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체계로서의 문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인기가 한창입니다. 전작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뜻을 같이 했던 멤버들이 '히어로 등록법'을 둘러싸고 두 파로 나뉘어 싸우는.. 스토리인데요. 대개의 히어로물이 그렇듯이 스토리는 그렇다쳐도 화려한 볼거리만큼은 확실한 작품입니다.
미국 영화의 특징은 히어로물이 많다는 점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들만 해도,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엑스맨 시리즈 등등, 원작에서 나오는 스핀오프 시리즈들까지 하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지요.
이들의 공통점은 첫번째로 쫄쫄이(다른 말로 수트..)를 입는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초능력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쫄쫄이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고.. 바로 이 초능력이 미국 히어로들을 대표하는 특징입니다. 우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해내는 수퍼히어로들의 활약에 보통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그런데, 왜 초능력을 가진 영웅일까요? 그리고 왜 초인(superman)들은
미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을까요?
미국 히어로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수퍼맨은 1938년에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배트맨이 1939년, 캡틴 아메리카가 1941년 데뷔한 것을 보면 그 시기 언저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콘텐츠에는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담겨있습니다. 문화 현상을 잘 읽어내면 그 문화 구성원들의 심층적인 심리를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런 관점에서 1930년대의 미국을 한번 살펴봅시다.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1776),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고(1803)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1846), 그 넓은 북미 대륙을 야금야금 차지합니다. 드넓은 영토에서 나오는 무궁무진한 자원, 기회를 찾아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재들로 미국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지요.
더군다나 1차 대전의 참전과 승전으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습니다. 미국의 힘은 경제력이었고 미국 경제의 바탕은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으로 시작된(1913)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였습니다.
엄청나게 만들어내고 엄청나게 팔아먹는 경제로 미국은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1차대전의 군수품 특수가 끝나고, 일반적인 물품의 경우에도 살만한 사람들이 웬만큼 사고 나자 공장에 물건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물건이 안 팔리니까 회사가 어려워지고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도산했습니다.
직장이 없으니 돈이 없고, 돈이 없으니 물건이 안 팔리는 악순환이 됩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을 시작으로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1930년대 미국은 암흑기였습니다. 거리에 실업자들이 넘쳐났고 집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1차대전의 승리와 경제력의 성장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던 미국의 몰락..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은 수습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았던 1938년..
수퍼맨이 등장합니다.
미국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수퍼맨이 등장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가장 큰 의미는 문화가 욕구 충족의 체계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화는 개인의 '성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은 성격의 역동과 유사성을 갖습니다.
이를테면,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혹은 충족될 수 없을 때), 개인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지요. 이 방어기제 중에 '투사(projection)'라는 것이 있습니다.
투사란 개인 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욕구나 충동을 외부로 돌리는 정신과정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바다 속 풍경을 보면서 "물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물고기들이 한가로운지 어쩐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먹고 먹히는 생존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일 가능성이 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닌다'는 표현은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현대인들 자신이 한가롭기를 바라는 욕망을 물고기들에 투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이런 것이 투사입니다.
문화는 욕구충족의 체계이면서 이룰 수 없는 욕구의 투사체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기대 이상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현상은 그 사회 사람들의 욕구가 그 대상에 투사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1938년 미국의 수퍼맨은 경제공황에 시달리던 대다수 미국인들의 욕망이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수퍼맨이라는 가상의 영웅의 활약을 통해 억눌렸던 욕구를 해소한 것입니다. 현실의 나는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수퍼맨은 다릅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수퍼맨의 의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차대전 후, 승승장구하던 미국의 시민들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어 가는 자신들의 나라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자부심이 대공황으로 인해 무너졌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퍼맨은 미국인들의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영웅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수퍼맨의 이러한 측면은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다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는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두드러집니다. 수퍼맨이 최초로 실사로 영화화된 것이 1948년이고, 최초로 장편영화로 제작된 것은 1951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크리스토퍼 리브의 수퍼맨이 개봉한 것이 1978년, 즉 미국과 소련을 필두로 하는 냉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수퍼맨의 이미지는 곧 미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됩니다.
즉, 수퍼맨은 초강대국(super-power)으로서의 미국의 이미지가 투사된 영웅입니다. 그 시작은 대공황에 시달리던 소시민들의 욕망의 해소였지만, 점차 미국사람들은 수퍼맨에게서 세계에서의 미국의 위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악당을 무찌르고 선량한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 그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수퍼맨을 비롯한 히어로들이 주로 하는 일은 '누군가를 구하는 것'입니다. 달려드는 자동차 앞에 선 여인을 구해 하늘로 날아오른 수퍼맨, 땅으로 내려오자 여인이 말합니다. "Oh, my Hero!"
수퍼맨 하면 떠오르는 아주 전형적인 장면입니다. 미국에서 영웅(hero)이라고 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누군가(혹은 무엇인가)를 구해야 합니다(save). 미국의 수퍼히어로 중에는 수퍼와이같은 꼬꼬마들이나 원더펫 같은 애완동물(pets)도 있는데요. 얘네들도 늘상 한다는 소리가 누군가를 구한다(save)는 겁니다.
미국문화에서 영웅(Hero)은 단지 잘난 사람(英雄)이 아니라 누군가를 구하는 이를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퍼맨의 원형(原形)은 예수(Jesus)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수퍼맨의 이미지에 투영되었다는 것이죠.
신의 아들이라는 점, 사람을(세계를) 구한다는 점.. 등 수퍼맨과 예수의 공통점은 많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나라 미국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인간을 초월한 존재는 사실 그 분 밖에 없기도 하겠죠.
아무튼,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미국의 영웅은 초인간적인 존재여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 마무리를 어떻게 하지?;)
문화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소소한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논문을 쓸때는 전혀 도움이 안되지만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저는 만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