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밭을 피하는 것도 실력이다
이 글은 수십 년 차 기술자가 온몸으로 감지한 '침몰하는 배'의 신호들과, 그 속에서 나의 존엄과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감행했던 5일간의 탈출기다. 이하의 내용은 작가의 실 경험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으며, 특정 기업과 지역은 익명으로 처리하였습니다. 혹여나 해당 대기업의 임직원이 보신다면 행여 본인의 회사일은 아닐 거라고 믿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 현실은 이상과 다릅니다.
"이 이야기는 100% 실화라서 재미있겠지만, 저의 안전을 위해 회사 이름은 가렸으니 굳이 따지지 말고 교훈으로만 읽어주세요."
월요일 아침, 나는 현장 숙소가 아닌 내 집 침대에서 눈을 떴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남부 지방의 한 해안가, 거대한 플랜트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쏟아지는 회의 자료와 씨름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내 손에는 안전모 대신, 싸늘하게 식은 핸드폰과 "상기 사유로 퇴사를 통보합니다"라는 마지막 문자 메시지가 들려 있었다.
내 경력 수십 년. 플랜트 관리 분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소위 '특급 기술자'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험하다는 중동의 모래바람, 까다롭다는 글로벌 발주처, 웬만한 위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넘겨왔던 나였다. 그런 내가 고작 출근 5일, 시간으로 치면 5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소위 '추노(도망)'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아니, 수년 차 베테랑이 끈기 없이 그게 뭡니까?" "요즘 경기도 어려운데 대기업 현장이면 좀 버티시지."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철수'였다고. 전쟁터에 총도 주지 않고, 지도도 없이, 심지어 아군이 파놓은 함정 속으로 뛰어들라고 명령받았을 때, 장수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판단은 무엇일까?
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첫 주 초입, 첫 출근이었다. 국가 중요 기반 시설이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A사의 대형 프로젝트. 채용 과정에서 들었던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기존 인력이 있으니 합류해서 현장관리를 이끌어 달라." 나는 그 말을 믿고 지방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곳은 서울과는 다른 온도를 가진 도시였다. 기대와 긴장을 반으로 발걸음은 내 디뎠다.
하지만 현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의 수십 년 '촉'이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1.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1인분? 아니 3인분 "부장님, 사실은... 이번 주에 기존 인원들이 다 그만둡니다." 첫 대면에서 들은 말이었다. 인수인계를 해줄 사람은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고, 보조해 줄 인력도 증발했다. 나는 통상 3명이 붙어서 해야 할 일을 혼자서, 그것도 당장 내일부터 '독박' 써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물론 처음 들은 현장상황과도 많이 달라있었다. 현장에 기존인원 중 한 명이 있으니 일하기를 수월할 거라는 거였다.
유독 이런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연봉도 별도로 주장하지 않았다. 굴지에 대기업으로 웬만한 직급과 직책에 걸맞은 연봉규정이 책정돼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과 신뢰 때문이었다. 그래서 4년 전의 연봉에서 조금 올려준다는 말을 듣고도 크게 반색하지 않았다.
2. 장수가 칼 없이 전쟁터에? "전문 프로그램은 어디에 깔려 있나요?" 내 질문에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다. 수천억 원이 오가는 거대 프로젝트를 관리하는데, 전문 시스템아 없단다. 대신 수만 개의 공정을 엑셀(Excel) 수작업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고층 빌딩을 지어야 하는데 크레인은 없고, 삽자루 하나 줄 테니 맨손으로 지으라"는 말과 같았다.
3. 계약서는 나중에? 출근하고 5일이 지나도록 근로계약서는 나오지 않았다. 노트북도 5일 만에야 겨우 받았다. 무언가 체계가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생각했다. '그래, 내가 특급 기술 자니까. 내가 와서 시스템을 잡으면 되지. 그게 내 가치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내가 마주한 진짜 적은 '시스템 부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업무 파악을 위해 전임자 K(퇴사 예정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수개월의 업무를 단 2시간 만에 끝내고 본인이 바쁘다고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 전임자는 언제든지 궁금한 것은 전화를 달라고 했지만 그것을 말 뿐이었다. 이미 수십 번 전화를 했지만 전임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관리의 핵심은 '데이터'다. 지난 12개월 넘는 히스토리가 담긴 파일이 필요했다.
"K 과장님, 월간 보고에 들어가는 산출 근거(Raw Data) 파일이 어디 있나요?" 돌아온 답장은 가관이었다.
