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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옹이

7코스(제주올레여행자센터→서귀포 버스터미널, 12.9 Km) 1

by 커피소년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점심으로 간소했지만 정갈한 엉멍밥상을 먹었다. 이번 점심이 그동안 올레에서 먹었던 점심 중에서 가장 제대로 된 식사였다. 대부분은 시간에 쫓겨 편의점이나 음식점에서 급하게 먹었다. 커피도 제법 여유롭게 마셨다. 이전엔 커피조차 테이크아웃이었고 대부분은 편의점 커피였다. 제대로 된 점심과 커피를 마시니 주위를 둘러볼 여유 또한 생겼다. 여행자센터라고 해서 별 기대하지 않고 왔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3층 건물에 1층은 여행자센터, 2층은 올레 사무실, 3층은 여행자 숙박 층이었고 4층은 옥상정원이었다. 여행자센터의 시설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꽤 괜찮은 카페 같았다. 배낭들만 없었다면 카페라고 믿기에 충분했다. 한쪽 벽에는 완주하면 찍을 수 있는, 437KM, 27 ROUTES라는 문자를 품고 있는 둥근 원이 그려진 포토존이 보였다. 종도 있었다. 완주하면 칠 수 있는 것 같았다. 빨리 완주하고 이곳에서 종도 치며 당당히 찍고 싶었다. 도로 맞은편에 새로 지은, 숙박자를 위한 올레스테이와 올레 관련 기념품을 파는 올레별책부록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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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센터 앞엔 가로수 두 그루가 서 있다. 가지 하나 없는 두꺼운 줄기와 줄기가 사라진 곳에서 위쪽의 여러 방향으로 뻗고 있고 가지들 그리고 초록의 잎들이 무성하게 그 가지들을 덮고 있다. 두꺼운 줄기 또는 몸통에는 털 같은 초록의 풀들이 자랐고 풀 사이에 옹이들이 나무의 굴곡을 만들었다. 옹이는 흉한 것이 아니라 나무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옹이는 가지가 부러지거나 잘려서 생긴 상처의 흔적이다. 상처가 났어도 나무는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며 건강하게 생장을 이어간다. 어쩌면 올레길은 나무일지도 모른다. 좋은 자연풍광은 뻗어나가 초록의 잎을 피우는 가지 같고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 특히 4·3 사건의 현장은 옹이 같다. 상처 난 나무가 긴 시간 들여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린 회복한 결과가 단단한 옹이다. 옹이가 있기에 나무는 다른 가지들을 뻗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4·3 사건도 오랫동안 수면에 있었고 그 인고와 기다림 끝에 세상에 드러났다. 길에서 보게 되는 4·3 안내판과 기념관 등이 그 결과이고, 올레길의 단단한 옹이였다. 옹이 같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드러낼 수 있기에 올레길은 소중하고 다양한 이야기로 풍성해질 수 있었다.

20250520_124828.jpg <나무를 보며 올레길을 생각했다>

커피와 함께 여행자센터 앞에 있는 가로수를 보며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재충전되었으니 떠나야 했다. 여러 갈래로 분기되는 도로 끝쯤에서 보게 되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있는 사이 하얀 안개가 시내까지 들어와 자욱했다. 길은 도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 서귀포 칠십리 시공원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건널 때 연외천의 풍경이 너무 멋있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두 명의 남자도 나의 행위를 보곤 풍경을 찍었다. 등산복 차림이어서 올레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공원에서 사진을 찍으며 속도를 늦추자 공원을 벗어났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20250520_125853.jpg <안개가 자욱했다>
20250520_130254.jpg <연외천 풍경, 천지연 폭포와 연결된다>

