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탐구 24] 스피노자 vs 칼뱅
늦은 밤, 한 대학 강의실. 철학과 수업을 마친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주제는 예상 밖이었다.
“우리는 진짜 자유로운 걸까? 아니면 이미 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걸까?”
한 학생이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봐. 요즘 빅데이터랑 AI가 내 진로까지 예측해주잖아. 성적, 관심사, 심지어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지도 알려줘. 결국 내 미래는 이미 예정된 거 아냐?”
다른 학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예측은 참고일 뿐이지.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거야. 내가 공부하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새로운 길을 만들 수도 있잖아.”
토론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런데 진짜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는 게 더 위안일지도 몰라. 사실은 모든 게 정해져 있는데, 우리가 모를 뿐이라면?”
“아니, 그럼 인간은 꼭두각시야?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짧은 대화였지만, 청년들의 고민 속에는 오래된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인간은 자유로운가, 아니면 예정된 존재인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신학자 장 칼뱅은 구원과 운명이 신의 절대적 계획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간이 필연적 질서 속에 살지만, 그 질서를 이해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고 말했다.
오늘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을 예측하는 사회에서, 이 두 사상가의 목소리가 다시 되살아난다. AI가 제시하는 ‘예정된 경로’를 우리는 따라야 할까, 아니면 저항하고 벗어나야 할까?
청년 세대가 맞닥뜨린 현실은 단순한 취업과 진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근본적 질문이다. 자유와 예정, 그 사이에서 인간은 어떻게 주체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 회차의 여정은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칼뱅과 스피노자의 철학을 다시 불러내어, 오늘의 청년 세대가 스스로의 자유와 주체성을 어떻게 새롭게 설계해야 할지 함께 모색해보고자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격랑 속에서 등장한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인간의 구원 문제를 둘러싼 단호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의 핵심 주장은 바로 예정론(Pre-destination)이다.
칼뱅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에 물든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구원과 멸망은 이미 신의 절대적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인간은 그 선택을 바꿀 수 없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고, 어떤 이는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냉혹해 보이지만, 당시 신자들에게는 오히려 강력한 위로와 긴장을 동시에 주었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은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선택받은 자인지 증명하기 위해 근면, 절제, 직업 소명을 강조하게 되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분석했듯, 이 예정론은 서구 근대 자본주의의 근면성과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칼뱅의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란 제한적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신의 절대적 계획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한 세기 뒤,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를 설명했다.
스피노자에게 세계는 신의 초월적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Natura)의 필연적 질서에 따라 전개된다. 모든 존재는 인과의 사슬 속에서 나타나며, 그 어떤 것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 역시 자유로운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 법칙 속에 있는 하나의 양태(mode)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전혀 자유롭지 않은가? 스피노자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가 이 필연성 속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무작정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 필연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자유롭다는 것이다.
예컨대, 감정에 휘둘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사실 자유롭지 않다. 그는 외부 원인에 지배받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성을 통해 자기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은 필연적 법칙을 깨닫고 내적으로 동의하며 행동한다. 스피노자는 이 상태를 “필연 속의 자유”라고 불렀다.
즉,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외부의 강제에서 벗어나고, 동시에 자기 본성에 합치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칼뱅과 스피노자의 차이는 자유와 예정에 대한 근본적 이해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 칼뱅
구원과 멸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인간의 자유는 형식적일 뿐, 신의 섭리에 종속된다.
예정론은 인간에게 근면과 절제를 요구하며, 신의 뜻을 증명하는 삶을 촉구한다.
- 스피노자
세계는 자연의 필연적 질서에 따라 전개된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있다.
인간은 자기 본성을 인식하고 이성적으로 살아갈 때 자유로워진다.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하는 현실 ― AI가 빅데이터로 개인의 진로, 건강, 심지어 성향까지 예측하는 사회 ― 속에서 두 철학자의 목소리는 다시 울린다.
- 칼뱅적 시선: “네 미래는 이미 데이터로 예측되어 있다.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성실히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다.”
