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에 나타난 식인과 인신공양의 이유
인류에게는 식인(食人)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과거 어느 시기에는 분명히 벌어지던 일이었죠. 식인의 이유는 우선 식량 부족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을 먹는 경우입니다. 인류학자들은 구석기 시대 식량 부족으로 식인이 널리 행해졌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러한 이유로의 식인은 비교적 최근까지 곳곳에서 이루어졌는데요.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이나 기근 등으로 식량이 부족해지면 사람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었죠. 우리나라도 임진왜란이나 경신대기근 중의 식인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근대에도 범선으로 항해했던 시대에 난파한 선원들이 동료를 먹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고, 현대(1972년)에도 안데스 산맥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사망자들의 시신을 먹으며 버텼던 사건이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유감주술의 일환으로서의 식인입니다. 유감주술(類感呪術)이란 비슷한 것(類)끼리 감응(感)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주술행위인데요. 이를테면 맹수를 잡은 사냥꾼들이 맹수의 심장을 먹는다든가, 맹수의 이빨이나 뼈를 걸고 다니며 맹수의 용맹이 자신에게 옮겨오길 바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전사들은 용맹했던 적의 내장을 먹으며 같은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또한 유감주술과 비슷한 맥락에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기억하기 위해 시신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일부로 남아있기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실제로 파푸아뉴기니에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이러한 풍습이 남아있었다는군요.
전쟁에서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의도적인 식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금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먹어줄게!' 라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적에 대한 적개심을 식인이라는 행위로 해소하거나 드러내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1510년(중종5년) 벌어진 삼포왜란에서 조선 장수 소기파는 왜적을 죽이고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얻은 별명이 소야차(蘇夜叉). 소기파는 평소 신망이 두텁고 백성들에게도 선정을 베푸는 관리였다고 하니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였을 가능성이 크죠.
이러한 식인 풍습은 종교가 사람들의 행위를 제한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일부 고립된 지역의 원시 부족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졌습니다만, 비교적 최근까지 식인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 있습니다. 바로 아즈텍인데요.
아즈텍의 식인 문화는 정복자 코르테즈의 원정에 참여했던 병사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와 디에고 두란 수사의 기록에 남아있는데, 아즈텍인들은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수백 명씩 죽여 돌칼로 심장을 꺼내고 고기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아즈텍에는 포로의 심장을 바쳤던 제단과 죽은 포로들의 해골로 만들어진 거대한 탑이 발굴되면서 이러한 식인설은 오랫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즈텍의 잔혹한 풍습에 아연실색하고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이를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문화를 물질적인 환경 조건으로 설명해 온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소나 말, 돼지, 양 같은 거대 포유류가 없었던 아즈텍 제국에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식인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인간 종(種)의 진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하는 단백질을 위해 사람을 먹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아즈텍의 식인이 기록된 것은 정복자였던 스페인의 기록뿐으로, 당대 아즈텍 인근의 기록에는 아즈텍에서 사람을 먹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발견된 해골탑과 인골에서도 식인의 흔적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증거는 없다고 하는데요.
이에 따르면 과거에 알려졌던 것처럼 아즈텍에 일상화된 식인 풍습이 존재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전쟁포로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신에게 바쳤던 인신 공양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은 외부인의 시각에서 식인이라 착각하거나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한데요.
그렇다면, 아즈텍의 경우는 식인이 아니라 인신공양의 관점에서 다시 이해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신공양은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에게 사람의 생명을 바치는 고대의 종교적 제의입니다. 사람들은 신의 분노를 잠재우거나 신께 중대한 부탁을 드려야 할 때 사람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러한 인신공양의 흔적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며 우리나라에도 신라 월성터에서 인신공양의 흔적이 발굴된 바 있습니다. 또한 심청전이나 지네와 두꺼비 설화 등에서도 인신공양 풍습의 자취가 남아있죠.
사람이 귀했던 고대사회에서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절박함입니다. 귀한 사람을 바칠만큼 절박하니 부디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이 귀했던 시절이니만큼 인신공양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대규모 인신공양이 남아있었던 곳이 아즈텍이라는 사실은 아즈텍에 그만한 절박함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즈텍인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가뭄이었습니다. 아즈텍이 있었던 메소아메리카는 주로 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경문화권입니다. 특히 이 지역은 호수 위에 인공적인 농지를 만들어서 농사를 짓는 ‘치남파’라는 농법을 발전시켰는데, 치남파는 물이 풍족하면 엄청난 생산성을 보장하지만 가뭄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죠. 이 때문에 메소아메리카에서 번성했던 문명들은 가뭄에 대한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9세기경 전성기를 맞던 고전 마야문명이 갑자기 멸망한 이유 또한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추정되며, 이후 새롭게 형성된 신마야 문명의 유적에서는 비의 신 차크 몰에 대한 강박적인 신앙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예전부터 이어져오던 인신공양의 풍습은 비를 내려주고 농사를 잘 되게 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신들의 희생에 대한 대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즈텍인들은 ‘신들이 희생함으로써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소아메리카에는 신들의 희생 덕분에 우주가 지속된다는 관념이 있었고, 그로부터 비롯된 신들에 대한 강렬한 죄책감 및 부채의식이 있었다. 아즈텍어로 인신공양을 의미하는 ‘네슈틀라우알리’라는 말 자체가 ‘빚을 갚는다(debt-payment)’는 뜻이죠.
따라서 아즈텍인들은 많은 사람을 바쳐서 신에 대한 부채의식을 갚는 한편, 그만큼 절박하고 간절하게 비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신께서 비를 내려주시는 만큼 사람들은 그만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논리죠. 우리는 여기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식인 또는 인신공양이라는 행위에도 어떤 이유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아즈텍인들이 결국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한다는 기독교의 교리가 이들의 종교적 심성과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역사상 인간의 피로 지속해 온 가장 잔인한 종교와 평화와 사랑을 전파하는 종교가 같은 심성에 기원을 두고 있다니 자못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