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를 위한 심리사전 ⑤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공허한 내 마음을 한 번에 휘감아 열정에 들뜨게 만드는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열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고, 그녀로 인해 내 일상은 점점 무너져간다.
“사랑해, 사랑해줘.”
그녀는 끊임 없이 나에게 사랑을 확인하고 내가 잠시라도 대답을 주저하기라도 하면, 나에게 폭언과 함께 물건을 집어 던진다. 그녀의 이름은 베티. 그녀에게 세상은 너무 숨막히는 곳이다.
영화 <베티블루 37.2>의 주인공 베티(베아트리스 달)는 매우 충동적이고 감정의 변화가 큰 인물로, 애인이든 이웃이든 누가 조금만 뭐라고 해도 화를 참지도 못하고 자해를 하거나 상대를 위협한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베티가 자신이 임신한 줄 알았다가 후에 상상 임신이었음을 알게 되고 괴로워하며 공격성이 자신에게 향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경계선 성격의 인물이 나온 소설과 영화에서는 주로 그 인물을 통해 인간의 성적인 욕망을 잘못된 방식으로 해소하고 관계에 집착하면서(eros) 일상과 관계를 모두 파괴하는 결과(Thanatos)를 다루고 있다. 경계선 성격의 인물은 신체적으로만 성숙해졌을 뿐,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데, 독자와 관객은 예상을 뛰어넘는 이 인물의 욕망 추구와 파괴적인 모습을 통해 은밀한 스릴을 느끼게 된다. 한 마디로, ‘매력적인 미치광이’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인물형이다.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감정 및 집착과 파괴적 행동으로 치정극이나 스릴러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는 성격장애. 75% 정도가 여성. 성인기 초기부터 지속적인 불안정성을 보이며 심한 정서적 문제나 자해행위, 섭식장애, 약물중독 등으로 병원을 자주 드나든다.
경계선이란 신경증과 정신증의 경계라는 의미로, 정상과 이상의 경계를 뜻하진 않는다. 대체로 신경증은 우울과 불안, 무기력 등의 감정 조절의 문제를, 정신증은 현실검증력의 문제(예, 하얀 책상을 소복 입은 귀신이라고 한다)를 동반하는데, 경계선 성격장애는 이 두 종류의 증상이 모두 나타난다. 예측불가능한 다양한 돌출행동과 불안하고 충동적인 감정표현이 특징이다.
불안정한 자아상으로 자신에 대한 혼란을 느낀다. 혼자 있을 때면 공허함과 우울을 느끼다가도 때로는 과음을 하거나 약물에 빠지기도 하고 끝없이 물건을 사거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맺기도 한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면 일시적으로 현실 인식에 장애를 보일 수 있다. 충동적으로 자해나 자살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경계선 성격이 보이는 다양한 증상때문에 양극성, 자기애성, 조현형 성격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만큼 경계선+양극성, 경계선+자기애성 등의 복합적인 성격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높다.
컨버그(O.Kernberg)의 경계선 성격조직(Borderline Personality Organization; BPO)에 따르면, 첫 번째로 자기와 타인들에 대한 분명하고 일관된 감각의 결여로 정체성이 혼미한 특징이 있고, 두 번째로 분리를 경험할 때 자신이 느낀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온 것으로 인식하는 투사와 같은 원시적 방어제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취약한 현실검증력으로 직장과 가정 내에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심리적으로 기능적인 사람은 자신과 타인에 대해 통합적이고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경계선 성격의 인물은 그러지 못해 한 대상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시각(천사-악마, 구세주-쓰레기)을 동시에 가지거나 시시각각 다른 평가를 내린다.
행동특성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행동. 수면 패턴이 불규칙하며 잠들고 깨어나는 것을 조절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거나 사고유발, 자해, 자살기도 등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과도한 도박, 음주, 절도, 성행위 등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한다.