- 스피노자적 시선: “예측은 필연적 조건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 방식으로 수용할 때, 너는 진정한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
결국 두 철학자는 다른 언어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예정된 조건 속에 갇혀 있는가?”
서울의 한 대학 강당. 주제는 “자유인가, 예정인가?”. 무대 위에는 두 명의 특별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종교개혁의 신학자 장 칼뱅과 합리주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였다. 청중은 수백 명의 대학생.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예정, 그리고 주체성에 대해 두 거장의 목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칼뱅 선생, 먼저 말씀해 주시죠.”
칼뱅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로 물든 존재입니다.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은 이미 신의 뜻에 따라 예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구원받도록, 어떤 이는 멸망하도록 결정된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라 불리는 것은 단지 형식적일 뿐, 모든 것은 신의 절대적 계획 안에 있습니다.”
청중은 술렁였다. 한 학생이 속삭였다. “그렇다면 노력해도 소용없단 말인가?”
스피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나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유란 무제한의 가능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의 필연적 법칙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필연을 이해하고, 자기 본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충동에 휘둘리는 사람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 외부 원인에 지배받는 노예입니다. 반대로 이성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이는 필연성을 수용하면서도 자기 주체성을 실현합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필연 속의 자유입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요즘 AI가 우리의 미래를 예측합니다. 입시 성적, 직업 적합도, 건강 상태까지 데이터로 계산되죠.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예정된 것 아닐까요? 저희는 자유로운 건가요?”
칼뱅이 곧장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예정론의 진실을 반영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없으며, 다만 성실히 노력함으로써 신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측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가 드러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스피노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AI의 예측은 필연적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조건을 이해하고, 자기 삶을 책임 있게 설계한다면, 예측은 운명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청중이 웅성였다. “둘 다 일리가 있네…”
칼뱅:
“스피노자 선생, 당신의 자유론은 결국 인간 이성을 신격화하는 위험에 빠집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며, 모든 것은 신의 계획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이성을 동원해도, 신의 뜻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스피노자:
“칼뱅 선생, 당신의 예정론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듭니다. 인간이 아무 선택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주체적 존재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신을 자연과 동일시합니다. 신은 초월적 의지가 아니라, 세계의 필연적 질서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그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격렬해지자, 청중은 숨을 죽이고 귀 기울였다.
이번에는 또 다른 학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만약 모든 게 예정되어 있다면, 범죄자도 예정된 길을 걸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책임지게 할 수 있죠?”
칼뱅이 답했다.
“인간은 예정 속에 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이 부여한 질서입니다.”
스피노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 지점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책임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무(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필연적 조건을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임은 예정과 자유의 접점에서 생겨납니다.”
청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과 ‘자유’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얽혀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토론이 끝나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우리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칼뱅 선생은 인간이 신의 절대적 예정 속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스피노자 선생은 필연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자유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청년 여러분, 이제 질문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AI가 제시하는 예측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이해하고 넘어서는 자유를 선택할 것입니까?
당신의 삶은 예정된 길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입니까?”
강당은 박수와 동시에 깊은 침묵에 잠겼다. 학생들의 눈빛 속에는 혼란과 성찰이 동시에 빛나고 있었다.
21세기 청년들은 더 이상 “운명”이라는 단어를 종교적 언어로만 듣지 않는다. 대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삶을 예측하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예정론을 체감한다.
대학 입시: 성적·내신·모의고사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격 가능성이 ‘수치’로 제시된다.
취업 시장: AI 채용 시스템이 지원자의 이력과 영상 인터뷰를 분석해 “합격 가능성”을 점수화한다.
건강 관리: 웨어러블 기기가 심박수, 수면 패턴을 모니터링하며 앞으로의 질병 발병 확률을 알려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청년들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이미 결정된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을 느낀다.
칼뱅의 예정론은 오늘날에도 묘한 울림을 준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미래를 예측하는 사회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적 질서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 입시와 채용에서 “데이터가 예측한 대로 행동하는 것”은 칼뱅적 태도에 가깝다.