공원은 파크골프장이 있을 만큼 넓었다. 인상적인 것은 ‘작가 산책의 길’이라고 불리는 길이었다. 어떤 길일까? 제주 또는 서귀포와 관련된 시비와 노랫말 비로 조성된 길이었다. 때론 박석에도 있었다. 그래서 시(詩)공원이었다. 보이면 잠시 멈춰 조용히 읽어보았다. 또한 공원에서는 천지연 폭포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쏟아지는 폭포를 멀리서 편히 볼 수 있었다. 안개로 인해 뿌연 폭포의 풍경이 전경의 생생한 초록 나무들과 대비되면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난 공간 같았다. 하늘과 땅이 만나 이루어진 연못이라는 천지연이라는 이름이 지금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현대식으로 변형하면 한 여인과 그녀를 짝사랑한 스토커 남자 그리고 그 스토커를 퇴치하여 그녀를 구해준 용의 전설도 폭포에 서려 있다. 폭포를 보니 서귀포에는 다른 지역보다 폭포가 많다고 느꼈다. 서귀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지하로 물이 잘 스며들지 않는, 마그마가 분출할 때 물과 합쳐서 만들어진 수성응회암이 넓게 분포해 있기 때문이고 또한 용천수도 많이 솟아서 그렇다고 한다.

20250520_131903.jpg <천지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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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관련 시비>

공원 길이 끝나는 지점에 새섬전망대 화살표가 보였다. 서귀포항 방파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새섬은 서귀포항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억새풀인 새(茅)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망대에 가봤다. 날이 맑은 날에는 문섬, 섶섬, 새섬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안개가 자욱해서 포구만 보였다.

20250520_132453.jpg <새섬전망대. 안개가 자욱해서 새섬을 볼 수 없었다>

공원길을 나오자 길은 오른쪽으로 꺾여 도로를 따라 위로 갔다. 그런데 공원 이름에서 칠십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길이를 표기한 공원 이름을 못 봤기 때문이다. 칠십리는 서귀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를 제주(濟州)ㆍ대정(大靜)ㆍ정의(旌義) 등 행정구역을 세 곳으로 나누었다. 당시 동쪽을 담당하고 있었던, 지금의 표선면에 있는 정의현의 성 관문에서 서귀진까지의 거리가 칠십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칠십리는 예전부터 서귀포를 의미했고 공원의 이름에 이를 사용한 것이었다.

20250520_132843.jpg <제주스러운 길과 앞서 가는 그녀들>

도로의 인도에서 어느 순간부터 앞에 여성 두 명이 걷고 있었다. 한 명이 쓴 감귤 색 모자에서 올레길에 있는 것을 확신했는데 지나온 공원에서는 못 봤다. 마치 다리에서 공원까지 함께 했던, 지금은 보이지 않는 남성 두 명과 바통을 터치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삼매봉 공원 입구까지 같이 걸었다. 돌담과 감귤 나무 등으로, 제주스럽게 잘 정비된 길은 회전식 교차로에서 외돌개를 가리키는 안내판을 따라 왼쪽으로 꺾였다. 남색 바탕에 주차금지 고깔을 쓰고 빗자루를 탄 마녀와 달 그림의 벽화가 순간 날 웃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여성 듀엣인 옥상달빛을 연상시키는 별빛옥상이라는 카페가 보였다. 오늘의 일정을 무사히 마치면 그녀들의 노래인 ‘수고했어, 오늘도’를 들어야겠다. 살짝 오르막인 길이 내리막으로 변하는 곳에서 길은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올라갔다. 이곳에서 내 앞을 걷던 그녀들은 도로로 그냥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질러 올레길은 이쪽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 중 한 명이 “알고 있어요. 우리들은 7코스를 예전에 돌아서 외돌개 지름길로 가려고 해요. 감사해요.”큰 소리로 말했다. 잘 가시라고 말하고 길을 올랐다. 내가 오지랖이 너무 넓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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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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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듀엣인 옥상달빛을 연상시키는 별빛옥상이라는 카페/ 그녀들과 갈라진 언덕>

