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탐구 18] 순자 vs 맹자
겨울이 다가올수록 도서관의 열람실은 더 빼곡해진다. 고3 수험생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자리를 맡고, 대학생들은 공모전 마감이나 토익 점수 준비로 노트북 불빛에 둘러싸여 있다. 누구는 스펙 한 줄을 더 적기 위해 인턴십을, 누구는 학자금 대출을 메우기 위해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택한다. 청년들의 일상은 “배움”이라기보다 “경쟁과 생존”의 연속에 가깝다. 그 속에서 종종 이런 질문이 스쳐 간다. “과연 인간은 본래 어떤 존재인가? 교육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이 질문은 단순히 입시 제도의 공정성 논란이나, 학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문제 제기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청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청년을 잠재력을 지닌 씨앗으로 보아, 기회를 주면 스스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믿어야 할까? 아니면 욕망과 게으름에 치우친 존재로 보아, 엄격한 규율과 제도를 통해 길들이고 다듬어야 할까? 이 물음은 바로 고대 중국에서 맹자와 순자가 격렬하게 다투었던 ‘인간 본성 논쟁’과 맞닿아 있다.
현대 한국 사회의 교육 풍경은 이 두 철학자의 논쟁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 한쪽에서는 창의적 학습법과 프로젝트형 수업을 강조하며, 청년의 자율성과 상상력을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과 닮아 있다. 인간은 본래 선하고, 잠재력을 지닌 존재이기에 올바른 환경만 제공하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치열한 입시 경쟁과 성과 중심의 제도를 통해 청년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훈육한다. 이는 순자의 성악설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은 본래 욕망에 끌리기에, 교육은 그것을 교정하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학 강의실에서, 입시 학원에서, 혹은 청년 취업 준비 현장에서 만나는 장면들은 모두 이 질문으로 이어진다.
“교육은 청년의 본성을 발현하는 장인가, 아니면 본성을 제어하는 장인가?”
“청년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통제해야 하는가?”
이 논쟁은 단순히 철학적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 청년들의 삶과 직결된 현실 문제다. 예컨대, 입시 제도의 개혁을 둘러싼 논란에서 어떤 이들은 창의성과 다양성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공정성과 엄격한 규율 없이는 교육이 무너진다고 말한다. 또, 대학 교육에서 프로젝트형 학습이나 비교과 활동을 확대하는 흐름은 맹자의 성선설적 교육관과 닮아 있다. 반면, 여전히 강력한 학점 관리, 자격증 취득, 시험 중심 문화는 순자의 성악설적 규율 교육의 유산과 닮아 있다.
이 두 철학자의 목소리는 단순히 과거의 고전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 세대는 그 울림 한가운데에 서 있다. 스스로를 잠재력 있는 씨앗으로 보고 세상이 기회를 주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자신을 끊임없이 다듬고 증명하며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원석으로 보는가.
따라서 이 글의 출발점은 단순한 옛 철학자의 사상 해설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교육의 풍경과 고민을 통해, 순자와 맹자의 논쟁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교육은 꽃을 피우는 일인가, 본성을 교정하는 일인가? 이 질문은 입시와 스펙 경쟁의 풍경 속에서, 그리고 청년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청년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는가? 그리고 청년은 스스로 어떤 교육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 오래된 질문이야말로, 21세기 청년 세대가 마주한 교육 문제의 철학적 뿌리를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8세기~3세기)는 역설적으로 “철학의 황금기”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의 시대였지만, 바로 그 위기 속에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치열하게 탐구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 질문은 놀랍게도 오늘날 청년 세대가 마주한 문제와도 이어진다. “인간은 본래 어떤 존재인가? 사회와 교육은 인간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춘추전국은 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시대였다. 주나라의 봉건 질서는 이미 무너져 각 지역 영주들이 자율적으로 패권을 다투었고,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무력만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 제도와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다. 지배자들은 백성을 다스릴 원리를, 백성들은 더 나은 삶을 살 길을 찾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백가쟁명(百家爭鳴), 즉 수많은 철학적 학파들이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오늘날로 치면, 모든 제도가 불안정한 사회에서 수많은 학자와 청년들이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의 고민은 지금 청년 세대가 직면한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불투명한 미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생존의 조건이었다.
