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18 나무 그리고 빗개

16코스(고내포구←광령1리사무소, 15.5Km) 2

by 커피소년

아침 공기에서 물 냄새가 났다. 비는 한 시간 전에 그쳤음에도 공기는 물을 머금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면 바로 보이는 밭담과 감귤나무의 잎들은 색이 짙어 비에 흠뻑 젖은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물 고인 작은 웅덩이는 밤새 길이 빗방울에 시달려 잠 못 이뤘다는 것을 넌지시 비췄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먹구름과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을 드러냈지만 얼마 후 회색의 구름이 그 하늘을 가렸다. 이러길 반복했다..

<물기 촉촉한 풍경>

올레길은 해안 길이 주를 이룬다. 사람에게 필요한 생활용수인 용수천이 해안에서 솟아났고, 용수천을 따라 사람들이 해안에 모여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사람들이 남긴 그리고 여전히 남기고 있는 삶의 흔적을 보여주려는 올레길은 해안 마을들을 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내륙 깊숙이 들어온 길은 바다로 되돌아간다. 마치 연어가 바다에서 강으로 회귀하듯. 외도 포구에서 무수천으로도 불리는 광령천을 거슬러 들어온 길은 좌우로 흔들며 추진력을 얻어 앞으로 가는 연어처럼 광령리에서 구엄포구를 향해 구불구불 흘러 으늑히 바다로 갔다. 풍경은 수채화였다. 그래서 비의 흔적을 완전히 말리지 못했고 엷은 물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나는 바다로 향하는 길 위의 작은 연어였다.


길의 시작은 숲길이기도 감귤이 보이는 밭길이기도 했다. 초록의 길이었다. 간간이 어떤 작업을 위한 간이건물이나 집들이 홀로 또는 작은 무리를 이뤄 은둔해 있곤 했다. 초록이 아닌 색은 바로 눈에 띄었다. 빨간 지붕의 목조가옥을 봤을 땐 빨강 머리 앤의 집이 생각나기도 했다. 드문드문 있던 집들은 해안가에 가까워질수록 무리를 이뤄 마을을 드러냈다.


길에서 벗어난 나무들이 간혹 보였다. 밭 한가운데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의지하며 서 있었다. 본류에서 떨어져 나온 아웃사이더의 내면화된 온화한 고독이 전해져 왔다. 홀로 또는 두세 그루의 나무가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있기도 했다.


한때 어설프게 사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피사체는 나무였다. 잎이 무성한 여름 나무가 아니라 가지만을 앙상하게 드러낸 겨울나무였다. 이들에게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고개를 들어 여러 갈래로 갈라져 하늘에 드리운 앙상한 가지를 보고 있으면 어떤 저주가 느껴졌다. 하늘에 닿으며 영생하리라는, 영생의 욕망을 멈춘 순간은 바로 죽음이라는 신탁 그리하여 살기 위해 끝없이 욕망해야만 하는 저주였다. 나무는 가지 끝의 생장점을 통해 자란다. 생장점이 사라지면 나무는 죽는다. 욕망은 생장점에 스며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나무는 생장점을 계속 유지하며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늘에 닿을 수 없기에 그 욕망은 기만이고 부질없는 것이다. 한 해 한 해 반복되는 욕망은 나이테에 새겨져 지울 수도 없다. 이런 헛된 욕망과 벗어날 수 없는 저주의 굴레에 측은함을 느꼈다. 풍성한 잎으로 욕망을 가린 여름이 아니라 비릿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가지를 보기 위해 서늘한 계절인 겨울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뭇가지의 끝에서 나를 보았다. 나라는 인간도 헛된 욕망으로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측은함은 나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고급빌라 단지를 지나 가로수들이 우겨진 길에서 아침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았다. 두 명의 여성이 각각 개들을 산책시키고 있었다. 아마 배경을 이룬 길과 커다란 가로수들 그리고 그녀들이 위압감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모른다. 어느 영화에 나올법한 장면 같았다. 그녀들이 날 의식하지 않도록 조심히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나 또한 그 평화로운 가로수 길로 걸어 들어갔다.


가로수 길은 짧게 끝났고, 이어서 밭 사이에 집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인 길은 이 방향이 아니라는 듯 갑자기 방향을 140도 확 꺾었다. 오르다 상업시설의 사유지를 통과하면 예상치 못한 숲길로 들어선다. 그 숲길은 작은 천 하나를 지난다. 고성천이었다. 안내판이 있어 읽었다.


