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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Jun 15. 2020

일본인의 하지(恥)와 한국인의 부끄러움

한국이 ‘수치의 문화’라구요?

문화 연구 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흔히 동양을 수치의 문화(shame culture), 서양을 죄책감의 문화(guilt culture)라고 봅니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 기인한 생각이지요.


루스 베네딕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을 이해할 필요성을 느낀 미 국무성의 요청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전쟁 중이어서 현장 연구를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일본의 역사, 문화, 예술, 신화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 문화를 분석했는데요. 아직도 일본 이해에 대해서는 최고의 책으로 꼽히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인들에게 수치심(恥, 하지)는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일본인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요. 첫째, 은혜(恩, 온)를 입고도 이를 갚지 않는 경우, 둘째, 의리(義理, 기리-마땅히 그리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경우, 셋째, 그로 인해 남에게서 비웃음(조소)을 사는 경우입니다.     


일본인들의 수치심을 이해하기 위해 각각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세 가지 경우는 모두 온(恩)이라는 개념과 관련됩니다.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않는 일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큰 잘못으로 이해됩니다만, 일본문화에서 온(恩)의 의미는 남다릅니다.      

일본인들은 온을 입으면 그것에 감사해야 하고 또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은혜를 입기를 꺼려할 정도지요. 온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계층적 위계질서 속에 있는 사람의 경우는 괜찮지만 관계가 멀거나 자신보다 낮은 위계에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입는 것은 가장 불쾌한 일로 꼽힙니다.    

  

여담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은 한국의 성금과 구호물자를 받지 않고 거절했었는데요. 그 이유가 이겁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을 자신들이 온을 입을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성의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죠. 각설하고..     


베네딕트는 온을 수동적으로 입는 의무로 보았는데요. 온을 입은 자는 이를 반드시 갚아야 하는 부채의식을 가집니다(온가에시). 이 온에는 몇 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가장 상위의 온은 천황, 주군, 부모, 스승에게 입는 온입니다.      


이 종류의 온을 갚는 것은 기무(義務)라 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갚을 수 없으며 갚는 기한도 한계도 없습니다. 이들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그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더라도 사람들은 기무를 다해야 하죠. 충(忠), 효(孝), 임무(任務, 닌무)가 이에 해당합니다.      

기무보다는 조금 약한, 자기가 받은 온과 같은 양만큼만 갚으면 되고 갚아야 하는 기한도 상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을 기리(義理)라고 합니다. 사회심리학자 미나미 히로시는 기리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는데요. 의(義)란 사회 구성원 각자가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모습’을 분별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의’의 도리(道里)가 곧 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의리란 표현이 있지만 “선생님한테 혼나는데 의리없이 혼자 도망가기냐”라든지, “친구끼리 의리없이 니들끼리만 맛있는 거 먹으러 갔냐” 등 한국에서 의리는 ‘친구들 사이의 특별한 정..’ 정도의 의미로 쓰이죠.  


기리는 크게 세켄(世間)에 대한 기리와 자기 이름에 대한 기리로 나뉘는데, 세켄이란 세간, 즉 주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나 이웃, 친척과 지인 등 살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죠.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것을 세켄의 온(恩)이라 생각하고 이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다는 얘깁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유에 상관없이, 예로부터 정해진 약속에 따라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모습’으로 처신해야 하는 것이 세켄의 온에 보답하는 방법입니다.  일본인들의 전형적인 모습, 남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고 질서와 규칙을 지키는 것 등은 이 세켄에 대한 기리가 구현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이름에 대한 기리는 타인으로부터 모욕이나 비난을 받았을 때 그 오명을 씻어내야만 하는 의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은 경쟁에서 패하면 수치심을 느낍니다. 자기 이름에 대한 기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죠. 제 이름값을 하려는 분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개 의기소침해지는데요.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름에 대한 기리에 문제가 될 만한 상황, 수치감을 유발하는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온갖 종류의 예의범절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느꼈다면 이제 그 수치를 씻어야 할 의무가 주어지죠.      


수치심은 강력한 내적 통제의 원리로 작용합니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일본문화는 구성원들의 수치심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수치의 문화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일본이 수치의 문화이니 한국도 수치의 문화일까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세간의 눈이나 평판은 개인의 행동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눈치도 많이 보고 남부끄럽거나 남우세스러운 일들을 꺼리는 면도 두드러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웬만큼 문화를 공부했다는 분들도 한국을 일본과 마찬가지로 ‘수치의 문화’라고 분류해버리고 마는데요.     


