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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WJ Feb 19. 2016

일탈을 꿈꾸고 있는 이들에게

결국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리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난 자유롭고 싶어
그래
할말은 하고 살고 싶어

다른 나라라도 날아가고 싶어
일이라도 때려 쳐버리고 말야


일을 하기 싫어
기계처럼 일만 하며 고장 나기 싫어
Yeah
난 그러고 싶어
그게 나쁘던 좋던 말야

난 그냥 깨 부시고 싶어
깨 부수고 싶어
깨 부수고 싶어
깨 부수고 싶다고
꿈꿈꿈꿈꿈 깨
깨버리긴 싫어
깨버리긴 싫어
깨버리긴 싫다고
꾸 꿈 깨긴 싫다고
꿈꿈꿈꿈꿈꿈꿈

내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
그런 사람 여기 없어?

- Beenzino [Break] -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들 모두는 항상 일탈을 꿈꾸며 살고 있다고.

평온한 삶과 행복을 위해 열심히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그 친구도, 로스쿨을 다니며 밤낮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 친구도 사실은 모두 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일탈을 꿈꾸고 있다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일탈을 꿈 꾸고 있을 거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영화나 소설에서 일탈이란 주제를 많이 다루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일탈들의 양상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렇다. 나도 일탈을 많이 해본 편은 아니다. 깨 부수고 싶지만 깨버리긴 싫어서. 나도. 진정한 일탈러들과 함께하기엔 스스로가 너무나 쫄보거든.

내 인생을 통틀어서 일탈이라 해봤자 한 열손가락 안에 꼽을 건데 그 중에 그래도 일탈하면 머리속에 딱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의 추억들도 벌써 10년 전 일들이라 대부분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이지만 타의적 일탈이 돼버렸던 내 고3 때의 포커 사건은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명료하게 각인되어 있다. 당시 담임 선생님 (김드래곤이라 부르겠다.)은 고3인만큼 반 분위기를 공부하는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엄격하게 다스리고 싶어했다. 축구, 농구도 못하게 하고 그 숨막혔던 분위기가 참 싫었던 나로서는 김드래곤의 눈밖에 나는 것은 자연스런 절차였다. 고3 동안 그에게 난 꽤 미움을 받았더랬다.


타의적 일탈은 아주 더운 여름날의 모의고사 날 모든 일들이 운명적으로 맞물리며 내게 다가왔다.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영어시험을 보기 때문에 김드래곤은 점심시간을 단축시키고 싶어했더랬다. 정시보다 20분 먼저 들어와 마음을 차분히 하고 앉아있어라가 명령이었고 나는 옆반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포커를 치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고 한창 친구들의 슬리퍼를 따고 있었던 차라 그의 명령을 까먹어 버렸다. 우리반 아이들은 나 빼고 다들 앉아있었고 갑자기 뒷문이 쾅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와 함께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었고 날 째려보던 김드래곤 손에는 매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김드래곤은 나를 체벌하지 않았다.


모의고사를 보는 도중에 혼자 학교에서 쫓겨나본 사람이 그 동안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중에 한명이 돼버린 나였다. 김드래곤의 " 짐 싸고 당장 나가" 란 차가운 한마디에 내 머리 위로는 어떻게해서라도 남아서 마저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빌어봐야 하나란 선택지와 그래 바로 이 때야 원하는대로 꺼져주자 꼴도 보기 싫은 시험 따위에서 탈출하는거야란 선택지 두개가 맴돌았다. 순진했던 나는 양심의 가책에 따라 그에게 한번 더 간청했으나 역시나 김드래곤은 냉정했다.


그러나 우선 이 일이 내 손을 떠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다란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교문 밖 쨍쨍 내리쬐던 햇빛 아래서 그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무한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길 위엔 아무도 없었고 정오가 갓 지난 여름 햇빛은 너무나 밝고 따뜻했다. 모든 걱정거리들을 환하게 비춰 녹여버렸고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싹다 날려 증발시켜 줘버렸다. 어느새 날 괴롭혔던 국사 시험 반타작은 더 이상 '25점밖에' 가 아니라 '25점이나'로 변해있었고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는 내 몸을 휘감았다. 심지어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은 김드래곤에게 고마움 언저리 같은 것도 느끼게 해주었으니 해방감의 에너지는 얼마나 강력했던가. 그것은 타인에 의한 일탈이었지만 또 답답했던 질식의 고3 생활으로부터의 휴식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보니 이제는 햇빛이 너무 뜨거워져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다.

