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정서의 이해
한국인의 마음의 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의 문화적 정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적 정서란 특정 문화권에서만 이해되는 정서를 의미하는데요. 문화적 정서는 대개 그 문화(지역, 민족, 나라)의 언어로 표현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정교화된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 심리학에서 정서는 문화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것이라 여겨져 왔습니다. 기쁨, 슬픔, 분노, 공포 등의 정서는 발생적인 측면에서 생물학적인 기원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었죠. 그러나 비교문화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정서가 문화보편적이라는 기존의 관점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물론 정서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말은 정서의 생물학적인 과정이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정서가 발현되는 생물학적인 과정은 문화를 떠나서 보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말은 정서에 대한 해석이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정서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말은 어떠한 정서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 특히 어떠한 정서가 한 문화에서 독특하게 경험되는 성질의 것이라면 그것의 배경이 되는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Schachter와 Lazarus 등에 의해 제안된 인지평가이론과 궤를 같이 하는데요. 인지평가이론은 정서가 생리적 반응뿐 아니라 개인이 처해있는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개인의 해석과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정서를 경험하는 개인이 처한 상황과 그 정서에 대한 해석체계는 그가 살고 있는 문화에 의해 규정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인류학자 Geertz는 ‘문화는 해석의 체계’라는 의미심장한 정의를 내린 바 있지요.
특히 정서를 표현함에 있어서 문화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사안입니다. 인간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정서표현 규칙을 습득해 표현하고자 하는 의향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을 훈련하고, 표현된 정서를 이해하기 위한 능력과 주의도 발달합니다.
앞서의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인 특수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강한 한국인의 정서경험(주인성 마음)들은 기존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제부터는 한국인들이 정서를 경험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인들은 정서를 표현할 때, ‘느낌’ 혹은 ‘감(感)’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느낌은 생각이 개입되기 전의 즉각적 경험을 뜻합니다.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움직였음을 ‘느끼는’ 순간이죠.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 반추적 (reflective) 사고를 하게 됩니다. 반추적 사고란 자신이 한 경험을 되새겨 자신을 중심으로 사태의 의미를 파악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입니다.
흔히 기본 정서로 알려진 분노, 슬픔, 기쁨, 혐오 등을 유발하는 자극들은 이러한 반추적 사고가 개입될 여지가 없이 명확합니다. 이들 기본 정서들은 유기체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답답하다, 아쉽다, 서럽다, 서운하다, 한스럽다, 억울하다, 안타깝다 등의 문화적 정서는 어떠한 사건을 경험하는 개인이 자기관여적으로 체험하는 주관적 성격을 갖습니다. 자기관여적이란 사건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자신의 배경, 도식, 가치, 목표 등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시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들은 공포나 혐오처럼 개체의 생존과는 관련이 없는, 문화적 관습이나 가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충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애매한 느낌이지만 자신(주인성 마음)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그런 기분이죠. 사람들은 이러한 느낌을 이해하기 위해 반추적 사고를 하지만 이 과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관여적 경험에서 작용하는 강한 주관성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느낌을 확인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타인들의 반응, 즉 사회적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문화적 정서의 경험은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은 개개인이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해석들이 온전히 자의적일 수는 없는 것이죠.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특정 상황맥락에서 정서를 경험하고 해석하는 문화적 규칙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개인적인, 주관적 정서경험이라 해도 해당 문화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의 경험과 해석의 틀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다른 이들의 정서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의 문화적 정서를 이해하기 위한 두번째 과제는 한국인들의 대인관계 양상과 그 관계 내에서의 교류방식 등에 대한 이해를 갖추는 것입니다.
우선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국인들의 대인관계 양상은 ‘우리성-정’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성-정 관계는 한국의 관계주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죠. 흔히 한국문화를 집단주의 문화라 하지만, 문화심리학자들은 한국인들의 경우 자신이 속한 집단 자체보다는 자신이 맺은 관계의 내용과 지속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관계주의 문화라고 보는 편이 옳다고 봅니다.
관계주의 문화에서는 집단이 가시적 구조로서의 존재성을 지니고 개인을 압도하기보다는 개인에게 연계망을 제공하는 구조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들이 자신이 소속한 집단에 의해 영향을 받기보다는 자신이 형성하고 있는 인간관계의 동학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 '우리'이고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맺는 관계가 ‘우리성’의 관계입니다. 물론 대인관계의 양상은 공적관계와 사적관계로 구분할 수 있지만, 다양한 마음의 질을 파생시키며 문화심리학의 관심주제가 되는 것은 사적관계, 즉 ‘우리’ 안에서의 마음경험이지요.
특히 한국문화에서 대인관계의 양상은 우리성이 전제된 관계(우리)와 그렇지 않을 때에서 크게 달라집니다. 우리가 개입되지 않은 인간관계에서의 교류원칙은 합리성과 이성, 이해타산의 논리인 반면, 우리 내에서는 ‘우리 지각(우리편)’, 사적인 정과 의리, 감정의 논리를 바탕으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러한 한국인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화적 정서의 대표적 예는 정(情)입니다. 정에 대해서는 이전 글 "정이란 무엇인가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08"를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듯, 문화적 정서는 정서 자체뿐만 아니라 해당정서를 경험하는 맥락, 관계의 종류와 질, 행위양식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문화적 정서들의 의미와 맥락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한국인들의 주관적 정서경험을 만들어내는 '자기관여적' 해석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