특히 대인관계 양상에서 격정과 분노가 교차하는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기분이 현저하게 불안정한데, 버려진다는 공포와 상대에 대한 의존 및 집착이 공존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자해나 자살기도 등이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는 연쇄반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들의 극단적 행위양식은 이분법적 사고라는 인지적 오류의 결과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이상화하거나 하루아침에 원수로 만들기도 하고 상대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수용이 아니면 거부로 해석하거나 자신의 상태도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라고 받아들인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는 독특하게 경계선 성격의 인물이 화자로 등장해, 관객이 경계선 성격 인물의 생각과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경계선 성격 장애로 진단 받은 수잔나 케이슨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던 수기를 원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수잔나 케이슨을 연기한 위노나 라이더가 보이는 위태로운 모습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충동성을 억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충동적이고 파괴적이면서 자유롭지만 끝내 병원을 떠나지 못하는 리사(안젤리나 졸리)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하게 되면서 충동성을 조절하며 내면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며, 자신을 괴롭히기만 한다고 생각한 부모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도 화해하는 데에 이른다.
이 영화를 통해 이해하기 힘든 경계선 성격의 인물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다소 어렵더라도 경계선 성격의 인물도 회복과 성숙이 가능하다는,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희망적인 결말을 만날 수 있다.
무의식적 행동/욕구
이들에게는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는’ 강한 욕구가 있다. 이는 불안정한 자아상과 관계가 있는데, 자신에 대한 혼란스럽고 확신없는 인식은 누군가의 인정과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의 불안정한 자아상은 건강하고 성숙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파괴적 행동을 낳는다.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도 유명한 원작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의 세르세이 라니스터는 세력가인 라니스터 가문의 장녀이자, 칠왕국의 왕비로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항상 결핍을 느끼고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인물이다.
세르세이는 왕인 남편과 정략 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로, 서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다른 연인을 두고 있다. 그래서 세르세이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없으며, 쌍둥이 남동생인 제이미 라니스터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가 셋이다.
제이미 라니스터는 뛰어난 검술사지만, 누이 세르세이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인물로, 세르세이에게 완벽하게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제이미가 세르세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때는 세르세이가 제이미를 자신의 반쪽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저주를 퍼부으며 난장을 친다.
세르세이와 제이미의 관계는 경계선 성격과 의존성 성격의 인물이 서로 깊게 얽혀 어떻게 파국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 이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경을 넘어가도, 심지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도) 절대 헤어지지 못하는 관계이며, 죽음으로서만 헤어질 수 있다.
세르세이와 제이미의 관계 양상을 통해 서로를 불행으로 이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끊임 없이 불행한 관계를 반복해가는 커플에 대해 이해해볼 수 있으며, 한 개인의 내적인 취약함이 어떻게 다른 이의 취약함과 연결되어 시너지(부정적, 긍정적)를 내게 하는 게 알 수 있다.
유전/생물학
경계선 성격장애는 가족력의 영향이 크다. 이 장애를 가진 이들의 부모들은 우울 및 관련장애가 있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충동성 및 정서조절과 관계있는 세로토닌의 기능수준이 유의미하게 낮다. 또한 편도체의 과활성화와 전전두피질 활동의 저하 역시 경계선 성격장애의 원인으로 꼽힌다.
부모와의 관계
애착 형성 시기 부모(특히 어머니)와의 나쁜 관계가 원인으로 꼽힌다. 안정적인 애착의 조건은 주양육자(주로 엄마)의 신뢰로운 양육태도다. 신뢰는 양육자의 책임있고 일관된 태도로 형성된다. 특히 양육자의 정서적 학대나 혼란스러운 양육방식, 예를 들면 어쩔 때는 더없이 잘해주다가 갑자기 차갑고 가혹하게 돌변하는 것은 아이에게 불안한 자아상과 정서 반응을 야기한다.