저는 한국의 수치심은 일본의 수치심과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수치심, 즉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상에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들에 대한 부끄러움(남부끄러움)도 한국 문화의 한 축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한국인들은 남들이 아닌 대상으로부터도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행동이, ‘하늘’, ‘성현의 가르침’, ‘선조 혹은 조상’, ‘부모’, ‘자식 또는 후손’ 들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바래왔습니다. “조상님 뵈올 낯이 없다”, “내 무슨 얼굴로 선조들을 뵙겠는가”, “자식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후손들에게 당당할 수 있겠느냐” 등등은 사극이나 드라마, 인터넷의 댓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표현들이죠.     

한국인들은 기리(義理)가 아니라 법도 또는 도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법도나 도리는 세상 사람들의 눈보다 보편적인 가치를 의미합니다. 성현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하여 따라야 하는 것이고, 하늘/조상/후손 등도 시공을 초월하여 지켜져야 하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행동특성은 그러한 원리가 제시하는 기준들에 비추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반성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인들은 참 반성을 많이 하는데요. 인터넷 기사나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반성해야 한다’는 댓글들을 수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개중에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반응도 있지만, 대개는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는 자기반성 류가 많은데요. 축제가 끝난 길가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으면 부끄러운 시민의식에 대한 반성을, 정치인들이 싸운다는 기사에는 저런 사람들을 뽑은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대한 반성을, 한국 교육의 문제를 다룬 《SKY 캐슬》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저들의 행태는 곧 우리의 모습이라며 반성하는 것입니다.      


예로 든 ‘바람직한 시민의식’, ‘정치적 안목’, ‘올바른 교육의 모습’ 등은 누군가의 이목이 아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원리를 의미합니다. 때로 그 모범의 사례가 특정 ‘선진국’이 되는 경우가 있으나(예, 선진국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본받아야 할 ‘선진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진국’이란 고래로부터의 ‘성현의 가르침’에 필적하는 보편적 원리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반성을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유교의 보편 원리들이 일본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민초들의 심성에까지 스민 탓일까요. 한국인들은 보편적 원리에 맞게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반성의 과정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가치있는 것이죠.     


보편적 원리의 추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욕망으로 이어집니다. 보편적 가치를 따르는 이들(선비, 군자)들은 보편적 가치가 보다 잘 구현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의무를 갖기 때문이죠. ‘수신제가(修身齊家)’ 후에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두세 명만 모이면 정치 이야기를 합니다. 정치인 아무개가 뭐를 잘못했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런 정책은 잘못된 정책이고 제대로 하려면 저렇게 해야 한다고 열을 올립니다. 한국인들에게 정치는 정치인들의 영역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나의 싸움인 것입니다.     

법도(보편적 원리)에 어긋나면 임금조차도 신하들의 비난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 한국입니다. 주리를 틀리고 불에 지져지고 귀양지에서 평생을 썩어가면서도 조선의 선비들은 임금에게 도리를 따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임금이란 하늘을 대신해 하늘의 법도를 실현시키는 사람일 뿐이었으니까요.     


보편적 원리의 추구는 사람들을 행동에 나서게 합니다.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죠.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의병으로, 독립군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최루탄을 마시며 거리로 나섰던 이들이 품었던 이상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더 좋은 세상”이라는 보편적 가치였습니다.      


반면, 일본인들의 기리(義理)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무라이의 예법과 관련 있다하겠습니다. 한국인 호사카 유지 선생님이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에서 말씀하신 내용과도 연결될 것 같군요. 요약하자면 일본인들이 어떤 일을 하고 하지 말고를 결정하는 근거는 자신이 의무를 다해야 할 외부에 있고, 한국인들의 근거는 내면화된 보편적 가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편적 가치에 따르지 못한 데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수치심보다는 죄책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죄책감을 ‘자기 처벌적 분노’로 규정했는데요. 내가 잘못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자신에 대한 분노를 의미합니다. 나의 행동이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했음에 대해 느끼는 수치와는 다른 성격입니다.      


일본인의 하지(恥)와 한국인의 부끄러움. 같은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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