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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Dec 08. 2022

단순한 열정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뉘앙스'라고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알아차리게 되는 그 감각에 대해. 특히, 자전적 소설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 '뉘앙스'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러니까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세심하게 고른 단어와 그 조합에 대해 번역서를 읽는 나로서는 미처 다 알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열정>은 유부남과 불륜 관계를 맺었던 작가의 경험에서 탄생했다. 소재부터가 자극적이고 손톱 한 마디도 채 되지 않는 두께 덕분에 가뿐한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지만, 짝사랑과 다름없는 작가의 기다림에 어쩐지 마음이 쓰여 나도 모르게 이 사랑을 (조금은) 응원하게 된다. 이후 <단순한 열정>의 독자였던 33세 연하의 필립 빌랭이 아니 에르노의 연인이 되어 5년간의 사랑을 담은 <포옹>이라는 소설을 출간한 것 또한 흥미롭다.




온종일 나의 시공간을 지배하는 무언가를 '열정'이라 지칭하는 것도 맞고, 삶의 모든 감각이 그 하나를 향할 때 '단순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에도 무리는 없다. 그러나 그 '단순한'과 '열정'이 만나 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을 때는 인간의 본능과 심리적 욕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의 극히 일부분이라 여겼던 것이 충족되거나 해소되지 않았을 때 부분이 전체를 먹어버리고 마는 관계에 대해. 마치 나라는 한 개체 안에도 먹이사슬과 같은 것들이 겹겹이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는 그 채워지지 않음을 통해 자신을 어떤 배움으로 이끈다. 고미숙 작가가 <몸과 인문학,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에 적은 것처럼, 어떤 것을 공부(경험) 하든 그것이 자기에 대한 성찰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에 대해, 그 어떤 도덕적, 사회적, 이성적 판단도 보류한 채 그저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행위를 지속하는 것. 그럼으로써 아니 에르노 자신의 일부로 존재하던 본능과 욕망이 얼마만큼 거대해질 수 있는가를 깨닫고, 다시 본래의 자아를 분리시킴으로써 세상과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단순한 열정> p.66




노벨문학상은 <단순한 열정>이라는 작품에 주어졌지만, 결국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지평이 넓어져 가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한 작가의 삶이 받은 것이므로, 나 역시 아니 에르노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읽든 쓰든, 책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한 지구인으로서, 아니 에르노의 그 단순한 열정이라는 것이 결국은 부적절한 대상을 향한 사랑을 뛰어넘어 그 모든 시간을 글쓰기에 담아내는 행위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몇 장의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아무리 파란만장한 삶이라도 결국 돌 사진과 영정 사진 사이에 낀 몇 갈피의 추억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아니 에르노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의 글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서 무엇인가를 구해내는 일"에 매달렸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열정> p.73, 이재룡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 발췌




하루키가 달리기에 쓴 글을 보고 몸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달리고 싶던 것처럼, 신경숙이 요가에 대해 적은 글을 보고 깊은 호흡에 나를 맡기고 싶던 것처럼,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으면서는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다 끄집어내어 활자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비록 나의 일상은 주제와 글자 수까지 남이 정해주는 형식에 맞춰 적어야 하는, 아니면 꼬불거리는 글자를 우리말로 바꾸는 루틴에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더 자유롭게 적을 날이 오지 않을까.



2022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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