당시 교육은 단순히 개인적 수양을 넘어, 국가와 사회의 흥망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었다. 그래서 각국의 군주들은 사상가들을 초빙하여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뒷받침하게 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파에 몰려들어 새로운 배움의 장을 찾았다.
공자, 맹자, 순자, 묵자, 장자 같은 인물들은 모두 이런 배경에서 활동했다. 이들에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길러내고 사회 질서를 바로 세우는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교육은 개인의 미래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교육은 여전히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좌우한다. 청년 세대가 어떤 가치관을 배우고 어떤 역량을 기르는가에 따라, 사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입시 경쟁이냐, 창의적 배움이냐, 공정한 평가냐, 포용적 성장 환경이냐 하는 문제는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니라 철학적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춘추전국 시대는 이미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시대에 “인간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혼란한 시대를 바라보며 어떤 학자들은 “사람은 본래 선하지만 제도가 망가져 타락한다”고 주장했고(맹자), 다른 학자들은 “사람은 본래 욕망에 끌리기에 규율과 교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순자).
맹자의 성선설은 교육을 본성을 발현하는 과정으로 본다. 씨앗이 이미 좋은 성질을 지녔듯,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이를 잘 돌보고 키우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순자의 성악설은 교육을 본성을 제어하는 과정으로 본다. 인간은 욕망과 이기심을 타고났으므로 이를 법과 규율, 훈육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사회는 무너진다는 주장이다.
이 두 관점은 단순한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국가 운영과 교육 제도의 근본 방향을 가르는 선택이었다. 교육이 자율성과 창의성을 북돋우는 장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규율과 훈육을 강조하는 장이 될 것인지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질문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입시 경쟁, 취업난,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교육의 의미”를 묻고 있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자율적 기회를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엄격한 제도를 통해 성과와 공정성을 확보해야 하는가. 이 논쟁은 바로 춘추전국 시대 맹자와 순자의 대립이 던졌던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결국 교육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전제 위에 세워진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교육의 방향이 달라지고, 그 교육을 받은 청년 세대가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 갈지가 결정된다.
맹자는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전쟁과 배신, 음모가 난무하는 시대였지만, 맹자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씨앗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철저한 관찰과 철학적 신념에 기반한 확신이었다.
맹자가 제시한 핵심 개념은 바로 **사단(四端)**이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성 속에 네 가지 도덕적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 측은지심(惻隱之心): 타인의 고통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
-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한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 사양지심(辭讓之心):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려는 마음.
-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
맹자는 이 네 가지 마음을 씨앗에 비유했다. 마치 나무의 씨앗이 햇빛과 물을 받으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인간은 누구나 이 도덕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곧 이 씨앗을 보살피고 키워내는 과정이다.
맹자에게 있어 교육은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본성을 꽃피우는 과정이다. 사람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환경이 그 성장을 방해하면 선이 자라나지 못한다. 반대로, 바른 환경과 올바른 스승을 만난다면 누구나 도덕적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맹자의 교육관은 현대 교육철학의 핵심 문제와도 통한다. “인간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가, 아니면 통제를 통해 길러야 하는 존재인가?” 맹자는 전자에 서 있었다. 그는 인간의 잠재력을 신뢰했고, 청년들에게도 도덕적 책임과 자율적 성장을 동시에 요구했다.
맹자의 성선설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 교육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곧 정치와 사회 제도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형벌과 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백성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도자가 그 본성을 존중하고 도덕적으로 다스릴 때 사회는 안정된다.
맹자는 이를 왕도정치(王道政治)라 불렀다. 힘과 폭력이 아니라 덕과 정의를 앞세우는 정치다. 왕이 백성을 가족처럼 대하면, 백성은 왕을 부모처럼 존중하게 되고, 사회는 자발적으로 조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이유는 단순히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희망의 철학이었다. 전쟁과 배신이 일상화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에게 여전히 도덕과 정의를 기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인간은 본래 선하다”라는 말은, 곧 “우리는 다시 선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라는 선언이기도 했다.
오늘날 청년 세대 역시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자주 냉소와 체념에 빠진다. 경쟁과 불평등,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인간은 결국 이기적이지 않은가”라는 비관적 질문이 떠오른다. 그러나 맹자의 성선설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인간은 여전히 선할 수 있으며, 교육과 공동체는 그 가능성을 키워낼 수 있다.”
