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탐구 17] 장자 vs 묵자
한여름의 폭염이 다시 찾아온 어느 날, 한 대학 강당에는 수십 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주제는 단순하지만 무겁고 절박했다. “환경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강당 안은 무거운 공기와 동시에 진지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어떤 이는 손수 제작한 피켓을 들고 있었고, 어떤 이는 두꺼운 통계자료가 빼곡한 프린트를 펼쳐놓고 있었다. 또 다른 이는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외쳤다.
“더 이상 기후 위기는 먼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우리가 마시는 물, 우리가 살아가는 집값과 월세의 문제와 다 맞닿아 있습니다.”
그 순간 청중 속에서 다른 한 명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부의 규제 강화나 새로운 제도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자연과 거리를 좁히며, 덜 쓰고 덜 소비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강당은 잠시 술렁였다. 앞의 발언이 묵자적 평등주의의 목소리였다면, 뒤의 발언은 분명 장자의 무위 사상에 가까웠다. 청년들은 서로 다른 철학자의 목소리를 빌려 현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은 이 두 철학의 대립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한편으로는 집값, 학자금 대출, 고용 불안정 같은 사회적 불평등의 벽에 부딪히며, “제도가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묵자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잉 경쟁, 끝없는 스펙 쌓기, 소비사회가 강요하는 욕망의 압박 속에서,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덜 간섭하며 살아야 한다”는 장자의 지혜를 찾게 된다.
실제로 강당 밖 거리에서도 두 흐름은 충돌하고 있었다. 도심 곳곳에서 “주거 정의”를 외치는 청년들의 행진이 이어졌다. 그들은 묵자처럼, 사회적 불평등을 제도의 힘으로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는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실천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장자처럼, 과도한 소비와 인간의 간섭이 불러온 자연 파괴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의 생활을 바꾸고 있었다.
이 두 흐름은 마치 두 강물이 한 도시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풍경과 같았다. 하나는 ‘사회적 평등’을 향해 굳건히 흐르는 묵자의 강물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의 조화’를 향해 잔잔히 흘러가는 장자의 강물이다. 그리고 청년 세대는 바로 그 두 강물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들은 매일의 선택 속에서 묻는다.
“나는 덜 소비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사회적 평등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제도를 바꾸는 데 힘을 써야 하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개인적 고민을 넘어서,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 된다.
오늘의 도입은 이 두 철학자의 오래된 목소리를 청년 세대의 언어로 되살려 놓는다. 장자는 묻는다.
“인간이 자연에 덜 간섭한다면, 세상은 더 자유로워지지 않겠는가?”
묵자는 반박한다.
“사람들이 평등하게 나누지 않는다면, 사회는 불의와 불평등으로 무너지지 않겠는가?”
강당의 토론은 단순한 학문적 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청년 세대가 매일 부딪히는 현실적 삶의 선택이었고, 기후 위기와 사회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파도 앞에서 길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이 회차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무위와 평등, 환경과 사회, 자유와 연대”라는 철학적 대립 속에서, 우리는 청년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떤 균형을 찾아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장자와 묵자의 사상은 과거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넘어, 오늘날 기후 위기와 불평등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770~221년)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풍성한 사상적 꽃이 피어난 시기였다. 수많은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며 끝없는 전쟁을 벌였고, 백성들은 가난과 불안 속에 신음했다. 하지만 바로 이 혼란이 사상가들에게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해야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인간이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시대에 백가쟁명(百家爭鳴), 즉 수많은 학파들이 각자의 해법을 제시하며 철학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공자는 도덕과 예(禮)를 통한 질서 회복을, 묵자는 평등과 겸애(兼愛)를 통한 사회 안정화를, 장자는 인간 중심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무위(無爲)를 설파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문제, 곧 사회 혼란과 인간 삶의 불안이라는 배경을 공유했지만, 접근 방식은 극명히 달랐다.
