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자란 나는 매월 한두번 이상의 제사와 명절의 차례와 함께 어린날을 보냈다.큰 상에 음식을 차리고 일가 친척들이 모여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것고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제사와 차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아버지댁으로 이어졌고, 이 모든 행사는사실상큰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큰집의 차례는 제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제삿날은 아무래도 좀 빼먹는 인원도 많아서 비교적 소규모로 모이게 되고, 요즘엔어른들이 '얼굴 아는 분들' 기일로 모아 챙기며 횟수도 제사상 규모도 확 줄었다.하지만 차례는, 아버지 5형제의 식솔과 친지들대략삼사십명 이상이 거의 전원 출석하여 큰집을 드나들며하루종일 상을 차리고 치우게 되는 세레머니다.
제사가 아이돌 그룹의 몇명이 활동하는 유닛 활동이라고 한다면,차례는 아이돌 완전체가 다 모여서 각잡고 퍼포먼스하는 정식 콘서트라고나 할까.
아이돌 유닛 vs 완전체 콘서트. -세븐틴
그런데 꼬장꼬장하고 보수적인우리아재들인데, 차례를간소화한다는 차원도 아니라 아예 없앤다는 생각을 어떻게 해낼 수가 있었지? 차례 주관인 큰아버지는 절대 그런 생각을 먼저 해내실 분이 아니었다. 그러면 누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스스로 생각하고 설득해 실행에 옮겼다는 건가,짐작도 안 가는 일이었다.
"아니 엄마, 도대체 어떻게 차례를 없앴다는 거에요?"
"어떻게 없애긴 그냥 없앴지.그게 어디 신고하고 허가받아야 되는 일이냐? 이번에다들 모인 자리에서 내년부터 차례지내지 말자고 했어.
형님도 손자들 대학보내는 나이에, 류마티스 걸려 몸이 퉁퉁 다 부었는데 그러면서도 이 큰 일을 계속해야겠니? 그리고 나랑 며느리들도 다 힘들다!
안 해본 사람들은 모른다. 전 부치고 음식 만드는 것만 일이냐.그 많은사람 먹을걸 장 보고 재료 준비하기 얼마나 힘든데. 음식만 하는줄 알지, 집으로 손님이 많이 오니 미리미리 집 청소하고 준비해야지.사람들 많이 올때는음식설거지만 한시간 걸리기도 해!
형님한테 없애자하니 차마 자기 대에서 끊을수 없고, 절대로 직접 그런말 못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둘째인 내가얘기했다.
내가 말 잘하게 보이나? 나한테 시키게..하하하~
이 모든걸 설명하고, 없애자고 하니 아무도 계속해야 한다고 안하더라.
이렇게 쉬운줄 알았으면 진작 없앨걸.
헤어지는데 그 무서운 형님이 나한테 뛰어와서 내 손을 덥석 잡더라.
'둘째, 수고했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시대.
솔직히 몇십년을 이게 다 뭐래. 니들 어릴때야 음식 만들어먹고 애들 노는거 보는 재미라도 있었지.
이제 다들 애들도 다 크고 결혼까지 시켰고 자손도 많아져 집집마다 챙길 것들도 많아졌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해. 할거면 각각 자기들 집에서 알아서 할 일이야."
결국 '아재'들은 하던대로 가만 있고, 큰 며느리는 차마 말 못 꺼내고, 둘째며느리가 나선 거다.
평생 큰소리 한번 안내고 얌전하기만 하던 엄마가 이처럼목소리 있고 멋진 분인줄 몰랐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존재해온 차례라는게, 이렇게 아무 저항도 없이 한방에 없어지는 것이 놀라웠다.
결국어르신들도 누군가가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렸던 거겠지.
큰엄마 평생 고생 많으셨어요.
거기에 큰엄마의 카리스마를 평생 조용히 뒷받침하며 당신의 직장과 이 번잡한 행사 사이를 바삐 오갔던,