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시리도록 푸른 섬. 제주에서 식탐의 과욕을 부리다.
구정동안 3박 4일로 가족들과 제주도를 다녀왔다. 거의 15년만에 제주도를 다시 찾은 것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제주도의 이국적인 풍경에 놀랐고 내 입맛에 딱 맞는 제주도 음식들에는 감탄을 거듭하며 함포고복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이었는데 그건 완벽했던 여행이어서가 아니라 ' 거의 ' 완벽할 뻔했던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전에 이렇게 글로 기록하려는 것도 제주도에서 있었던 내 과오를 반성하기 위해서다. 이 글은 식탐에 대한 내 반성문이다.
왜 제주를 시리도록 푸르다고 표현했는지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밖으로 본 제주도의 하늘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목적은 오로지! 맛있는 음식이었다. 이틀 전에 집에 와서 몸무게를 재봤는데 3박 4일 동안 2kg 이나 쪄서 목적 달성을 잘한 셈이었다. 제주도 음식이 이렇게 내 입맛에 딱일 줄이야.. 나는 삼삼하고 청초한 맛의 한식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제주도에서 찾아간 대부분의 음식점들이 딱 그 맛이었기에 능력이 닿는 데까지 잔뜩 먹었다.
우리는 세세한 일정을 정해놓고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가기 전에는 숙소만 예약해두었다. 무엇을 먹을지는 당일치기로 결정하곤 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제주도가 먹을 것에 대한 완벽한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음식점의 위치와 저희가 존재하는 장소 간의 거리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지금 먹고 싶은 음식이 그곳에 있을 뿐이면 우리는 힘껏 엑셀을 밟을 뿐이었다. 하루에 서귀포 - 제주시를 몇번 왔다갔다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대신 먹는 게 일이었... 그만큼 도로가 아주 잘 갖춰져 있었고 차도 많지 않아 쏜살같이 달릴 수 있었다. 숙소 운도 아주 좋았는데 먹기에 지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잠에 곯아 떨어지곤 하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여행하는 동안 먹었던 음식과 숙소를 사진들!
Day 1.
유리네(성게미역국, 갈치구이, 뚝배기) -> 흑돼지 전문점 어멍 -> 미르빌 (바로 앞 산방산)
Day 2.
미르빌 조식(개 귀엽) -> 탄산온천 -> 진미식당 -> 망고레이 -> 보건식당 -> 노인과 바다 (바로 앞 바다)
Day 3.
노인과바다 조식 -> 모슬포 샤브샤브 (해물라면) -> 감귤호떡 -> 앞바당 (장어구이) -> 켄싱턴 호텔
식탐이란 것을 처음 느꼈던 것은 입대하고 훈련병 생활을 하면서였다. 거의 2달간의 훈련병 생활에서 인생의 낙이란 먹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군생활을 하면서부터 맛있는 걸 먹는 게 남는거구나라고 크게 배웠던 것 같다. 군생활 경험은 한식에 대한 강한 애착을 길러주었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는 어디론가 떠날려면 무조건 맛여행이라며 맛여행에 대한 인식을 깊이 새겨준 것 같다.
문제의 발단은 내가 마지막날 장어를 꼭 먹으러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면서부터 발생했다. 다들 호텔 근처 식당에서 먹고 빨리 수영하러 가자는 분위기였는데 꼭 장어를 먹어야 하겠다며 욕심을 부렸다. 결국 고집부려 먹으러 간 장어는 제주도 여행에서 가장 맛이 없었던 음식이 되었고 그렇게 제주도 맛여행의 정점에서 나는 미끄러지고 말았다.
호텔에 와서는 멀쩡하게 수영도 하고 사우나도 하고 차도 마시고 공연도 보며 12시쯤 잠이 들었는데 새벽 2시 반부터 복통에 아파서 잠도 못자고 침대에서 끙끙 대고 앓았다. 배는 바늘로 누가 콕콕 콕콕 찔러오는 것 같았고 몸은 으슬으슬 추웠고 또 난생 처음 겪은 근육통 때문에 잘 움직이지도 못했다. 아마 다 익혀지지 못한 몇 조각의 장어 때문이라고 난 짐작하지만 가족들 말마따라 딱 나만 아팠던 것을 보면 내 식욕 때문에 벌을 받았나보다. 먹는 것에 대한 자유 또한 역시 책임을 불러온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여튼 다음날 아침은 기대했던 호텔 뷔폐였는데 난 저 위의 요플레 2개랑 파이내플 쥬스 딱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했다. 너무 아파서 화낼 힘도 없고.. 그냥 웃음만..
나는 본디 어렸을 때부터 잘 먹지 않는 아이였어서 많이 먹는 것을 미덕이라 여겨왔다. 키가 크지 않은 이유도 한창 자랄 때 너무 안먹어서 그런 거라고 집에서 단정 지을 정도로 학창시절에 잘 안먹고 다녔다. 그래서 항상 많이 좀 먹어라란 잔소리를 들으며 자라왔고 식탐을 부리는 것이 때론 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을 통해 때론 맛없는 음식들 앞에서도 불평 불만 늘어놓지 않고 군말없이 먹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때론 맛있는 음식들 앞에서도 자제하고 약간 못 미칠 정도로 먹어야 한다는 것, 어디서나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는 '먹'의 과유불급 자세를 배웠다. 이번 계기로 '먹'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고 앞으로의 좀 더 완벽한 여행을 위해서라도 먹는 것에 대한 과욕을 경계하고 다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