현대 청년들의 고민을 맹자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보면 흥미롭다. 예를 들어, 청년들이 주도하는 기후 위기 운동이나 사회적 기업 창업, 봉사활동과 같은 실천은 모두 인간의 선한 본성이 사회적 차원에서 발현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다”는 태도는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맹자가 말한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청년 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이미 선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억누르지 말고 키워내라.”
물론 맹자의 성선설은 당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다. 모든 인간이 선하다면 왜 사회는 여전히 불의와 갈등으로 가득한가? 인간의 선한 씨앗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꽃피우기란 쉽지 않다.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맹자의 철학은 사회 제도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잘못된 환경 속에서는 그 씨앗이 쉽게 짓밟히고 만다.
이 지점에서 순자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이 본래 악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교육은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고 길들이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입장은 이후 중국 사상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교육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순자는 맹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출발했다. 그에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욕망과 이기심, 쾌락 추구의 본능을 가진 존재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말하는 악(惡)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추구하는 욕망이 방치되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뜻이다.
순자는 이렇게 썼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그 선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선은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과 교육, 규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철저한 현실주의적 분석이었다. 그는 인간이 욕망을 좇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어 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 하며, 권력과 부를 추구한다. 이런 욕망이 절제되지 않으면 사회는 갈등과 혼란으로 가득하게 된다.
맹자가 ‘측은지심’을 인간 본성의 증거로 보았다면, 순자는 그것조차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적 반응일 뿐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본래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선한 행위는 사회적 규율과 교육이 억제 장치로 작동할 때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가 강조한 핵심은 바로 예(禮)였다. 예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절제하고 사회적 질서를 세우는 규범이었다. 순자는 “예가 없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에게 교육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 본성이 악하므로, 교육을 통해 인간을 길들이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스승의 역할과 제도의 규율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순자는 사회 제도와 법, 규칙을 중시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하게 자랄 수 있다는 맹자의 낙관적 믿음 대신, 순자는 인간이 사회적 규율을 어길 수 있다는 불신 위에 철저한 훈련과 규제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순자의 성악설은 단순한 심리학적 진단이 아니라, 정치와 국가 운영의 철학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인간이 본래 악하기 때문에, 국가는 반드시 강력한 규율과 교육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과 제도는 필수적이다.
지도자는 도덕적 모범을 보이는 것뿐 아니라, 철저히 법을 집행해야 한다.
교육은 시민 모두에게 필수이며, 이를 통해 욕망을 절제하고 사회적 역할을 학습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 법가(특히 한비자)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진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순자의 제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순자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청년 세대의 교육과 사회적 규율 문제를 생각해 보자. 많은 청년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무제한적 자유는 자칫 방종으로 흐를 수 있다. 순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자유는 반드시 규율과 함께해야 하며, 교육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장치다.
예를 들어, 디지털 시대의 정보 소비를 떠올려 보자. 아무런 규제도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가짜뉴스, 혐오 발언, 과도한 중독이 확산된다. 순자의 입장에서 이는 인간의 본성적 욕망이 그대로 방치된 결과다. 따라서 공교육,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순자의 사상은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자율’과 ‘자기표현’을 강조한다. 그러나 순자는 묻는다. “자율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그의 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교육과 규율이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을 절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청년 세대가 불안정한 고용과 사회적 경쟁 속에서 흔들릴 때, 순자는 교육과 제도를 통한 자기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기계발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규율 속에서 발휘될 때 지속 가능하다는 것이다.
순자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맹자가 인간의 잠재적 선함을 강조하며 희망을 제시했다면, 순자는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규율 없는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지 않으면 사회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의 한 대학 강당. 무대 위에는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한쪽에는 온화한 눈빛으로 청년들을 바라보는 맹자, 다른 한쪽에는 단정한 자세와 엄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순자. 청중석에는 수백 명의 대학생들이 모여 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토론을 시작한다.
사회자:
“오늘의 주제는 ‘인간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그리고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입니다. 이 자리에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두 철학자, 맹자와 순자를 모셨습니다.”
청중이 웃음을 터뜨리고 박수를 치자, 맹자와 순자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다.