묵자는 당시의 사회 현실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쟁과 빈부격차, 권력자들의 사치가 백성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겸애(兼愛)”, 곧 차별 없는 사랑을 사회 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다. 한쪽에 부가 집중되는 현실에서 묵자는 모든 이가 평등하게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비명(非命)”을 외쳤다. 당시에는 하늘이 모든 운명을 정한다는 ‘천명(天命)’ 사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묵자는 이런 사상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도구라고 비판했다. 가난한 자가 “이것이 내 팔자”라며 체념하게 만들고, 부유한 자는 “하늘이 나를 선택했다”며 기득권을 누리는 구도였다. 묵자는 이를 거부하며, 인간 스스로가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묵자의 철학은 철저히 현실적이었다. 그는 화려한 이상보다는 “사람들이 당장 덜 고통받는 길”을 추구했다. 집 없는 이가 집을 갖게 하고, 배고픈 이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묵자는 초기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반면 장자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현실의 불평등이나 제도 개혁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의 집착과 욕망을 문제 삼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가지려 하고, 더 나아가려 하며, 서로 경쟁하다가 결국 불행해진다고 본 것이다.
장자는 그래서 “무위(無爲)”를 강조했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인위적 간섭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는 ‘호접몽(胡蝶夢)’의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꿈에서 나비가 된 장자는 깨어나 자신이 장자인지 나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집착하는 경계와 구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장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합일이었다. 인간이 억지로 세상을 통제하고 질서를 만들려는 순간, 오히려 더 큰 혼란과 고통이 생긴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권력자들이 주도하는 법과 제도보다, 개개인이 욕망을 줄이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삶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동일한 혼란의 배경 속에서 묵자와 장자는 완전히 다른 길을 제시했다.
- 묵자는 “사회적 평등을 제도로 강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모두가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장자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자유”를 찾았다. 인간의 인위적 제도가 오히려 불행을 키우므로, 욕망과 간섭을 줄이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환경위기와 사회 불평등의 문제 역시 이 두 철학적 관점으로 나눠볼 수 있다.
- 환경 위기는 장자의 지혜처럼 “과도한 간섭과 소비를 줄이고, 무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해법을 요청한다.
- 사회 불평등은 묵자의 시선처럼 “제도의 개혁과 사회적 분배”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를 던진다.
청년 세대는 바로 이 두 문제, 환경과 불평등의 교차로에 서 있다.
- 한쪽에서는 기후위기, 미세먼지, 폭염, 자원 고갈의 문제를 매일 체감하며 “장자의 무위와 자연의 삶”을 떠올린다.
- 다른 한쪽에서는 학자금 대출, 불안정한 노동, 주거 불평등을 겪으며 “묵자의 평등주의”를 절실히 원한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이 새로운 철학을 낳았듯, 오늘날의 청년 세대 또한 비슷한 상황 속에서 철학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묵자의 길을 따라 제도의 힘으로 평등을 확보할 것인가, 아니면 장자의 길을 따라 욕망을 줄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장자는 중국 철학사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으로 기억된다. 공자가 사회적 질서와 도덕적 규범을 세우려 했고, 묵자가 평등과 제도의 개혁을 강조했다면, 장자는 그 모든 것에서 한 발 비켜 서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 규범, 욕망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는 굴레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최고의 철학적 가치로 내세웠다.
장자의 철학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일화는 바로 호접몽이다. 장자는 꿈속에서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뒤, 그는 자신이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경계—나와 타자, 현실과 꿈, 인간과 자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준다. 장자는 이러한 경계를 허물고,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일깨운다. 자유란 인간이 만든 제도적 울타리 안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무위는 흔히 오해되듯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인위적 간섭을 최소화하는 삶의 태도다. 인간은 끊임없이 제도를 만들고 규범을 강제하면서 세상을 통제하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종종 더 큰 불행을 낳는다.
예를 들어, 끝없는 전쟁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장자는 이런 인간의 욕망이 결국 스스로의 목을 죄는 족쇄가 된다고 보았다. 무위는 욕망의 사슬을 끊고, 자연이 가진 자기 질서를 존중하는 길이다.
그는 물의 흐름을 자주 비유로 사용했다. 물은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그 낮음을 통해 강과 바다를 이루고 결국 만물을 길러낸다. 무위는 바로 이런 물의 성질과 같다. 억지로 나아가지 않고, 힘으로 강제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길을 걸음으로써 더 큰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장자가 추구한 자유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택의 자유’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현대의 자유가 소비와 소유, 지위의 확장으로 이해되는 반면, 장자의 자유는 소유와 지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였다.