- 실패와 좌절을 경험해도, 그것을 개인의 한계라기보다 더 큰 계획 속에 있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심리적 위로가 된다.
- 특히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성실히 노력하면 결국 길이 열린다”는 신념을 통해 불확실성을 견뎌낸다.
그러나 이 시선은 동시에 개인의 창의적 선택을 제한할 위험이 있다. 데이터가 제시하는 경로를 맹목적으로 따르다 보면, “내 삶은 이미 정해졌다”는 수동성이 강화된다.
스피노자의 자유론은 AI 시대의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는 세계가 필연적 법칙으로 움직인다고 보았지만, 그 법칙을 이해하고 수용할 때 인간은 오히려 자유롭다고 말했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AI의 예측과 데이터는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일 뿐이다.
- 예: AI가 특정 직무 적합도가 낮다고 평가했더라도, 그 이유를 분석하고 새로운 역량을 개발한다면 주체적 선택으로 경로를 바꿀 수 있다.
- 예: 건강 예측 데이터는 숙명적 진단이 아니라, 스스로 생활 방식을 바꾸어 미래를 조율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즉, 스피노자적 시선은 AI 예측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 조건을 이해하고 활용하며, 자기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태도이다.
한국 청년들은 입시와 취업, 사회적 경로가 지나치게 데이터화된 경쟁 구조 속에 있다.
“네 수능 성적이라면 이 대학까지 가능하다.”
“이 기업 AI 채용 시스템은 이런 스펙을 가진 지원자를 선호한다.”
청년들은 이런 말에 따라 선택을 좁히거나, 때로는 도전조차 포기한다. 이는 칼뱅적 예정론과 유사한 현실 체감이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청년들이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한다.
정해진 진로 대신 창업을 선택하는 경우,
스펙 중심이 아닌 새로운 직무 역량(코딩·AI 활용 등)을 학습하는 경우,
사회적 규범을 넘어 대안적 커리어를 개척하는 흐름.
이는 스피노자가 강조한 필연 속의 자유를 실천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청년들이 경험하는 것은 바로 예정과 자유의 이중적 현실이다.
AI 예측은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동시에, 자유를 위축시키는 힘을 가진다.
자유를 추구하는 선택은 주체성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실패와 불안정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문제는 어느 한쪽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 세대는 예정과 자유 사이의 긴장 속에서 매일 살아간다.
이 현실은 청년 세대에게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1. 데이터가 내 미래를 이미 결정지었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것을 칼뱅처럼 “더 큰 계획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스피노자처럼 “조건을 이해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바꿔내는 자유”를 실천할 것인가?
2. 나의 주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정된 경로를 따르는 수동성 속에서도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필연을 활용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능동성에서 주체성이 발생하는가?
AI와 빅데이터가 미래를 예측하는 사회에서 청년 세대는 칼뱅적 예정론의 울림과 스피노자적 자유의 통찰을 동시에 경험한다. 어느 한쪽만을 절대화하면 위험하다. 칼뱅의 예정론은 인간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 수 있고, 스피노자의 자유론은 현실의 조건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정과 자유의 균형을 새롭게 설계하는 일이다.
칼뱅이 말한 예정론의 핵심은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의 자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으며, 삶에는 초월적 질서나 거대한 조건이 존재한다.
입시 결과, 취업 시장, 경제 구조, 사회적 불평등 등은 개인의 힘으로 완전히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청년 세대는 이 사실을 외면하기보다,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는 무력함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적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다. 그렇게 할 때, 지나친 자기 탓하기와 좌절에서 벗어나 더 큰 맥락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보여준 길은 “조건 속의 자유”다.
- 필연적 조건을 이해하고 수용할 때, 오히려 인간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
- AI 예측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경계를 알려주는 것일 수 있다. 그 경계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순간, 우리는 경계 안에서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
예컨대, AI가 어떤 직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성찰의 기회다. “왜 나는 이 직무에 맞지 않는다고 평가받았을까?”를 묻고, 새로운 역량을 개발하거나 경로를 수정한다면, 그것은 필연을 넘어서는 자유의 행위가 된다.