맹자:
“나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 인간의 마음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길에서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누구든 본능적으로 달려가 구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이 바로 인간이 선함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교육은 그 씨앗을 키우는 정원사의 손길일 뿐이지요.”
청년들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누군가 속삭인다.
“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어.”
순자:
“맹자의 말씀은 아름답지만, 나는 현실을 더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은 순간적 감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욕망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부를 탐하고, 권력을 갈망하며, 쾌락을 추구합니다. 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사회는 금세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지 않으며, 교육과 규율을 통해서만 선해질 수 있습니다.”
청중이 술렁인다.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부는 맹자의 쪽을 바라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청년 A:
“맹자 선생님, 순자 선생님. 저희 청년 세대는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좋은 성적, 취업, 승진을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지요. 이 과정에서 친구를 이기려 하고, 때로는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인간이 본래 악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맹자:
“그대들이 경험하는 경쟁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 제도의 산물이다.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가 욕망을 과도하게 자극할 때 그 선한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은 그 본성을 키워주고, 제도는 그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순자:
“아니다. 바로 그 모습이 인간 본성의 증거다. 욕망과 경쟁심은 본능이다. 그것을 억제하고 길들이는 힘이 바로 교육이고 규율이다. 따라서 제도와 법은 반드시 강해야 한다.”
맹자:
“나는 교육을 꽃을 가꾸는 정원사의 손길에 비유하오. 씨앗은 이미 땅속에 잠들어 있다. 정원사는 그것이 자라날 수 있도록 햇빛과 물을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기 때문에, 교육은 그 잠재력을 깨우는 일이다.”
순자:
“나는 교육을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에 비유하겠소. 인간은 본래 욕망의 쇳덩어리와 같아 거칠고 날것이다. 망치와 불길로 두드려야만 유용한 도구로 거듭날 수 있다. 교육은 인간을 길들이고 규율하는 힘이다.”
청중의 표정이 갈린다. 누군가는 맹자의 정원사 비유에 미소를 짓고, 또 다른 이는 순자의 망치질 비유에 고개를 끄덕인다.
청년 B:
“요즘 우리는 SNS 속에서 늘 비교당합니다. 누가 더 잘나가는지, 누가 더 멋진 삶을 사는지 끊임없이 평가받죠. 그러다 보면 질투와 분노가 쌓이기도 합니다. 맹자 선생님,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여전히 보십니까?”
맹자:
“물론이다. 비교와 질투 속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르는 사람도 돕지 않느냐?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을 어떻게 키워줄 것인가이다. SNS가 자극하는 것은 겉모습일 뿐, 본성의 선함은 교육과 공동체 속에서 자라난다.”
순자:
“나는 그 사례야말로 성악설의 증거라고 본다. 인간은 본래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하려 한다. SNS는 그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따라서 더 강한 교육과 규율이 필요하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법적 규제, 사회적 규범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사회자:
“맹자 선생님과 순자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드는 생각은, 두 입장이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결국 교육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출발점이 다르지요. 맹자는 본성이 선하다고 보고, 그 씨앗을 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순자는 본성이 악하다고 보고, 욕망을 억제하고 길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맹자:
“인간은 선하다. 교육은 본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순자:
“인간은 악하다. 교육은 본성을 길들이는 일이다.”
청중은 긴 박수를 보낸다. 누군가는 속으로 ‘나는 맹자의 말이 더 와닿는다’고, 또 다른 이는 ‘순자의 말이 현실적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에 공통적으로 남은 것은 한 가지다. “인간은 스스로를 방치할 수 없다.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토론이 끝나고 사회자가 마무리를 한다.
사회자:
“오늘 토론은 단순히 고대 철학의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청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그리고 교육은 본성을 깨우는 일인가, 길들이는 일인가?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공감하십니까? 그리고 그 선택은 여러분의 교육관과 사회관, 더 나아가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바꿀까요?”