그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좇으며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깊이 경멸했다. 누군가는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난해지며, 누군가는 권력을 쥐고, 누군가는 억눌린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장자는 그것을 초월해 자연 속에서 한 마리 물고기처럼, 한 마리 새처럼 살아가는 자유를 추구했다.
이러한 철학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경쟁과 비교의 문화와 강하게 맞닿아 있다. 끝없는 스펙 경쟁, 소득 격차,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청년들은 자유보다는 억압을 더 체감한다. 장자는 이들에게 “네가 다른 이보다 더 많이 가졌는가, 더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가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네 마음이 욕망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환경 위기 속에서 장자의 철학은 새로운 울림을 가진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무한한 개발을 이어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미세먼지와 같은 위기로 돌아왔다. 장자는 이런 사태를 이미 수천 년 전에 예견한 듯하다. 그는 “인간이 자연을 거스르는 순간, 자연은 반드시 반격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장자의 무위 철학은 오늘날 지속 가능한 삶의 지혜로 다시 읽힌다. 무위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삶, 인간이 가진 욕망을 절제하며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구호가 아니라,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 모두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다.
장자의 철학은 특히 오늘의 청년들에게 강력한 울림을 준다. 많은 청년들이 불안정한 노동, 치솟는 집값, 치열한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더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쳐 쓰러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장자는 이들에게 “잠시 멈추라”고 속삭인다. 무위는 도망이 아니라, 억지로 나아가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의 길을 돌아보라는 제안이다. ‘더 많이’가 아니라 ‘충분히’라는 감각, ‘경쟁’이 아니라 ‘조화’라는 가치가 청년들에게 새로운 자유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
장자의 철학은 단순한 고대의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환경 위기와 경쟁 사회 속에서 방향을 잃은 청년들에게 “자연과 함께, 무위 속에서 자유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제도와 욕망의 굴레를 넘어설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
장자가 인간의 욕망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의 자유를 강조했다면, 묵자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인간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도와 실천의 차원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묵자의 철학은 단순히 개인의 내적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어떻게 평등과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묵자는 춘추전국시대, 끊임없는 전쟁과 착취가 이어지던 시기에 등장했다. 제후들은 패권을 다투기 위해 백성을 전쟁터로 몰아넣었고, 농민들은 무거운 세금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부와 권력은 소수 지배층에게 집중되었고, 다수의 민중은 굶주림과 고통 속에 살아갔다.
묵자는 이 현실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도덕과 예(禮)를 통해 사회를 바로 세우려 했다면, 묵자는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해법을 내세웠다. 그는 당시 지배층의 사치와 낭비를 강하게 비판하며, 백성을 돌보지 않는 정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묵자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겸애(兼愛)**다. 겸애란 ‘차별 없는 사랑’으로, 가족·친척·지배층과 같은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공자의 인(仁)이 가족과 친족 중심의 확장적 사랑이라면, 묵자의 겸애는 보편적이고 평등한 사랑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과 갈등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만약 모든 이가 서로를 차별 없이 사랑한다면, 전쟁은 사라지고 사회는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겸애는 단순한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사회 질서를 재편하는 철학적 토대였다. 묵자는 통치자가 겸애의 원칙에 따라 백성을 돌보고, 백성 또한 서로를 차별 없이 대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사회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묵자가 내세운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은 비공(非攻), 즉 전쟁 반대였다. 그는 전쟁이 소수 지배층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일 뿐, 대다수 백성에게는 고통과 죽음만을 안겨준다고 비판했다.
묵자는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성(城)을 방어하는 기술을 개발해, 부당한 전쟁을 막으려 했다. 이는 단순한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실제적 실천을 동반한 평화주의였다. 전쟁을 통해 권력을 확장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묵자의 비공 사상은 혁명적이었다.
오늘날 이 사상은 전쟁과 무기 경쟁에 휘말린 국제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국가의 이익과 체제 유지를 위해 평범한 시민들이 희생되는 현실은 춘추전국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묵자의 비공은 “과연 전쟁이 불가피한가, 아니면 권력자들의 욕망을 정당화한 수단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묵자는 또한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화려한 건축물, 값비싼 장례 의식, 필요 이상의 의례적 소비를 모두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했다.