핵심 원인
경계선 성격장애의 불안정한 자아상은 ‘분리-개별화’ 단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분리-개별화란 아이가 부모와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독립적인 자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다. 처음에 아이들은 엄마와 자신이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차차 인지와 정서가 발달/분화하면서 독립적인 자아를 발달시킨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애착과 신뢰가 충분히 구축되었다면 분리 후 독립적이고 건강한 자아로 발달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분리는 되었으나 개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불안한 자아를 갖게 된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의존할 대상을 찾고 다음에는 그에게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다.
병리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늘 불안하며 관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기 이미지나 자신에 대한 느낌에 지속적인 불안정성이 있어, 극적으로 자아상이 변화하고 미래의 직업, 성 정체성, 자신과 잘 맞는 친구의 유형이나 가치관이 한 순간에 바뀌기도 해, 일상이 병리적 상태다.
불안정한 자아상과 만성적인 공허감에 충동성이 더해 자신에게 파괴적인 일을 감행하기도 하는데, 열심히 노력해 얻은 결과가 눈 앞에 있게 되었을 때 스스로 그 결과를 뒤엎기도 하고, 도박이나 폭음, 폭식을 하거나 자해를 하기도 한다. 반복적인 상황의 악화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이어지면, 환청과 환각 등을 경험하다 자살로 종지부를 찍기도 한다.
범죄
경계선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적 규범을 어길 때의 키워드는 “살려줘, 도와줘, 나를 구원해줘”가 될 것이다. 그들이 저지르는 반사회적 행위는 모두 자기파괴적 행위의 연장이고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원하는 관심, 내가 원하는 사람을 도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그들은 충동적으로 아무 짓이나 저지를 것이다. 그 때문에 결국 원했던 것을 모두 잃을지라도.
경계선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학교에 늘 존재하는 ‘아 그 우울한 애? 근데 좀 미친 애?’의 역할을 맡고 있다. 청소년기엔 누구나 질풍노도의 감정변화를 겪지만 경계선 성격장애를 가진 청소년의 정서적 역기능은 극단적 분노와 우울 사이를 오가는 롤러코스터처럼 그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그런 상태가 안정적으로 지속된다는 데서 그들의 청춘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불안정성은 충동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들은 소위 일진과는 다르지만 술이나 담배, 약물을 남용하는 부류가 된다. 품행장애, 즉 일종의 반사회적 성격장애의 청소년 버전으로 불량학생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지 단순히 재미로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다. 일진이 과시하기 위하여 문신 같은 것을 몸에 새긴다면, 이들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몸에 자해를 한다.
부모와의 관계/양육
우울 관련장애나 정서조절 문제를 가진 부모. 또는 엄마가 아이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줄 수 없는 여건이 필수적. 부모의 학대는 편집성 성격장애, 반사회성 성격장애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경계선 성격장애의 경우는 부모의 언어적, 정서적 학대와 관계 있다. 특히 자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는 정서적 학대는 자녀의 자아상 형성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친다.
취약상황, 갈등요인
경계선 성격의 인물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동이 촉발되는 것은 이별이나 타인으로부터 거절 신호, 책임 있는 일을 맡을 때 등이다. 이런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경계선 성격의 인물에게 타인으로부터 버림 받는 두려움을 야기한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 닥치거나 예상되면 경계선 성격 인물의 사고, 감정, 행동에 심각한 혼란이 발생한다.
특히, 경계선 성격의 인물이 의지하던 이성과 헤어진 후(버림받은 후) 심각한 우울과 현실 인식 장애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데, 일상적인 생활과 역할수행에 어려움을 겪으며 이로 인한 문제들(생활고, 고립 등)이 이어질 수 있다.
스트레스 사건으로 인해 증상이 발현되고 악화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적극적인 의료적 개입-입원이나 격리치료가 필요하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성격장애에 대한 규명도 어렵고 개인마다, 시기마다 발현되는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치료 장면에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고 불안정한 자아상과 세상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치료자와의 빈번한 갈등 등도 예견된다.
#살려줘도와줘나를구해줘 #나는나를파괴할권리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