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배도 산으로 간다

by one oak

추석이 다가오자 성인문해 반 어르신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마침 '윷놀이'가 떠올랐다. 수업 시간에 함께할 놀이로 이만한 게 없을 것 같았다.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모두 참여할 수 있고, 두 팀으로 나눠 승부를 겨루면 재미도 있고 활기도 넘칠 듯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게임을 잘 이끌 자신이 없었다. ‘선생’이라지만 분위기를 살릴 줄도 모르니. 그렇지만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윷놀이'를 하기로 한 당일 아침에야 윷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마트로 달려갔다. 만약 그 마트에 윷가락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윷놀이’를 하겠다고 일주일 전부터 공언해놓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준비성 없는 나를 타박해 봤자 별 수 없고, 다행히 운이 좋은 날이었다. 무사히 '윷놀이'를 준비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모’와 ‘윷’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윷놀이’에 대해서 아는 게 없고, 제대로 놀아 본 경험도 없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윷놀이이니 알아서 즐겁게 놀아주시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편을 나누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가위바위보로 하자."

"아니다, 윷을 던져서 정하자."

말들이 오가자 교실 안이 금세 술렁였다. 나는 잠시 중재에 나서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분위기는 팽팽했고, 섣불리 끼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평소 붙어 지내던 어머님들도 편이 갈라지자 서로 눈을 피했다.


돗자리가 깔린 교실 바닥에 윷판이 그려진 종이가 펼쳐져 있다. 그 주변을 몇몇 어머님들이 둘러앉았고, 그 옆으로 두 편으로 나눠진 선수들이 서로 마주 앉았다. 윷가락이 '데굴' 굴렀다. "모야!", "윷이야!" 하는 함성이 점점 높아지더니, 상대편의 말을 잡자 분위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말이 잡힌 분남 어머님 팀은 윷판으로 모여들었고 긴장한 눈빛들이 오갔다. 신중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남은 말 한 마리가 또 잡아먹힌다. 의견이 엇갈렸는지 큰소리가 났다. 정임 어머님은 "이쪽으로 가야지, 잡힌다!"라고 했고, 분남 어머님은 "아니, 빨리 달아나야지!"라며 맞받았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같으나 그 방법이 달라 게임 진행이 되지 않았다. 반대쪽 선수가 윷을 던지지 못하자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말 서는 사람이 그래 많아서 어쩌지? 배가 산으로 가겠다. 참, 나.”

옥연 어머님이었다.

그때 윷판 맞은편에 있던 명순 어머님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일제히 시선이 그리로 갔다.

"내 차례인데 왜 건너뛰어?"

평소 조용한 분이었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몇몇 어머님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반대편 옥연 어머님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 하는교? 내 차례구먼.”

양쪽에서 언성이 높아지자 교실이 웅웅거렸다. 그때 갑자기 재분 어머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 윷판을 통째로 뒤엎어 버렸다.

“다시 해야지!”


'윷놀이'가 이렇게 끝나게 될 줄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시작하기엔 시간이 없었고, 어머님들 사이에서는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실망감으로 더 이상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교실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겨우 말을 꺼냈다.

"어머님들, 오늘 분위기가 좀 과열됐네요.”

나는 교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윷놀이 준비는 잘 된 게 아닐까요? 편 나누기를 해봤으니까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겠지요. 고생하셨어요."


감정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지, 어르신들은 둘씩 셋씩 모여 서서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서 있는 나에게 금주 어머님이 다가와 손을 덥석 잡으셨다.

"아이고, 선생님! 민망하네요. 선생님이 많이 놀랐겠어요. 늙은이들이 주책을 부렸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더 난감했다. 수업 방향을 잡고 분위기를 조율해야 할 '선생'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자책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윷놀이를 잘 알지 못한 데다, 나이도 어린 내가(먹을 만큼 먹은 나이이지만) 어르신들 앞에서 게임을 주도한다는 게 조심스러워 아예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것은 잘못이었다. 무엇보다도 수업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내 책임이 컸다. 배가 산으로 간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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