청중은 침묵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는 맹자의 씨앗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순자의 망치질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두는 이 토론이 단순한 고대 철학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자기 삶의 거울임을 깨닫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은 ‘인간 본성 논쟁’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사교육 시장은 치열하다. 부모들은 자녀가 뒤처질까 두려워 학원을 전전하고, 학생들은 고등학교와 대학 입시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달린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 맹자식 해석: 아이들 안에는 호기심과 탐구심이라는 ‘선한 씨앗’이 있다. 그러나 경쟁적 제도와 성적 위주의 평가가 그 싹을 짓밟는다. 본래의 선함을 키워주지 못하고 욕망만을 자극하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 순자식 해석: 아이들이 성적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치열한 경쟁에서 남을 짓밟는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은 본성이 악하기에 교육과 규율이 절실함을 보여준다. 억제 장치와 엄격한 지도가 없으면 공동체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해석이다.
즉, 동일한 현실을 두고도 본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교육의 처방이 달라진다.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학교 폭력 문제 역시 맹자와 순자의 논쟁을 현재적으로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은 본래 선하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가 제대로 된 돌봄과 교육을 제공하지 못했기에 폭력이 발생한다”고 본다. 이는 맹자의 관점과 닮아 있다. 폭력적 행동은 본성이 아니라 환경적 요인 때문이며, 올바른 교육과 공동체적 돌봄이 있다면 아이들은 선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쪽에서는 “아이들은 욕망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를 막으려면 강력한 규율과 법적 처벌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순자의 관점에 가깝다. 제재와 규율 없이는 본능적 폭력이 억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학교폭력 가해 학생 생활기록부 기재 강화’ 같은 강력한 규제와 동시에 ‘피해 학생 회복 프로그램’ 같은 회복적 교육을 병행한다. 이는 맹자와 순자의 관점을 모두 절충하려는 현대적 시도라 할 수 있다.
SNS와 디지털 공간에서의 청년 세대 경험 또한 이 논쟁을 새롭게 불러낸다.
SNS 속 청년들은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동시에 보여준다.
- 맹자적 측면: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기부 캠페인을 벌이고, 환경 운동을 확산시키며,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온라인 펀딩에 참여하는 모습은 인간이 본래 선하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작은 자극에도 공감과 연대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 순자적 측면: 그러나 동시에 온라인 괴롭힘, 혐오 표현, 가짜뉴스의 무분별한 확산은 인간이 욕망과 분노를 제어하지 못할 때 얼마나 쉽게 타인을 해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는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강력한 제도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순자의 입장을 떠올리게 한다.
즉, 디지털 사회는 인간 본성 논쟁의 새로운 실험실이 되고 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의 사례들은 맹자와 순자의 관점이 모두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 맹자적 교훈: 청년들에게 내재된 선한 잠재력, 창의력, 공감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단순히 점수와 성적 중심의 경쟁 교육이 아니라, 협력·윤리·시민성 같은 내적 가치를 길러주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중요하다.
- 순자적 교훈: 동시에 사회는 욕망을 절제하고 폭력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규율을 마련해야 한다. 법적 장치와 윤리 규범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되, 그 욕망이 공동체를 해치지 않도록 제도적 관리가 필요하다.
특히 청년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신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든 스스로를 성찰하며 균형을 찾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자기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기보다는 사회적 선과 연결시키고,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선한 씨앗을 키워가는 일. 그것이 바로 교육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맹자와 순자의 인간 본성 논쟁은 고대의 철학적 이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교육의 목표와 방식에 직접적인 함의를 갖는다.
- 맹자의 성선설은 “아이들은 본래 선하다”라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교육은 그 선한 씨앗을 보호하고, 올바른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다. 따라서 교육자는 권위적 감시자가 아니라, 잠재력을 끌어내는 조력자가 된다.
- 순자의 성악설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욕망을 따르며, 이를 방치하면 사회를 해칠 수 있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교육은 곧 욕망을 다스리고 규율을 내면화시키는 훈련이다. 따라서 교육자는 도덕적 규범과 사회 질서를 주입하는 지도자의 위치를 가진다.
이 두 관점은 한국 사회의 교육정책, 교실의 분위기, 부모의 양육 태도까지 널리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청년들은 성선설과 성악설이 동시에 작동하는 사회 속에서 자란다.
초·중·고교 시절, 학생들은 무한 경쟁의 제도 속에서 성적과 입시를 위해 끊임없이 훈련받는다. 이는 순자적 교육의 흔적이다. 규율과 성과 중심의 체제는 청년들에게 강력한 통제와 평가의 문화를 내재화시킨다.