대신 그는 검소함과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통치자는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편히 살 수 있도록 정책을 펴야 하며, 국가는 부의 편중이 아닌 공정한 분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묵자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체면이나 전통의 관습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실용적 결과였다.
이 점에서 묵자는 오늘날의 사회 정책 논의와도 깊이 연결된다. 복지 제도, 사회 안전망, 불평등 해소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철학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자의 사상은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도 강한 울림을 준다. 청년들은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노동시장은 불안정하고, 교육과 기회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묵자는 이 현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너희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회는 결코 평등해질 수 없다. 너희가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불평등은 무너진다.”
겸애는 오늘날 연대와 협력의 철학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청년 세대가 불평등에 맞서 연대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낼 때, 묵자의 철학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묵자는 고대 중국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차별 없는 사랑(겸애), 전쟁 반대(비공), 검소한 경제와 실용주의를 통해 공동체 전체의 평등과 평화를 추구했다.
장자가 개인의 자유와 자연과의 합일을 강조했다면, 묵자는 공동체의 평등과 실질적 정의를 강조했다. 두 철학은 서로 다른 길을 제시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환경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 앞에서 서로 보완적인 길을 열어 준다.
현대의 한 대학 강당. 주제는 “환경 위기와 사회적 평등,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강당에는 청년 학생들이 가득 모여 있다. 무대 위에는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자리에 초대된 듯한 두 철학자가 앉아 있다. 한 사람은 헐렁한 옷차림에 맨발로 앉아 있는 장자, 다른 한 사람은 단정한 복장과 강한 눈빛을 지닌 묵자다. 사회자가 토론을 시작한다.
묵자:
“오늘의 사회는 불평등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소. 지구의 환경 위기도, 사회적 격차도 결국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차별하기 때문이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겸애(兼愛)를 주장하였소. 모든 사람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전쟁을 멈추며, 사치를 줄이고,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경제를 실현해야 하오. 지금 청년들이 겪는 고용 불안, 기후 위기, 교육 격차는 바로 이 겸애가 실천되지 않기 때문이라오.”
청중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친다.
장자:
“묵자여, 그대의 뜻은 고귀하나 나는 우려되는 바가 있소. 인간이 억지로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사랑이 강제되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가 되오. 나는 사람들에게 ‘겸애’를 강요하기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합일하며 무위(無爲)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했소. 그렇게 하면 굳이 억지로 규범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타인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오.”
학생들 사이에서 “맞아, 요즘 너무 많은 규범이 강요돼 숨 막혀”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묵자:
“그러나 장자여, 그대의 무위는 너무 이상적이오. 지금 백성은 굶주리고, 청년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기후 위기로 지구가 병들어가고 있소. 우리가 ‘자연스러운 조화’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소? 철학은 현실의 고통을 해결해야지, 그저 초월적인 자유 속에서 개인의 마음을 달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이 필요하다오.”
장자:
“나는 다만 인간이 너무 많은 규범과 계획으로 세상을 더 망친다고 보오. 억지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가 더 큰 혼란을 부르는 것을 보지 않았소? 권력자들이 정의를 말하며 전쟁을 일으킨 사례, 이상적 사회를 내세우다 전체주의로 흐른 역사를 보시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과도한 제도와 규범의 폭력을 경계하자는 뜻이오.”
청중은 잠시 숙연해진다. ‘행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덜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공기 중에 맴돈다.
청년 사회자:
“오늘날 청년 세대는 기후 위기 앞에서 ‘행동하라’는 목소리와 ‘소비를 줄이라’는 목소리 사이에서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까, 아니면 내려놓아야 합니까?”
묵자:
“나는 분명히 말하리다. 작은 행동이라도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소.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환경을 해치는 산업을 반대하며, 불평등한 구조에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곧 겸애의 시작이오. 우리가 ‘모두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길 때, 사회는 변한다오. 청년들이 일상의 선택 속에서 연대와 실천을 보여줄 때, 미래는 달라질 수 있소.”