삼매봉까지 잘 닦인 길이었고 안개로 인해 주변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오르며 올레를 완주하고도 그녀들처럼 다시 올까?라는 반문을 했다. 만약 다시 온다면 지금과는 다른, 그녀들처럼 편한 마음으로 즐기며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삼매봉 정상에는 남성정이라는 팔각정이 있고 상단의 각 면에는, 시조가 쓰인 검은 나무판들이 걸려있었다. 풍경을 자욱한 안개가 지워서 팔각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대신 무병장수별이라는 남극노인성(카노푸스)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였다. 이 별이 밝으면 국운이 융성하고 전쟁이 사라진다고 한다. 또한 이 별을 세 번 보면 무병장수한다는 말도 있다. 사진을 보니 시리우스 별 아래에 있고 수평선과 가까운 곳에서 빛났다. 4코스 해비치호텔리조트 근방에서 이런 안내판을 본 것이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결국 여기서 또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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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봉에 이르는 길과 정상에 있는 남성정이라는 팔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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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정 상단에 시조가 보인다 / 남극노인성>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과는 다르게 가팔랐고 나무 계단이었다. 계단만 보이면 무조건 무릎이 먼저 생각났다. 다행히 스틱이 있어 그것의 도움을 받으며 내려갔다. 가파른 길은 도로에서 멈췄다. 그녀들이 지름길이라고 했던 그 도로였다. 오른쪽으로 따라갔다. 앞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스틱 두 개를 이용하여 올레길을 걷고 있는 남자 한 명이 걷고 있었다. 7코스를 시작하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였다. 그도 삼매봉을 패스하고 도로를 따라왔을까? 나만 길을 온전히 걷고 다른 이들은 계주 하듯 그 길을 바통 터치하며 걷고 있다는 아이 같은 상상을 해 봤다. 길은 황우지 선녀탕 안내판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 다르게 트인 공간이 나왔다. 작은 간세가 이 길이 돔베낭길이라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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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봉에서 내려가는 계단 / 또 다른 올레길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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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절벽에 상록수가 울창한 숲. 동쪽의 문섬과 새섬, 남서쪽의 범섬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곳이다. 돔베는 제주어로 도마, 낭은 나무를 뜻한다. 예전에는 도마처럼 잎이 넓은 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솔빛바다라는 카페의 외곽으로 잘 만들어진 나무테크 길이 이어졌다. 길이 바다의 끝에 이르렀을 때 황우지 해안의 출입제한을 알리는 현수막이 더 이상 바다로 향하는 마음을 막았다. 현수막 너머로 침입한 무장공비를 격퇴시킨 전적비가 세워져 있고, 바다를 넘어 안개 때문에 서귀포항과 새섬을 연결하는 새연교가 희미하게 보였다. 테크길 너머에는 좀 더 걸으면 보게 될 외돌개와 동너븐덕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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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빛 카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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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오른쪽 사진에서 멀리 새연교가 보인다>

동너븐덕은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바다로 향해 돌출한 기암괴석으로 옥빛 바다 위에 신선바위, 문섬, 범섬, 섶섬이 미려하게 자리 잡은 모습과 새연교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남주해금강이라고 일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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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븐은 ‘넓은’이라는 의미이고, 덕은 ‘언덕’으로 동너븐덕은 동쪽에 있는 넓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옆에 간단한 지도가 있고 걸으면 볼 수 있는 지형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안개가 낀 날에 바다에 있는 이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황우지 해안을 볼 수 있을까? 해서 길을 이탈하여 반대 방향(황우지 해안은 올레길 반대방향에 있다)으로 걸었다. 내가 황우지에 끌린 것은 해변 때문이 아니라 황우지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황우지는 무지개를 뜻하는 제주어 황고지에서 나왔고 무지개 모양의 둥근 해안 절경 때문에 황우지 선녀탕이라고도 불린다. 어떻게 생겼길래 무지개라고 불릴까? 그 형태를 보고 싶었다. 전망대가 있었지만 역시 안개로 인해 볼 수가 없었다. 바람개비만이 서 있었고 바람개비 너머로 파도를 막아준다는 돌기둥을 살짝 보여줄 뿐이었다. 조금 더 움직이니 그 돌기둥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돌기둥과 맞은편 평평한 암석 사이를 잇고 있는 구조물이 보였는데 인공적으로 만든 것인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이 구조물로 인해서 안전하게 바다 수영을 할 수 있는 작은 수영장이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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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지 해안 전망대와 바람개비>
20250520_140544.jpg <돌기둥 수영장?>

돌기둥만 보고 되돌아와 걸었다. 나무테크로 잘 정비된 길이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길의 옆구리가 갑자기 터진 듯 확 열린 넓은 공간이 나왔다. 바로 동너븐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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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0_141001.jpg <동너븐덕>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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