...항파두리 토성 동쪽에 위치하여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고성천 동쪽 능선이 지대가 높아 삼별초군이 망을 봤던 곳이라 망이리 동산이라 불렀으며, 4·3 사건 당시 빗개를 서기도 한 장소이다....


이런 내륙 깊숙한 곳에서 삼별초라는 단어를 만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거친 파도가 방파제에 격렬히 부딪혀 하얀 포말로 사라지듯 삼별초도 해안의 환해장성에서 소멸한 단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보다니. 발음도 어려운 항파두리 토성이 삼별초와 관련 있다는 건가? 그러나 삼별초보다 눈에 더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4·3 사건 당시 빗개를 서기도 한 장소이다’라는 문장에 있는 ‘빗개’였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빗개’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유별남 : 빗개’가 보인다. 2018년 4월 3일부터 4월 22일까지 류가헌에서 진행된 유별남 작가의 사진전이었다. 여기에 빗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주에서는 처녀를 비바리로, 어린 소년·소녀를 빗개로 불렀다. 그러나 4·3 사건 당시에는 토벌대와 무장대를 피해 제주 땅 곳곳에 몸을 숨긴 주민들이 은신처를 지키고자 망보기로 세웠던 아이들을 말한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사진전은 각각의 은신처에서 빗개였던 아이들이 망을 보며 바라본 제주의 풍경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풍경이 얼마나 다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작가는 숨어서 봤을 그들의 시선으로 제주의 풍경을 담았다. 사진전 글에는 당시 빗개였던 분의 인터뷰도 실려있었다.


“토벌대든 무장대든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몰라 무서운 마음으로 숨어서 망을 봅니다. 어릴 때니까, 그렇게 종일 마을 뒷산에서 망을 보다 보면 지루해지기도 합니다. 그럼 저도 모르게 주변에 풀꽃도 건드려보고 돌담에 기대 하늘도 올려다봅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고향 참 아름답구나....’ 그러다 새가 날아오르는 작은 기척에도 소스라쳐 놀라지요.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의 사진은 망보기의 지루함에 바라본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사진의 풍경이 머금은 색채는 망보기의 두려움과 작은 기척에도 놀란 아이들의 마음이 어둡거나 잿빛으로 드러나 있다. 아마 몸집이 작아 발각될 가능성이 낮아서 아이들에게 망을 보게 한 것 같았다. 망을 서며 아이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무척 두렵지 않았을까? 그 두려움을 꾹 누르고 망을 봤을 그들을 상상해 보았다. 이런 질문과 상상에 대한 답을 아이다운 감성이 그대로 묻어난 인터뷰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19코스 북촌에 있던 애기 무덤이 떠올랐다. 미쳤던 세상에서 이유도 모르고 죽었던 애기들과 영문도 모른 채 망보기로 세상에 휩쓸려버린 빗개들.

고성천을 지난 길은 콘크리트로 된 오르막이었고, 길의 옆구리로 방향을 틀어 다시 숲으로 들어섰다. 나무 사이로 정비되지 않은 길이었고, 그 끝에 양쪽에서 구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서로 만나 이룬 터널이 있었다.

(2024. 10. 22)


글의 초반에 외도 포구에서 광령리를 거처 구암 포구에 닿는 과정(해안→내륙→해안)을 연어로 묘사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비유는 틀린 것이다. 올레길은 해안에서 내륙을 거쳐 다시 해안으로 갔으나, 연어는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서 다시 강으로 오기 때문이다. 연어의 회귀는 반대 방향이었다. 회귀 방향이 올레길과 같은 것은 장어였다. 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가서 다시 바다로 온다. 그러니 그때의 그 길에서 나는 연어가 아니라 장어였던 셈이다.




형이상학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존재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존재했다, 그래서 사라졌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왜냐하면 이건 돌이킬 수 없는 게임의 법칙이므로.

굳이 글로 쓸 필요조차 없는 진부한 결론이므로,

다만 지극히 명백한 그 사실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범우주에 걸쳐 통용될

영구불변의 그 사실만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뭔가가 명백히 존재했다는 것,

그것이 사라지기 직전까지는.

심지어 오늘 네가 비계를 곁들인 글루스키를 먹었다는

그 사실조차도.


#올레 #올레16코스 #광령1리사무소 #연어 #나무 #고성천 #빗개 #형이상학 #비슬라바쉼보르스카 #장어

keyword
이전 17화2-17 블랙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