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심리경험의 주관성
한국에는 참 불편한 분들이 많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일들에 크게 불편해 하는 분들이죠. 이들을 이르는 ‘프로불편러’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프로불편러들의 사례를 보다보면 아무리 저마다 생각하는 바, 느끼는 바가 다르다지만 참 불편한 일도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요.
불편함의 토로는 변화의 요구로 이어집니다. 녹아내린 슬리퍼, 길에서 익어가는 계란프라이 등 재치넘치는 표현으로 인기가 높던 '대프리카' 대구의 조형물들은 대구의 이미지를 저해한다며 신고한 한 시민의 신고로 하루아침에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아쉽다는 시민들의 요구로 다시 설치되었다네요)
술집에서 만난 유치원 선생님에게 ‘교사로서 이런 모습’ 불편하다며 문자를 보내는 학부모, 어버이날에 부모님 없는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니 어버이날을 평일로 돌리자는 이,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복장, 헤어스타일, 방송태도를 지적하는 사람들..
지하철 운전석에는 에어콘 온도가 낮으면 춥다는 민원이, 조금 높으면 덥다는 민원이 들이닥치고, 독서실에서는 슬리퍼 끄는 소리, 책장넘기는 소리부터 옆사람 숨쉬는 소리까지 불편하다는 쪽지가 붙습니다. 이 모든 행동들은 자신의 불편함으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긍정적인 불편함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당연한 듯 전해왔던 부당한 관행들이 존재합니다. 상사, 선배 등 손윗사람의 자연스러운 갑질이나 능력보다 지연, 학연을 우선하는 세태, 외모나 성별로 사람을 판단하려는 경향 등 한국사회가 보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개선해야 할 분야들이 많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토로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겠죠.
그러나 프로불편러들이 제기하는 문제들 중에는 그것이 정말 불편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가 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판단하기 애매한 것들도 많습니다. 이를 테면, 매년 개최되는 산천어 축제가 수십만 생명을 학살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인간의 오락을 위해 동물들의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희생되는 동물에 대한 공감은 이해 가는 측면이 있지만, 산천어 축제로 유지되는 지역사회의 경제에 대한 대안이나 인간이 하루에 6억 마리씩 먹어치우는 닭 같은 다른 동물들과의 형평성은 솔직히 부족해 보입니다.
비슷한 예로,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고객들에게 아줌마, 아저씨,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는데 그렇게 불리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줌마, 아저씨는 타인의 존재를 가족의 범주에서 인식하는 한국문화에서 비롯된 호칭으로 누군가를 비하하는 표현이 아닌 엄연한 존칭입니다. 당신은 내 가족이 아니니 가족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는 논리라면 고객들도 식당 종업원 분들에게 이모님이라고 불러서는 안되겠죠.
이러한 이슈들은 우리 사회가 변화하면서 다양한 가치들이 혼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들입니다. 사회변화에 따라 가치관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불편해지기도 하죠. 예를 들면, 9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웠지만 지금은 온갖 욕을 먹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합의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불편함은 문제 해결의 초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 느끼는 불편함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조금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보입니다. 적어도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한국인들이 느끼는 불편감의 가장 큰 원인은 주관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관성이란 경험에서 '내가 느끼고 받아들인 부분'입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이 모두 같지 않은 이유죠.
문화심리학에서는(저는) 한국인들의 '자기중심적' 해석이 한국인 심리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높은 자기가치감(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92)과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하는 주체성 자기(https://brunch.co.kr/@onestepculture/156)가 작용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가 볼 때는~”으로 시작하는 한국인들의 언어습관은 이러한 주관성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사례인데요. '내가 볼 때' 앞에서는 어떤 객관적 증거나 반론도 힘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경험방식은 내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을 불편하다고 인식하게 만들기 쉽죠.
불편함은 내면의 안정이 깨어질 때 경험되는 감정입니다. 서 있는 바닥이 기울었거나 누워있는 바닥이 울퉁불퉁할 때 불편을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상식이나 신념에 도전을 받을 때 불편함을 느낍니다. 물론 그것은 일차적으로 개인(주관성)의 영역입니다. 내가 볼 때 불편하다는데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문제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타인에게 공감받으려면, 그리고 타인들의 공감을 바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 얼마나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느냐를 판단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나만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결코 긍정적 정서라 하기 어렵습니다. 불편함과 같은 부정적 정서들은 당연히 행복을 느끼는데 방해가 됩니다. 한국인들의 행복도가 낮은 이유 중에는 불편함을 쉬이 느끼는 우리의 마음 경험 방식도 한 몫 했을 겁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합의를 찾아가려는 노력과 불필요한 감정싸움을 줄이려는 지혜가 뒷받침된다면 프로불편러들의 불편감은 사회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늘 우리나라가 별로라고 불평했지만 한국은 누구도 몰랐던 사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편한'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