달달했다. 모든 것이.

아이스크림을 끼고 걸으며 피씨방을 가볼까. 혼자가봤자 뭐하나. 당시엔 잠이 늘 고팠던 때라 그냥 집에 가서 퍼자고 싶은 생각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으며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어느새 역앞에 도착해있었고 집에 가서 누가 있으면 뭐라 말하지하며 일단 집에 한번 전화를 해봤다.


바보같은 통화 한번으로 내 일탈은 끝이나 버렸다. 그 때 난 내가 혼날 줄 몰랐다. 내가 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에선 화산 마그마가 터지는 것 같았다. 그 때만큼 화나신 어머니를 본적이 없을 정도로. 하여튼 귀를 데일 뻔한 어머니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용서를 빌기 전엔 오늘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말라는 최후 통보를 받고 나는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일탈을 위한 일탈의 끝은 현실이었다.


통화 한번에 모든 것이 다시 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용서라면 빌만큼 빌었는데 말이다. 그 명령을 내가 까먹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포커를 치는 중간까지만 해도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반 애들 또한 복도를 지나치며 나를 불러준 얘가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 또한 믿기지 않았다.

아냐. 내가 잘못은 했지만 이건 명백한 학습권 침해라고. 가서 뻔뻔하게 따져볼까. 그러면 영원히 쫓겨날 수도 있겠고. 애초에 집에 전화를 왜 했을까.


결국 나는 모의고사 시험이 끝날 때까지 반 앞에서 서성거렸고 혼자 밤까지 나머지 모의고사를 풀고 돌아갔다.


타의적 일탈 말고 성인이 된 후 내 자의적 일탈들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기엔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27살이 되면서 가장 최근의 일탈에 대해 말해보자면 학기 마지막 시험을 끝내자마자 누구와도 상의없이 질러버린 그 때 그 태양빛의 Repsol이 있겠다. 가족들의 걱정이 심해서 조만간 다시 팔아야 하겠지만 이 놈을 타고 달리는 기분은 자유란 한단어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Morel Audio 스피커가 튜닝된 스포츠 세단을 타는 것보다 나는 바이크 타는 것이 더 좋다. 도로위에 무한한 자유, 남자들의 일탈을 대표하는 바이크. 이보다 더 가성비 좋은 일탈이 어디에 있을까.


일탈은 눈부신 태양 같다.


영화나 소설에서 일탈은 오렌지가 아닌 종종 레드로 표현 된다. 대표적인 것이 [매트릭스]의 Red Pill vs. Blue Pill 인데 영상을 한번 보자. 참 임팩트 있는 영상미다.



> Do you believe in fate, Neo?
-   No.

> Why not?
-  Because I don't like the idea that I'm not in control with my life.

> I know exactly what you mean.
   Let me tell you why you're here. You're here because you know something. What
   you know you can't explain. But you feel it. You've felt it for your entire life. That
   there's something wrong with the world. You don't know what it is, but it's there.
   Like a splinter in your mind. Driving you mad. It is this feeling that has brought you
   to me. Do you know what I'm talking about?

- What truth?
> That you are a slave, Neo.
   Like everyone else you were born into a bondage, born into a prison that you
   cannot smell or taste or touch. A Prison for your mind.  

모피어스가 위에서 언급한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럴 때 일탈을 꿈꾼다. 지금까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해왔던 일들이 그것이 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어느새 뭔가가 잘못되어있다고 느껴질 때 말이다. 가끔씩 무조건 반대로 생각해봐야 답습된 사고의 틀을 깨뜨릴 수 있고 그 틀밖에서 그동안 생각치 못했던 시각을 갖출 수 있게 된다. 내가 바이크를 구매한 것도 그랬었다. 지금까지 서울에 살면서 수업에 지각하거나 약속 시간에 늦었던 것이 과연 나만의 문제였던가. 어쩌면 그것들의 9할 정도는 사실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빚어진 심각한 교통체증 탓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된 것이었다.  바이크는 교통체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 방법처럼 느껴졌다.


