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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Oct 23. 2019

최순실은 왜 '억울하다'고 외쳤을까?

억울의 문화심리학적 의미

한국인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억울이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은 대개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부당한 취급을 당했거나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인데요. 억울은 우리 역사에서도 꾸준히 발견되는 문화적 정서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5816건, ‘승정원일기’에도 5159건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대개가 ‘○○○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다시 심의하게 하였다’ 내지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없게 하기 위해 재심이나 사면 등의 조치를 취했다’는 내용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억울이 중요하다는 것은 신문고, 격쟁 등 백성들이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고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문고(申聞鼓)는 조선 태종 1년(1401년) 처음 설치되었는데, 신문고를 쳐 접수된 사안은 5일 이내에 응답하도록 하였습니다. 서울에 오기 어렵거나 그 5일도 기다리기 힘든 경우에는 신문고 외에도 격쟁(擊錚)이라는 제도를 이용하기도 했지요.

격쟁이란 '징(혹은 꽹과리)을 친다'는 뜻인데, 왕의 행차할 때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행차를 멈춰세우고 자신의 사연을 왕께 직접 고하는 제도입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백성의 억울함은 국정의 운영에 매우 중요하고 또 신속하게 처리되어야 하는 사안이었던 것입니다.


‘억울’은 한자로 抑鬱이라 쓰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억눌리고 침울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보통 우울(depression)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억울을 사용하는 맥락은 우울과는 전혀 다릅니다.


‘억울’에 ‘하다’가 붙은 ‘억울하다’의 경우, 표준 국어대사전에서는 ‘사람이 처한 사정이나 일 따위가 애매하거나 불공정하여 마음이 분하고 답답하다’라고 풀고 있는데요.


우울(憂鬱)이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억울은 답답하다는 뜻과 더불어 분하다는 정서가 뒤따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분(憤)하다’는 스스로 인정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불쾌, 불행한 사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데서 오는 원망스럽고 마음 아픈 감정입니다.


따라서 억울하다는 말은 자신이 겪은 어떤 일이 불공정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 때문에 매우 답답하고 불쾌하다는 뜻이 됩니다.


한국문화에서 억울은 주로 정신건강상 좋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우선, 억울은 화병의 원인으로 언급되어 왔죠.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에 대한 편람(DSM) 4판에 실려있는 화병(火病, Hwa-Byung)은 한국의 문화적 증후군으로 일종의 “분노 증후군(anger syndrome)”으로 볼 수 있는데요.


화병의 증상에는 불면증, 피로, 공황, 곧 죽을 것 같은 공포, 불쾌한 정서, 소화불량, 거식증, 호흡곤란, 심계항진, 일반화된 통증, 상복부에 덩어리가 있는 느낌 등이 포함됩니다.

화병은 억울한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억제함으로써 발생하는 병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신의학에서는 화병의 원인을 분노와 같은 감정의 억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억울로 인한 분노를 발산하지 못하는 데서 화병이 발생하는 것이죠.


한국에서 억울과 관련된 또 한 가지 문화적 현상은 자살입니다. 한국에서는 정치나 경제 스캔들에 연루된 관계자들이 피의 혐의를 받은 후나 조사 과정에서 억울하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자살을 하는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억울이란 결국 화병이나 자살이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상태를 유발하는 매우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한국인들이 억울함을 자주 경험한다는 것은 낮은 행복도와도 분명 관계가 있어 보이는데요. 한국인들 왜 억울함에 민감한 것일까요?


억울은 자신이 당한 부당한 피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경험되는 정서입니다. 억울의 정서는 우선, 억울함을 느끼게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로 나타나지만 분노 외에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자책과 절망감 같은 자기초점적 정서나 상대방에 대한 배신감이나 서운함 같은 관계적 정서도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이러한 복합적 정서는 억울함의 해소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미해결된 상태로 남아있기 쉬운데, 한국의 문화적 증후군으로 손꼽히는 화병은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정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은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하면서도, 유교적 가부장적 전통과 관계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수직성이 강하기 때문에 부정적 정서의 개인적 표현을 강하게 금기시하는 정서표현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한국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정서의 표현을 억제하고 조절해야만 하는 상황을 더 많이 접할 수밖에 없죠.


억울함을 화병의 주요 원인이라고 보는 정신의학계의 논의들은 억울의 정서억제적 측면을 뒷받침합니다. 즉, 한국인들은 직접적인 정서표현이 규제되는 문화적 속성으로 인해 자신에게 손해가 발생하는 상황에 따르는 부정적 정서들을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억제하거나 ‘억울’이라는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상대방과의 관계를 해칠 위험성이 큰 분노와 같은 정서는 억제해야 한다는 문화적 압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이를 견디기 어려운 개인에게서는 병리적인 현상으로까지 발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억울함을 많이 느끼는 것은 오로지 부정적 정서표현을 억제하는 한국의 문화 때문일까요? 다른 나라에 억울과 같은 정서가 문화적으로 덜 형상화되어 있는 이유는 그 나라들이 한국보다 훨씬 공정하기 때문일까요? 한국사회가 보다 공정해진다면 한국인들은 억울을 덜 경험하고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물론 현재 한국사회는 여러 곳에서 공정하지 못한 모습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완전히 공정해진다고 하더라도 한국인들이 억울함을 덜 느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례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 중에는 누가 봐도 그 사람이 잘못한 경우도 있는데요.

국정농단으로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초래한 최순실조차도 법정에서는 억울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 법원 미화원 아주머니께 염병하네X3..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한국인들이 억울에 민감한 것은 우리의 마음 경험 방식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부정적인 사건을 부당하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나는 대단히 억울한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별 일 아니라는 반응에 더 상처받았던 기억 하나쯤 있으실 겁니다.


한국인 마음의 주관적 측면에 대해서는 제 다른 글 한국인 마음의 질(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66)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억울에 부정적인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인들에게 억울은 분노의 억제보다는 표출에 가까우며 간접적이나마 부정적 정서를 표출하는 것은 이를 쌓아두고 억제하는 것보다는 정신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 억울의 문화심리적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억울하다’고 소리높여 외치는 것은 분하고 답답한 마음의 표출이자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부당함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소통의 방법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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