장자:
“나는 먼저 각자가 자기 내면의 욕망부터 들여다봐야 한다고 보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욕망이 결국 환경을 파괴하고 불평등을 낳는 것이 아니오? 사회적 실천도 중요하나, 내면의 자유 없이 행동만 하면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이오. 청년들이 먼저 자기 마음을 비우고 단순하게 살아갈 때, 그 삶 자체가 이미 세상에 대한 변혁의 메시지가 될 것이오.”
사회자:
“결국 두 분의 말씀은 다른 듯하지만, 같은 질문을 향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묵자는 실천과 연대를, 장자는 자유와 절제를 강조합니다. 어쩌면 청년 세대가 취해야 할 길은 두 길의 조화일지도 모릅니다. 행동하면서도 욕망을 절제하고, 연대하면서도 내면의 자유를 잃지 않는 것 말입니다.”
청중의 청년들은 깊은 침묵에 잠긴다. 토론은 끝났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토론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날 기후 위기는 단순히 환경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폭염과 홍수는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냉방시설, 보험, 해외 이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청년·노인·저소득층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에서도 최근 여름 폭염으로 배달·건설·야외 노동에 종사하는 청년들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기후 재난’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계층에 따라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 사회적 재난이다.
이 지점에서 묵자가 말한 겸애는 중요한 해법을 던진다. 모든 이들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차별 없는 정책을 통해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장자는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두 철학자의 목소리는 지금의 불평등한 기후 현실에서 동시에 울려 퍼진다.
환경 문제를 직접 체감한 청년 세대는 새로운 실천 방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 기후 행동: 세계 곳곳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이 기후 위기 대응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에 나섰다. 그레타 툰베리로 대표되는 ‘Fridays for Future’ 운동은 한국에서도 동조 집회를 일으켰다. 이들은 단순한 시위에 그치지 않고, 의회와 기업을 향해 ‘탄소중립 목표를 앞당기라’고 구체적 요구를 내세운다. 이는 묵자의 실천적 연대 정신을 계승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미니멀리즘과 탈소비 운동: 또 다른 청년 집단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제로 웨이스트’ 생활을 실천한다. 일회용품 대신 다회용기를 사용하고, SNS에서 “비우기 챌린지”를 전개하며 자신의 생활 방식을 공유한다. 이는 장자의 무위 철학, 즉 욕망을 줄이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태도를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청년 세대는 서로 다른 철학을 실천적 차원에서 동시에 구현하며, 새로운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국제 사회에서는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기후 위기 대응이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 문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탄소 배출에 가장 적게 기여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드러났다. 남반구 개발도상국, 빈곤층, 청년 세대가 바로 그 피해자다.
한국에서도 ‘기후위기비상행동’과 같은 시민단체는 “불평등을 줄이지 않으면 환경 위기도 해결할 수 없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에너지 전환 정책이 단순히 탄소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도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묵자의 겸애 정신이 그대로 현대 사회의 구호 속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더 이상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수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당장 기후 위기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불안정한 노동, 불평등한 주거, 기후 불안정이 겹치면서 청년들은 생존의 문제를 절박하게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직접적이고 날카롭다.
한편, 장자의 시선에서 보자면 청년 세대는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의 방식을 전환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덜 소비하고, 단순하게 살며, 자연과 함께 존재하기.” 이것이야말로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혁명이다.
환경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은 단순히 과학적·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과제다. 묵자의 겸애는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장자의 무위는 욕망 절제와 삶의 전환을 촉구한다. 청년 세대는 두 길을 동시에 걷고 있다.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의 소비를 줄이고 생활 방식을 바꾸고 있다.
결국 이 시대의 청년들은 장자와 묵자의 대화 속에서 답을 찾는 새로운 실험자들이다. 그들의 실천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 미래 사회의 철학적 기반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앞선 논의에서 드러난 것처럼 장자와 묵자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장자는 인간의 욕망을 비우고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고 했고, 묵자는 차별 없는 사랑과 실천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두 길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과 조화하려는 개인의 태도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공동체의 태도는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즉, 장자의 무위는 개인의 삶의 방식에 뿌리를 두고, 묵자의 겸애는 제도와 사회 구조를 지향한다. 이 두 축이 만날 때 우리는 ‘환경 정의(Climate Justice)’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환경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증폭시키는 관계에 있다. 환경 위기는 약자를 더 크게 흔들고, 불평등은 환경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균형을 위한 철학적 프레임은 다음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욕망의 절제(장자) – 개인 차원에서는 과잉 소비를 멈추고 단순한 삶을 회복해야 한다. “덜 쓰는 것”이 곧 지구를 살리고,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길이 된다.
