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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Oct 13. 2021

우리는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증언할 수 있을까?

일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 유의미한 삶을 향한 출발


삶과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헤아려 본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평생 안고 가도록 부여받은 숙제이다. 무언가에 대해서 증언한다는 것은 우선 증인이 있어야 하고 그 증인은 증언하려는 사건에 현존해야 하며 증언하는 순간에도 현존해야 하는데, 삶과 죽음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인 자기 자신이 과연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증언하기란 가능한 것일까? 한편 증언이란 ‘언어’로 이뤄진다는 점에 있어서, 증언에는 모순이 따른다. 언어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표준화 작업을 거친 하나의 약속으로,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속성을 개념화시켜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동시에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고 소통함으로써 한 개인의 특수성을 넘어 한 집단의 보편성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할 때 사회적 합의에 따라 선택된 호에 부여된 기의로 이뤄진 것이 언어인데, 언어를 통한 증언이 과연 어느 한 관념에 대한 본질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그것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따질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이 바로 평생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죽음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건 본인이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건 간에, 결국 증언하는 그 순간에 ‘살아있는’ 사람에 의해 증언된다. 따라서 그 증언이 죽음에 대한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조르조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핵심 테제로 생각되는 부분이 떠오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말하길, ‘자신들은 그곳에서 살아서 돌아왔기 때문에 거기서 있었던 일을 증언할 수 없다’는 부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보낸 유대인들의 삶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욕구와 살아가는 이유마저 제거되며, 자신의 모든 행위가 ‘무의미’로 귀결되는 삶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존재까지도 무의미한 것으로 각인되며, 그들의 죽음은 당시에 ‘죽음’이라고도 인정받을 수 없는 ‘무의미한’ 먼지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오늘날 우리의 삶과 죽음, 우리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자. 그들과 우리는 같은 상황인가?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증언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 증언이란 가능한 일인가? 이에 대해 ‘일상의 평범성’, ‘제거 본능’, ‘수미상응적 관계’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순차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일상의 평범성’이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평범함’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일상의 평범성이란, 의식주를 해결하고 진로를 정하는 등 나이를 먹어감에 있어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사유 없는 무조건적인 복종은 어느 순간 그 행위에 대한 본질을 망각하거나 다른 것과 착각하도록 만들기 쉽다. 즉 각자가 행하는 일상 속 사소한 행위에 대한 사유부터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일상의 평범성을 무시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개념화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다음 키워드인 ‘제거 본능’으로 이어진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택하는 것을 말한다. 삶 속에서 제거 본능이 무서워지는 때는 바로 제거의 대상을 적절하게 찾지 못했을 때다. 즉 살아가며 마주하게 될 많은 역경이나 고난, 그리고 거기서 생기는 분노와 공포, 두려움 등의 감정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를 말한다. 일상에 대한 사유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생존과 직결된 치명적인 문제를 눈앞에 두고 혼란에 빠지게 되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자체가 어려워지게 되고, 제거 본능에 따라 스스로 파악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원인제공을 한 대상을 찾게 된다. 일종의 상징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때 그 제거대상을 타인이나 자신, 즉 ‘사람’으로 두게 될 때 제거 본능은 곧 자살을 포함한 살인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살인행위는 그것을 택한 자들 입장에서 정당하고 합리적인 행위가 된다. 이때 중점으로 두려는 부분은 살인행위에 정당성과 합리성을 부여한 자들을 향한 옹호나 비난이 아닌, 그들이 그런 선택을 본능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 있음을 명심하자.


세 번째 키워드인 ‘수미상응적 관계’란, 말 그대로 처음과 끝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뜻으로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모든 행위들이 처음과 끝은 닮아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똑같을 수 없는 엄연히 상이한 것임을 의미한다. 오늘 듣는 A라는 노래와 5년 뒤에 듣는 A라는 노래가, 오늘 읽는 B라는 책과 10년 뒤에 읽는 B라는 책이 다르듯이 우리는 매번 반복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행위 안에는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유의미한 것으로, 매우 닮아있으면서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행위들이다. 그렇다고 모든 행위에 매번 의식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유사한 행위들의 사소한 차이에까지 집중해가며 살아가기란 힘들겠지만, 분명 모든 행위는 수미상응적인 관계 하에 유의미하고 그것이 자기 자신을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노래를 듣고 영화를 감상하고 독서를 하는 것, 혹은 매번 지나다니는 가까운 곳을 천천히 자세히 들여다보며 다시 걸어보는 등 우리의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들을 습관화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상의 평범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일상을 다시 바라봄으로써 삶의 유의미함을 헤아려 보자는 것이다.


이때 앞선 숙제를 풀어가기 위해 언어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숙제를 부여받는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 언어는 선택적이고 제한적이므로 분명한 한계가 있고,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므로 절대적일 수 없다. 따라서 살아온 날들이 갖는 의미뿐만 아니라 직접 죽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죽음에 대한 완벽한 증언까지도 불가능하다. 결국 살아 있는 사람에 의해서 증언되는 죽음의 의미는 죽음의 본질이 아닌 그 복합적인 의미들 중 하나의 파편인 셈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자의식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에 의해 증언될 수 있는 죽음의 의미,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은 다시 ‘일상의 평범성’과 행위 간의 ‘수미상응적 관계’를 강조한다. 먼저 태어나는 순간부터 숨이 멎는 순간에 이르기까지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직선형의 삶이 아닌 중심축을 두고 한 바퀴 도는 원형의 삶으로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때 죽음이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죽음을 무(無)로 변화시키는 보편적인 행위이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존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해결방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일상적 행위가 유의미하다고 말했듯이, 죽음 역시 행위 간의 수미상응적 관계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특수한 행위이다. 그렇다고 할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느끼는 죽음, 또는 여러 매체에서 재현되는 죽음의 단면, 스스로 죽음을 시도하는 등의 경험을 토대로 영원히 알 수 없는 죽음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을 것 같다. 모든 죽음이 매우 닮아 있지만 깊게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다양한 의미를 갖는 개별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 차이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일상의 평범성을 경계하고 삶의 유의미함을 성찰해보는 기회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죽음이 사회적 합의 따라 보편화가 이뤄진 삶 속에서 각각 어떤 특별하고 개별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그 상호관계에 집중함으로써 각자 스스로의 삶과 죽음을 유의미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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