울어져 있는 이 회사의 면면을 절감한다.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회사에 다니면서 얻은 수확은 나 역시도 얼마나 반대편으로 지독하게 기울어져 있는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지금껏 나 자신이 균형 잡힌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현실과 흥미 사이에서 타협하여 경영학을 전공했고, B2C 마케팅과 현실 사이의 타협으로 B2B 마케팅을 선택했고, 뭐 그런 것들. 그러나 나 역시 호불호가 있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있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이었던 거다. 항상 주류라고 느껴졌던 경영학을 전공한 나. 전직 홍보대행사 AE이면서 담당 고객사 특성상 서비스 파악이 어렵지 않았던 나. 그런 내가 기울어져 있는 사람임을 이제 안다. 그래서 이쪽으로 기울어진 누군가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할 이 회사의 기술 제품이, 이 회사의 기술 용어가, 이 회사의 엔지니어 위주의 문화가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나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광동어와 홍콩인에 둘러싸여 홍콩에서 일하던 때보다 사실 가끔은 이곳이 더 낯설고 외롭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술로 기울어진 회사와 브랜딩·대중 커뮤니케이션 쪽으로 기울어진 나는 최악의 궁합일까? 글쎄. 공학적 배경이 전혀 없는 내가 엔지니어들과 일하는 낯선 환경에서 낯선 기술 제품을 마케터라는 소수 직군의 입장에서 배워가며 일하는 건 스트레스이면서 동시에 재미있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협업하여 파는 방법을 고민하게 해 주니까.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매일 신선하고 새로운 자극을 받으며 조금은 덜 기울어진 내가 되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탈균형 상태로 안주하려는 관성을 벗어나 낯설고 어렵더라도 균형을 찾아가는 이 과정이 나는 즐겁다.
또한 균형을 찾는 과정은 사실 우리 삶 그 자체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상충하는 둘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고 싶어 하는데 그게 바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균형을 달성하는 건 원래가 어렵다. 심지어 동시에 달성하려는 목표가 세 개일 때 거시경제학은 불가능한 삼위일체를 제시하며 "고갱님 그건 안됩니다. 하나는 포기하셔야 돼요."라고 알려준다. 이렇게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는 무척이나 고통스럽지만 우리의 인생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문순이도 기술회사에 잘 다닐 수 있고, 새롭게 겪어 보는 산업이나 직무가 알고 보면 본인과 궁합이 제일 잘 맞는 분야일 수도 있다. 이런 극과 극의 조합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균형이 우리 인생을 더 역동적으로,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