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코스(쇠소깍→제주올레여행자센터, 10.1Km) 5
남영호조난자 위령탑을 지나니 큰 주차장이 나왔다. 주차장은 관광버스들로 붐볐고, 장난치고 있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만큼 중국 관광객들도 많았다. 이들로 해서 주차장은 시끄럽고 번잡스러웠다. 그러나 좋았다. 모처럼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정방폭포 관광지였다. 보려면 소정방 폭포와는 다르게 입장료를 내야 했다. 화장실에 들렀다 우도에서 먹지 못한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쯤 올레길에서 벗어나 정방폭포를 잠시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린 날인데도 폭포 주변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되도록 폭포에 더 가까이 다가가 다른 사람이 없는 온전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래서 좋은 스팟에는 자연스럽게 줄이 생겼다. 폭포는 길고 유려하게 떨어졌다. 중력 때문인지 낙하할수록 작은 물방울로 쪼개지며 바위에 부딪쳤다. 일부는 하얀 물보라로 공중으로 흩어지고 일부는 더 작게 부서져 바다로 흘러갔다.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입구 안내판에서 봤던 ‘정방폭로는 폭포수가 수직 절벽에서 곧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폭포다’라는 문구는 과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규모는 작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 소정방 폭포도 바다로 바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바다로 떨어지는 그 이유 때문에 폭포에는 끔찍한 역사가 스며있다. 정방폭포 안내판 옆에는 4·3 사건에 대한 안내판도 같이 있다. 당시 폭포 주변에 있던, 수용소로 사용했던 전분공장과 단추공장에는 수감자들로 넘쳐났고, 이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은 폭포 위로 끌려와 학살당한 뒤 폭포 밑으로 버려졌다. 그리고 썰물에 그 시신들은 바다로 사라졌다. 이런 방식으로 희생당한 수가 255명이었다. 당시 동광리 주민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도 있다. 오멸 감독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이다. 이곳에서 같은 방식의 다른 학살 장소인 표선해수욕장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정방폭포는 서귀포라는 지명과 관련 있다. 안내판을 보면 ‘진나라 시황제의 사자 서불이 한라산의 불로장생초를 구하러 왔다가 정방폭포를 지나다 서불과지徐市過之라 새겨놓고 서쪽으로 떠났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서불이 서西쪽을 향해 귀로歸에 오른 포구浦’라고 해서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바위에 새겨진 서불과지徐市過之는 문헌상 19세기까지는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있는 것은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근래에 새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폭포는 사람들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시원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저 마르지 않고 떨어지는 많은 물은 어디에서 왔을까? 안내판에는 폭포의 수원지를 ‘정모시(正毛淵)’로 알리고 있다. 왠지 정방폭포라는 이름은 ‘정모시(正毛淵)’에서 유래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모시와 정방폭포는 너무 멀었다. 잠시 검색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궁금증을 안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검색했다. 과연 구글 신이었다. 2021년 4월 13일 제주대학교 지리교육학 교수이자 박물관장인 오상학 교수가 제주일보에 기고한 ‘정방폭포의 한자 표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정방((正房) 폭포는 수원지인 ‘정모시’에서 유래한 것이 맞았다. ‘정모시’에서 ‘정방연(正方淵)’을 거쳐 ‘정방(正房)폭포’에 이르렀다. 예로부터‘정무시’로도 불린 ‘정모시’에서‘시’는 물이 고여 있는 못을 뜻하는‘소’가 변한 것이다. ‘정모시’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정’은‘옳을 정正’에서 같은 발음인 ‘정正’에서 가져왔다. 이것을 음차라고 한다. ‘모시’는 ‘모 방方’과 ‘연못 연淵 ’에서 뜻을 가져와 ‘방연方淵’이 되었다. 이것을 훈차라고 한다. 그래서 ‘정모시’는 ‘정방연(正方淵)’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문헌부터 정방의 한자어 표기에 ‘正方’이 아닌‘正房’이 나타났고, ‘正房’으로 쓰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후엔 정방(正房)으로 고착되면서 정방正方은 소멸되고 정방(正房)폭포로 쓰였다. 그리고 안내판에 있던 ‘정모시(正毛淵)’의 한자 표기인 정모正毛는 같은 발음의 한자 음을, 淵은 같은 의미인 한자를 가져와 표기한 것이다.