네오는 망설임없이 빨간 알약을 집어 먹는다. 그렇게 그는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같은 상황이라면 과연 몇명의 사람들이 빨간 약을 선택할 수 있을까.

네오는 매트릭스의 세계를 탈출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선택받은 자'로서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이었다. 매트릭스와는 또 다른 현실, 어쩌면 더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네오는 감당할 수 있었다. 모피어스와 동료들을 배신했던 사이퍼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일탈은 또 다른 책임감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는 일탈을 한 것을 후회했었고 그래서 그 전의 자신으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Life;  Dedicated to the people who made it. Life is about courage and going into the unknown.

일탈과 관련된 또 하나의 영화는 벤 스틸러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있다. 영화를 아직 안 본 사람들이 있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라이프' 메거진의 필름현상원 벤은 오랫동안 같이 일해왔던 전설적인 사진작가 션을 찾으러 그린랜드로 떠나는데 여기서도 벤이 파란 차와 빨간 차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레드를 선택한다. 지금껏 실행은 못하고 상상만 하며 살아왔던 벤은 션을 찾으러 다니며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온갖 일탈들을 감행한다. 그가 항상 상상만 해왔던 어드벤처들을 직접 말이다.  

Stop dreaming. Start living.


그의 일탈이 조금 달랐던 것은 그것이 내 포커사건처럼 일탈을 위한 일탈이 아니라 책임을 동반한 일탈이었다는 점이다. 16년간 몸을 바쳐가며 일해왔던 '라이프' 지가 폐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벤은 션이 찍은  'Quintessence of LIFE' 사진을 마지막 호에 꼭 싣고 싶었기 때문이다. 션을 찾으러 떠난 일탈 때문에 그는 16년을 다닌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탈을 다 마치고 돌아온 그가 마지막까지  라이프지를 위해 션의 사진을 사장에게 건네주는 모습은 이상적인 일탈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Hi, do you have any cars available? I'll take the red one.

영화와 소설에서 말하는 현대인들의 이상적인 일탈의 모습은 대부분 이와 같다. 그것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란 고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데 저자가 말하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개념들이 그것이다. 소극적 자유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의 도피로 정의되며 단순히 외부의 강제나 속박, 억압 등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적극적 자유는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상태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위험 또한 각오한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어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마약과 알콜의 힘을 빌리는 사람들은 소극적 자유는 몰라도 적극적 자유를 실천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적극적 자유를 쟁취하지 못하는 그들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뛰어나게 극화한 소설이 바로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이다.



주인공은 나쉬는 30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에게서 엄청난 유산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가 다른 것들은 모두 뒷전으로 밀어버리고 한 짓은 빨간 투도어 사브 900을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2주 동안의 휴가를 신청해 사브를 몰며 몇천키로를 몇십시간을 계속해서 여행한다. 휴가가 끝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운전대를 붙들고 싶어 안달이 났고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소방관 일까지 그만두며 자유를 향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다.


그의 '일탈'을 한번 살펴보자.


"한 주가 끝날 무렵이 되자 그는 점점 더 불안해졌고 밤에 눈을 감기만 하면 자기의 차가 떠올랐다. 비번인 날 그는 메인 주까지 차를 몰아 갔다 돌아왔지만 양에 차지 않는다는 느낌만 들 뿐 더 오랫동안 운전대를 붙들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찔끔찔끔 운전을 하는 일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 둘째 날 밤 이후로 나쉬는 자기가 이제 통제 불능이라는 것, 어떤 이해할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힘의 손아귀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발광한 짐승처럼 그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다른 곳으로 무작정 차를 몰아 달리고 있었다. 그 일을 그만두려고 아무리 여러 번 결의를 다져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 고독과 공허를 뚫고 밤새도록 달리는 질주와 피부에 와 닿는 길의 울림. "

"서너 달이 지나자 그는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육체로부터 풀려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려 놓고 운전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음악이 그를 무중력의 영역으로 실어 가는 것이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감, 차를 몰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돌진해 나가는 즐거움이었다. 그의 주위로는 어느것도 한순간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그런 순간순간이 이어지는 동안 자기 혼자만이 계속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하나의 고정된 점, 세상이 그를 휙휙 지나쳐 사라지는 동안 절대적인 정적 속에 떠 있는 주체였다. 그의 차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소, 아무것도 그를 해칠 수 없는 피난처가 되었다."