"공용 폴더에 다 있습니다. 찾아보지도 않고 묻지 마세요." "제 개인 폴더는 손대지 마실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노트북을 열어보니 공용 폴더에는 껍데기뿐인 PDF 파일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니면 모든 건 수식이 없는 숫자로 복사해 놓은 엑셀파일과 이미지로 첨부해 놓은 회의자료뿐이었다. 살아있는 수식, 즉 '수치가 왜 45% 인지'를 증명할 엑셀 원본은 온데간데없었다. 재차 물었다. "공용 폴더에 없습니다. 원본 파일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전임자는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기분 더럽네." 심지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는 데이터를 숨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데이터는 조작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로직으로 산출되지 않는 '가짜 수치들'. 그것을 들키기 싫어서 그는 7년 차 부하직원에게도, 새로 온 특급 기술자인 나에게도 파일을 공유하지 않고 본인만 아는 선에서 숨긴 채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남긴 노트북 바탕화면 그리고 내게 보낸 "후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임"이라는 적반하장의 메시지.
나는 깨달았다. '아, 이건 설거지다.' 누군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치우다가, 결국 프로젝트가 문제가 생기면 그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희생양'. 그게 바로 나였다.
그래도 '책임감'이라는 족쇄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 왔으면 해결을 해야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 마음의 끈을 툭 끊어버린 것은 바로 '처우'와 '회사의 태도'였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데이터를 망가뜨리고 도망가는 전임자와, 그 밑에 있던 7년 차 부하직원. 이 두 사람의 연봉 합계는 어림잡아 1억 원 중반대가 훌쩍 넘었다. 그런데 회사는 이 두 사람분의 몫을 나 혼자 하라고 요구하면서, 내게 제시한 연봉은 그 절반 수준도 안되었다.
더 기가 막힌 건 부하직원의 처우 비교였다. 수년차 특급 기술자인 나와, 초급 기술자의 월 실수령액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
수십 년의 세월. 수많은 현장을 누비며 쌓아온 나의 전문성이 고작 월 회식비 몇 번 정도의 가치로 환산되고 있었다. 심지어 회사는 내게 말했다. "지금 사람이 없으니, 두 달만 혼자서 버텨주세요."
가장 위험한 시기, 가장 일이 많은 시기에, 시스템도 인력도 없이 혼자서 총알받이가 되어라. 그러면서 대우는 전임자보다 못하게 받아라. 이것은 '도전'이 아니라 '모욕'이었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단지 급여 몇 푼을 더 받기 위해, 나는 내 수십 년 커리어에 '실패한 프로젝트의 관리자'라는 오점을 남겨야 하는가? 물론 실패도 값진 경험이 되고 배울 점도 많다. 하지만 전임자가 싸지른 오물을 뒤집어쓰고 소송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했다. No.
5일이 지난 다음날, 나는 결단을 내렸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얼굴 붉히며 싸울 필요도 없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으니,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인사팀과 책임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수십 년 차 전문가다운 '팩트'를 담았다.
시스템 부재 : 시스템 없이 엑셀로 때우는 주먹구구식 관리는 할 수 없다.
데이터 망실 : 전임자가 고의로 은폐한 데이터 때문에 업무 수행이 불가능하다.
불공정 처우 : 특급 기술자를 초급 기술자 수준으로 대우하며 '독박'을 씌우는 행태를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반납한 노트북에 '선물'을 남겼다. 전임자가 지우고 간 줄 알았던, 그러나 내가 밤새 복구해서 정리해 둔 '지난 10개월 치의 전임자 업무 이메일 리스트'. 가 있다는 사실을 담당 부서장에게 흘렸다.
"부장님, 저는 도망가는 게 아닙니다. 이 현장이 저를 담을 그릇이 안 되어 나오는 겁니다."
담당 부서장에게서 답장이 왔다.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실체를 알게 되어) 다행인 것 같은데 여파가 심할것 같네요."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회사 내부자조차 인정한 것이다.
[에필로그]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존버(무조건 버티기)'가 미덕이라고 배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십 년 경험의 밥을 먹은 내가 단언컨대,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지뢰를 보고 피하는 것은 겁쟁이가 아니라, 생존 본능이 살아있는 전문가다.
나는 5일 만에 그 프로젝트를 탈출했다. 약간의 연봉을 포기했지만, 대신 나의 '자존심'과 '커리어', 그리고 앞으로 일할 '더 좋은 기회'를 지켰다.
인생은 길고, 일할곳은 많다. 자신을 소모품 취급하는 곳에서 낭비하기엔, 당신의 경력은 너무나 소중하다. 이것이 수십 년 차 특급 기술자가 당신에게 전하는 '진짜' 생존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