‘정모시’에서 정방연(正方淵), 그리고 ‘정방(正房)폭포’에 이르는 과정은 언어 변천의 전형처럼 보였다. 고유어가 한자의 음과 뜻을 적절히 이용하여 문자로 표기되는 모습, 기존의 쓰던 표기가 새로 나타나 표기와 경쟁하다 사라지는 언어의 변천 등을 통해 음성언어가 문자로 표기되는 과정과 언어가 생명체처럼 생성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니 출구 옆에 서복전시관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서복? 알고 보니 서불을 서복으로도 부른다고 한다. 서불에 대한 일화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여러 자료를 모아 전시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약도를 보니 여기가 아니라 더 가야 했다. 길 정면에 돌로 만든 중국풍의 일주문이 세워져 있고 문의 위에 서복공원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었다. 문 바로 옆에는 정방폭포 안내문이 있었다. 이상했다. 이 자리가 오히려 서복전시관 안내판이 있어야 하고 정방폭포 출구에는 정방폭포 안내판이 있어야 하는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 아니면 출구에 같이 있어야 했다. 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잘 닦여진 길을 따라가니 오른쪽으로 황토색 벽이 나왔는데 기와들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색도 그렇고 직선으로 이어진 기와로 덮인 우리의 전통 벽은 아니었다. 서복불로초공원이었다. 들어가 봤다. 사람은 없었다. 황금 같은 황토색 지붕의 정자가 눈에 들어왔으나 근처 구석에 있는 검은 공간에 눈이 바로 갔다. 여기가 ‘정방 4·3 위령 공간’이었다. 이곳은 너무 외져서 이곳에‘정방 4·3 위령공간’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너무 아쉬웠다. 서복불로초공원 안내판이 공원 입구에 있었는데, 그 옆에 ‘정방 4·3 위령공간’의 안내판도 같이 세웠으면 누구나 충분히 인지하고 한번은 들렸을 것 같았다. ‘정방 4·3 위령공간’은 집주인인 소복불로초공원에 더부살이하는 느낌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한쪽 구석으로 치워 안 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라는 몹쓸 생각도 들었다. 좀 전에 들었던 불편한 마음이 더 커졌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방 4·3 위령공간’은 인근 상인과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두 차례나 위치가 변경되어 소복불로초공원에 공간이 마련된 것이었다. ‘정방 4·3 위령공간’의 존재가 상권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4·3 사건을 보는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소복불로초공원을 나와 조금 더 걸으니 ‘서복전시관’이 나왔다. 전시관 옆에 서불과지徐市過之가 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무슨 한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올레 18코스의 조천진 성벽 밑에 있었던 ‘금당포터’의 검정 석판이 떠올랐다. 서불이 제주도에 처음 도착한 곳이 조천이었고 이곳에서 천기를 보고 <조천>이라고 바위에 썼다고 한다. 서불은 제주의 북쪽과 남쪽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지명으로.
중국풍의 나무로 된 서복공원 일주문을 지나 서귀포 시내로 들어갔다. 정모시에서 흘러내린 물로 곡식을 갈았다는 물래방아터를 지나고 모든 서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한국 서단의 거목인 소암 현중화 선생의 ‘소암기념관’을 거쳐 집들의 담에 벽화가 그려진 길은 해변에 닿을 듯하다 다시 위로 올라갔다. 서귀진지까지 벽화는 이중섭 화백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벽화로 인해 여기가 제주라는 느낌을 온전히 받았다. 서귀진지는 조선시대 제주 방어시설인 3성 9진 가운데 하나였다. 안내판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1901년 서귀진성이 폐지된 이후, 관아 건물은 정의공립보통학교, 서귀공립심상소학교 등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고, 4·3사건 때에는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성곽을 헐어내 4·3성을 쌓는 데 이용되었다. 이후에는 집의 울타리나 밭담으로 활용되면서 대부분 훼손되었다’이었다. 우리 근대사의 불행이 함축되어있는 것 같았다. 4·3성에서 올레 18코스 닭머루를 지나(순방향)면 바로 보이는 언덕에 있던 신촌 4·3 성터도 떠올랐다. 초록의 잎에 하얀 꽃이 핀 토끼풀과 노란 민들레들이 서귀진지를 덮으며 조용히 위로하고 있었다.
서귀진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바로 도니 낮은 오르막길이었다. 제주어 공모전에서 수상한 문구들이 벽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느낌으로 이런 의미이겠구나 싶었다. 인도 바닥에는 이중섭거리를 알리는 안내석이 박혀있고, 솔동산이라는 안내판부터 내리막길이었다. 내리막 끝에 있는 거대한 화살과 활의 모형을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여기가 이중섭 거리였다. 이중섭 거리라고 해서 예술적인 느낌이 물씬 풍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흐린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없어 그런 느낌은 없었다.
거리 입구에 있는, 관람하지 못한 이중섭 전시공간을 스쳐 골목으로 길은 빠졌다. 이중섭 화백이 잠시 쉬며 작품 구상을 했다는 두꺼운 몸통의 팽나무와 이중섭 미술관 신축 공사의 안내판 사이의, 돌담과 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걸었다. ‘이중섭의 꿈’의 조각상으로 이중섭 화백을 보고 이중섭 화백의 거주지로 들어섰다. 제주 서민의 초가집이었다. 이중섭 화백과 가족은 피난 와서 이곳에 1년을 머물렀다. 집주인 내준 방은 1.4평으로 작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이 머물렀던 작은 방에 백열전구가 단출하게 빛나고 있었다. 빛을 받은 하얀 벽지의 벽면은 창백했다. 차가운 느낌이 서린 공간에 있는 유일한 사물은 선반에 놓인 흑백사진이었다. 이중섭 화백이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다. 먹먹했다. 왠지 꽃 한 송이조차 없는 초라한 영정사진 같았기 때문이다. 추모공간 같았다. 텅빈 공간은 서늘한 외로움으로 가득했다. 그는 외로움에 익숙한지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구할 수 있다면 가족사진이라도 구해 그의 곁에 같이 놓았으면 했다. 그러면 이런 서늘한 외로움은 덜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공간이라는데 가장 쓸쓸한 공간이었다. 그의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사진만 있는 공간이지만 그래도 따뜻했으면 했다.
밖으로 나오니 한 여성이 천천히 마당을 거닐며 공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것까지 못 하고 다시 걸었다. 오르막이 끝나고 이어진 평지는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 끝났다. 여기까지가 이중섭 거리였다. 왠지 씁쓸했다. 벽화와 돌의자 그리고 보도블록에 새겨진 화백의 그림만이 화백의 이름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시장에서 길은 왼쪽으로 꺾으며 시내를 관통해 직진했다.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 도착했다. 6코스 종점스탬프와 7코스 시작스템프를 찍었다. 오전 11시 50분이었다.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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