"길에서 보낸 몇 달 동안 그는 치명적인 사고를 여러 번 목격했고 한 번인가 두번은 자기가 당할 뻔한 사고를 간발의 차이로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쉬에게는 그런 위기일발의 사태가 오히려 환영할만한 것이었다. 그런 위험 요소들이 운전에 스릴을 더해 주었고, 그가 무엇보다도 더 추구하고 있던 것은 자기의 목숨이 자기 손에 맡겼다는 느낌이었다. "

" 결국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내가 증명하려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데도 나쉬는 계속 차를 몰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혼자 있는 것에 점점 더 많은 평온을 느꼈다."



그에게 사브를 모는 것은 마약과 같았다. 사브 900은 멋진 차니까.  

여기에 사랑했던 사람의 거절까지 맛본 나쉬는 모든 것을 포기하며 뉴욕에서 만난 도박꾼 잭 포지에게 그의 남은 모든 돈을 배팅하게 된다. 나쉬가 읽었던 [음향과 분노]의 "어느 날 그는 너무도 싫증이 나서 아무렇게나 뒤집은 단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 때까지.." 란 구절처럼 말이다.

포커 실력이 뛰어났던 잭은 초반에는 게임을 잘 이끌어 나가지만 마지막에 웃는 승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에게 그 판은 이길 수밖에 없는 판이었지만 포커란 게임이 본디 그렇듯이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난 것이다. 잭의 실력을 믿은 나쉬는 그의 사브까지 배팅하게 하지만 빼앗기고 만다. 심지어 그 둘은 빚까지 덤으로 안게 된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잭과 나쉬는 6개월간 벽 쌓는 일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쉬는 벽 쌓는 일, 그 노동에서 성취감을 찾고 그런 감금된 상황에서 또 다른, 더 깊은 자유를 느낀다. 벽을 완성시키는 것은 나쉬에게 다시 해방을 위한 실존적 행위였고 거기에는 신뢰, 유대감, 책임감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어떤 희망,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낙관적인 기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16일만 더 있으면 일은 끝날 것이고 권총으로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계속 일을 하는 한 일이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 줄 것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한 가지 목표를 이루었고, 그들이 떠난 뒤에까지도 남게 될 일을 해냈다. 그들이 어디에 가 있게 되건 그 벽의 일부는 언제나 그들에게 속할 것이다."

"매일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는 자기가 그날 쌓은 돌의 개수를 적곤 했다. 그에게는 숫자 그 자체가 중요했지만 그 목록이 열 개나 열두 개 이상으로 늘어나자 그는 늘어가는 숫자에서 즐거움을 얻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순전히 계산상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쯤이 지나자 그 숫자가 어떤 내면적인 욕구, 자기가 탈선을 하지 않도록 지켜 주고 현재의 위치를 알려 주는 어떤 강박 관념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벽을 쌓는 노동은 차에 앉아 운전만 하고 보낸 지난 아홉 달에서의 새로운 도피였다. 우리들은 소속감, 책임감, 유대감에서 색다른 자유를 느낀다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는 일탈을 위한 일탈은 다시 자유를 뺏앗길 뿐이다. 책임 없는 일탈은 왜 자유롭지 못한지 나쉬는 일찍부터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뭔가 미진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 일이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무한정인 것처럼 보였던 돈도 대여섯 달쯤 여행을 하고 나자 그중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렸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의 모험은 자가당착에 빠져 들고 있었다. 자유를 누리려면 돈이 있어야 했지만, 한 몫의 자유를 사기 위해 돈을 쓸 때마다 그는 똑같은 몫으로 자신을 부정해야 했다. 돈을 가진 덕분에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돈이 그를 원래 있던 곳으로 가차없이 되돌려 놓으려고 드는 패배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다. 자유를 위해 떠났지만 그러한 일탈은 그만큼 그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버렸다.

그래서 일탈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우리들이 원했던 것은 " ~ 로부터의 자유" 가 아니라 " ~로의 자유, ~를 향한 목적지가 있는 자유" 란 것을 말이다. 책임감이 수반되어야만 진정으로 추구했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영화와 소설을 통해 난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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