따라서 청년 세대가 찾을 균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 조건을 인정한다 – 개인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겸허함을 배운다. (칼뱅적 통찰)
2. 조건을 활용한다 – 주어진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설계의 재료로 삼는다. (스피노자적 통찰)
3. 주체적으로 재구성한다 – 조건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길을 만들어내며 자기 책임을 감당한다.
이 균형 속에서 청년들은 예정과 자유의 긴장 관계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새로운 주체성을 길러낼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청년 각자가 스스로에게 던질 자기 질문이다.
“나는 나의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AI와 사회가 제시하는 조건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 조건 속에서도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청년들이 매일 입시와 취업, 인간관계와 자기 선택의 순간마다 마주하는 현실적 고민이다.
칼뱅은 우리에게 인간의 한계를 일깨우고, 스피노자는 그 한계 속에서도 주체적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오늘날 청년 세대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 두 통찰을 결합한 균형 위의 주체성이다.
즉,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겸허한 자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을 이해하고 활용하며 자기 길을 설계한다”는 능동적 태도를 동시에 붙드는 것이다.
이 균형 속에서만 청년 세대는 예정과 자유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AI 시대의 새로운 인간 주체성을 세울 수 있다.
칼뱅과 스피노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 칼뱅은 인간의 운명이 이미 신의 뜻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자유는 제한적이며, 우리는 주어진 질서 안에서 성실히 살아야 한다.
- 스피노자는 인간을 자연의 필연적 법칙 속 존재로 보면서도, 그 필연을 이해하고 수용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자유와 예정, 두 길은 16~17세기 유럽의 신학과 철학을 가른 거대한 갈림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 논쟁은 여전히 살아 있다. 빅데이터와 AI가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는 시대, 청년 세대는 다시금 이 질문과 마주한다. “나는 자유로운가, 아니면 이미 예정된 길을 걸어가는가?”
AI의 예측 능력은 놀랍다. 입시 합격 가능성, 취업 합격 확률, 건강 위험도까지 수치로 드러난다. 이 수치는 때로는 절대적 진실처럼 다가와 청년들을 압도한다. 이는 칼뱅의 예정론과 닮아 있다. “이미 정해진 길이 있으니, 그 안에서 성실히 살아가라”는 목소리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청년들은 스피노자의 길도 체험한다. AI의 예측은 숙명적 진단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드러내는 정보일 뿐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활용해 자기 삶을 재설계할 때, 청년은 오히려 주체적 자유를 얻는다. 예정과 자유는 대립만이 아니라, 새로운 균형을 요구하는 문제로 다가온다.
이제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의 결론이 아니라, 청년 스스로의 물음이다.
- 나는 예정된 조건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무력하게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이해하고 재해석할 것인가?
- 나는 나의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조건 속에서 좌절할 것인가, 아니면 그 한계를 주체적 선택의 재료로 삼을 것인가?
- 나는 주체성을 어디에서 세울 것인가?
외부의 조건을 부정하는 자유 속에서, 아니면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길을 만들어가는 자유 속에서?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오늘날 청년이 매일 맞닥뜨리는 구체적 선택의 문제다.
칼뱅의 예정론은 인간의 유한함을, 스피노자의 자유론은 인간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두 사상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청년 세대에게는 모두 필요한 나침반이다.
- 칼뱅은 겸허함과 책임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
- 스피노자는 성찰과 주체성을 일깨운다. 조건을 이해하고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
청년 세대가 걸어야 할 길은 바로 이 두 가지를 결합한 균형 위의 주체성이다. 예정의 한계와 자유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드는 것이다.
결국 이 논쟁은 완결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질문 자체가 청년 세대에게 길이 된다.
“나는 이미 예정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선택으로 삶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는가?”
“AI가 제시하는 수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주체적 길을 개척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AI 시대 청년들의 주체성을 세우는 토대가 된다. 자유와 예정은 배타적이지 않다.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 바로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