2) 평등의 실천(묵자) – 사회 차원에서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기후 위기 대응 비용이 특정 계층에 전가되지 않도록 보편적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한다.
3) 연결의 공론장(청년 세대) – 현실에서 이 두 가지 축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청년 세대다. 그들은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동시에, 일상에서 소비 절제와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년 세대가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새로운 균형의 설계자라는 점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환경을 지키는 일이 왜 늘 우리 세대의 희생으로 귀결되는가?”
“기후 위기의 책임은 누가 더 크게 져야 하는가?”
“덜 소비하는 삶이 개인의 선택을 넘어 사회적 제도로 확장될 수는 없는가?”
이 질문들은 장자의 무위와 묵자의 겸애를 현실 속에서 결합시키려는 시도다. 즉, 청년 세대는 개인의 절제와 사회적 정의를 동시에 추구하며 새로운 철학적 균형점을 만들어가고 있다.
환경과 평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를 연결하는 사고가 필요하다. 장자의 자연 친화적 태도는 ‘환경적 지속 가능성’을, 묵자의 평등주의는 ‘사회적 지속 가능성’을 보장한다. 청년 세대가 두 철학의 교차점에서 균형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얻는다.
즉, “무위와 겸애의 조화”가 곧 환경과 평등을 동시에 지켜내는 길이다.
장자와 묵자의 사상은 2,000년 전 이야기지만, 오늘날 청년 세대가 직면한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기후 위기는 단순한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을 뒤흔드는 문제다. 불평등은 단순한 경제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세대가 미래를 설계할 권리 자체를 제한한다. 이 두 문제 앞에서 청년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지구를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나의 소비 습관이 누군가의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장자의 무위와 묵자의 겸애가 오늘날 던지는 동일한 물음, 곧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성찰이다.
오늘의 청년 세대는 과잉 소비 사회의 유혹 속에서 자란다. 더 많은 소유, 더 빠른 성취, 더 화려한 이미지가 성공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장자의 무위는 묻는다. “정말 그것이 네 자유를 보장하는가?”
장자의 시선으로 보면, 자유는 더 가지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덜 가지는 데서, 욕망을 비우는 데서 온다. 미니멀리즘, 자발적 단순함, 환경 친화적 삶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장자가 말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현대적 실천이다. 청년 세대가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소비 사회가 강요하는 허상을 넘어선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반대로 묵자는 청년 세대에게 사회적 책임을 환기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고 말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불평등과 차별이 심화된 현실에서 더욱 절실하다. 기후 위기의 피해가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돌아가듯, 불평등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묵자의 겸애는 청년 세대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의 선택은 타인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 질문을 성찰할 때, 청년들은 단순한 개인의 소비자나 생존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장자의 무위와 묵자의 겸애는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오늘날 청년 세대의 삶 속에서는 하나의 교차로에서 만난다.
무위는 개인의 자유와 내적 평화를 지향한다.
겸애는 사회적 책임과 평등을 강조한다.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함께 실천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덜 가지는 선택은 환경을 살리고, 동시에 불평등을 줄이는 사회적 효과를 낳는다. 타인을 배려하는 겸애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망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결국 청년 세대가 직면한 질문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나는 자유롭게 살면서도, 동시에 타인과 자연에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적 숙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청년 세대가 맞이할 미래 사회의 조건을 결정짓는 선택지다. 자유와 책임, 환경과 평등은 따로 떨어진 주제가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양날의 축이다. 청년 세대가 이 균형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21세기의 철학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장자와 묵자가 남긴 유산은 단지 고대의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출발선이다. 무위와 겸애, 자유와 평등, 환경과 공동체라는 화두 속에서 청년들은 단순히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청년 세대는 단순한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철학적 시민이자 미래의 설계자로 자리매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