동시에, 청소년기부터 “자신의 꿈을 찾아라”, “자율적으로 진로를 설계하라”는 요구도 강하다. 이는 맹자적 신뢰, 즉 인간 안의 가능성과 선한 잠재력에 기대는 교육 담론이다.
결국 청년 세대는 “스스로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는 요구와 동시에 “엄격한 제도와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요구를 함께 받으며 성장한다.
이 두 관점이 충돌하면서도 공존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청년 교육의 길은 어느 한쪽 극단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 맹자의 교훈: 청년들을 무조건적으로 불신하지 말라. 그들 안의 창의력과 선한 가능성을 키워주려면 실패를 허용하는 환경, 자율성을 부여하는 교실, 공동체적 돌봄이 필요하다.
- 순자의 교훈: 그러나 무조건적인 신뢰 역시 위험하다. 욕망은 언제든 타인을 해칠 수 있고, 규율 없는 자유는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책임과 의무,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도록 돕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 두 가르침을 균형 있게 적용할 때만 청년 교육은 ‘인간을 기르는 일’로서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청년 세대가 직면한 현실은 불안정하다. 불평등, 취업난, 디지털 격차, 기후 위기 등 다양한 문제 속에서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규율 주입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성찰과 균형이다.
- 교육은 지식을 넘어 삶의 태도를 길러야 한다. 즉, 내 안의 선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욕망을 제어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 청년들은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익과 개인적 성취를 함께 고려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 이를 위해서는 대화와 토론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 맹자가 강조한 대화 속 도덕적 자각, 순자가 강조한 규율 속 자기 절제가 함께 훈련되는 장이 필요하다.
결국 본성 논쟁은 청년 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내 안의 선한 씨앗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동시에, 내 안의 욕망과 충동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사회는 나를 신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규율로만 통제하고 있는가?
나는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성찰하면서도 공동체의 규범을 존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순간, 청년은 교육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자기 성찰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맹자와 순자의 본성 논쟁은 2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생생한 울림을 준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은 곧 교육의 목표와 방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라는 물음은 “우리는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직결된다.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 이 논쟁은 단순히 철학사 속 고전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과 진로 선택, 사회적 관계, 그리고 미래 설계의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신뢰할 것인지, 아니면 통제할 것인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사실은 교육의 두 축을 이룬다. 맹자의 시선은 “인간은 신뢰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꽃피우게 하라”라는 질문을 남기고, 순자의 시선은 “인간은 욕망의 존재다. 그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따라서 청년 세대는 스스로에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내 안의 선한 가능성을 어떻게 발견하고 키워낼 것인가?
동시에, 내 안의 욕망과 충동을 어떻게 절제하고 다스릴 것인가?
사회는 나를 신뢰하는가, 아니면 불신 속에서 규율만을 강요하는가?
내가 원하는 교육은 나의 자유를 확장시키는가, 아니면 단순히 사회가 원하는 규율에 맞추는 훈련인가?
결국 답은 어느 한쪽 극단에 있지 않다. 성선설만을 따른 교육은 현실의 도덕적 실패와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게 만들고, 성악설만을 따른 교육은 인간을 기계처럼 다루며 창의성과 자율성을 질식시킨다. 오늘날 교육과 사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균형이다.
- 청년들에게 자율성과 신뢰를 부여하되, 그 자유가 공동체적 책임과 균형을 이루도록 돕는 것.
- 개인의 창의적 가능성을 격려하되, 욕망이 사회를 해치지 않도록 규율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
- 무엇보다 교육을 단순히 성적·입시의 통로가 아니라, 인간을 길러내는 장으로 회복하는 것.
그러나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제도나 사회만의 몫이 아니다. 청년 스스로가 주체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
- 맹자의 교훈을 따라, 자신 안의 선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율적 학습과 도덕적 실천을 이어가는 것.
- 순자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욕망을 성찰하고 절제하며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
이 두 태도가 결합될 때 청년 세대는 단순히 교육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자기 삶과 공동체를 함께 설계하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맹자와 순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의 청년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내 안의 욕망을 제대로 다스리고 있는가?
나는 단순히 제도가 요구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스로 교육과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인가?
나는 어떤 사회를 꿈꾸며, 그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개인적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청년 세대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대적 물음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질문에 답하려는 과정 속에서만, 우리는 인간 본성과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세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