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생 Jan 30. 2020

'씁쓸하다'의 문화심리학적 의미

자조(自嘲)와 와신상담(臥薪嘗膽) 사이

한국인들이 자주 느끼는 정서 중 하나는 씁쓸함입니다. 문화심리학자로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요.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였습니다. 그 기쁘고 좋은 일 앞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씁쓸함을 토로했습니다.

‘씁쓸하네요’로 시작되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대개 김연아 선수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고생 안하고 더 일찍 성공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않은 빙상연맹에 대한 욕과 피겨에서 특히 심한 일본의 견제를 막아주지 못한 한국의 국력에 대한 탄식도 빠지지 않았죠.


행복해지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의 해설자들이 말했듯이 세기적인 피겨여왕과 동시대를 살면서 그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건만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같은 사건을 두고 굳이 씁쓸함을 끌어올립니다.


물론 빙상연맹은 욕을 먹어야 하고 불투명한 행정과 불공정한 운영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일이겠습니다. 국력이란 게 뭔지, 어디까지 올라가야 만족할 수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의 국력이 커진다면 뭐 좋은 일일 테지요.


하지만 김연아 선수가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심지어 라이벌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이기고 금메달을 딴 날조차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행복해지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씁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씁쓸함은 쓴 맛입니다. 한약재나 씀바귀같은 나물을 먹었을 때 나는 맛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말이 기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유쾌하지 못하고 언짢다는 맥락에서입니다. 한국인들이 씁쓸하다는 말을 많이 쓰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든 유쾌하지 못하고 언짢은 일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기도 합니다.


쓴 맛, 씁쓸한 맛은 '인생의 쓴 맛을 봤다..'처럼 실패나 좌절 경험에서 비롯되는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개인이 유난히 실패와 좌절을 겪을 확률이 높은 나라일까요? 이런 종류의 경험은 통계로 잡힐 성격이 아닙니다. 나의 성공과 실패는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봉이 4,000만원인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성공한 것일까요 실패한 것일까요? 연봉이 1억인 사람에 비하면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2,000만원인 사람보다는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연봉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연봉 1억인 사람은 가족도 없이 외롭게 살고 있지만 2,000인 사람은 가족과 함께 알콩달콩 살고 있다면 더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다시 한번, 가족과 사는 것이 성공 여부를 가를 수 있을까요?

이렇듯 성공과 실패는 그 기준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좌절

그렇다면, 씁쓸함이란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주관적 감정경험의 방식, 즉 마음의 습관과 관련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실패와 좌절은 문화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씁쓸하다’는 심상을 떠올리는 것은 한국적인 현상입니다.


문화심리학자 최상진에 따르면, 좌절경험 후의 씁쓸하다는 감정은 '한(恨)'과 관련있어 보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한(恨)이 한국적 정서라고 하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오해입니다.


어떤 정서가 한국적이라는 이야기는 한국인들이 특정 맥락에서 문화적으로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 방식이 있다는 뜻이지, 세상 사람들 중에 한국인들만 한을 느낀다거나 한국인들만 좌절스럽고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아무튼, 최상진은 한을 크게 정서(emotion) 수준의 한, 정조(sentiment)로서의 한, 성격 특질(trait)로서의 한이라는 세 개의 차원으로 구분하였는데, 정서수준의 한은 억울함, 분함, 울화 등의 정서이며, 정조로서의 한은 문학이나 예술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외로움, 쓸쓸함, 자책감 등의 정동수준의 한이 순화된 감정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격수준의 한은 정동수준 혹은 정조로서의 한이 사람의 내면에 스며들어, 인생무상, 체념, 현실초월 등 세상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하는데요.


여기서 씁쓸함이란 감정은 정조 혹은 성격 수준의 한에 해당합니다. 씁쓸하다는 좌절경험 후의 자조(自嘲)와 자탄(自嘆)의 감정입니다. 실패나 좌절을 만나면 사람들은 우선 분노합니다.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조

그 원인이 불공정했다고 생각되면 더욱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쉽게 역전되지 않고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이런 격렬한 분노를 지니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치고 힘드니까요.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이 경우에 한국인들은 실패와 좌절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분노를 견딜만한 것으로 만드는데, 이 과정이 한(恨)의 핵심 과정입니다. 그리고 좌절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생각했을 때 경험되는 감정들이 자책과 자탄의 정서들입니다.


내 탓이다, 내가 힘이 없고 못난 탓이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기력감과 함께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솟아오릅니다. 격렬한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혀 끝에 맴돌게 되는 것이죠.


이렇듯, 한국문화에서 한은 실패와 좌절에 대처하기 위한 감정통제의 기능을 해 왔습니다. 한국인들이 씁쓸함을 곧잘 느낀다는 것은 이런 문화에서 몸에 밴 감정경험 방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의 기능은 감정의 통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패와 좌절을 내 탓으로 귀인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내 탓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뜻도 되지만 지금부터 그것은 내 하기 나름이라는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상황에 대한 통제력이 회복되는 것이죠.

와신상담

이전에는 내가 힘이 없어서 당했지만 이제 내가 힘을 키우면 상황은 역전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씁쓸함 다음에는 내 영역입니다. 내가 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씁쓸함은 큰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게 됩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마음으로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씁쓸함, 즉 자책과 자탄, 자조에 그친다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 역시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삶의 통제력 또한 회복되지 않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순실은 왜 '억울하다'고 외쳤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